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정길 후손
강제동원 인부 폭행한 日감독자 구타
부친 지원으로 은둔 생활·의병 조직
가문 담살이 안규홍 배후서 재정지원
부모·아내 잃고 징역살이 중 탈옥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⑨정태화
필자는 전남도가 전국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최초로 추진한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찾는 작업을 총괄하면서 2천명이 넘는 이들을 찾았다.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어려운 작업이었다. 이들을 서훈으로 연결해 조국의 제단에 피를 뿌린 선열들에게 작은 보답을 하려고 한다.
의병 전쟁에 참여한 전남 출신 의병계열 독립운동가 795명을 찾았다. 이들 가운데는 출신 지역을 확인하기 어려운 인물도 꽤 있다. 끈질긴 관심과 연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이번 일을 하면서 의병 전쟁의 한 축을 담당한 보성 의병 관련 수형인 명부를 발굴했다. 무척 반가웠다. 이들 가운데 자수한 이도 꽤 있다.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된 경우라 하겠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지난 5일 필자는 보성에서 향토사를 공부하고 있는 문의식 선생을 만나러 미력면 용지등 자택을 찾았다. 선생은 퇴직공무원으로 보성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필자는 용지등과 가까운 겸백면 도안리 선돌마을에 있는 정태화(1870~1955) 의병장의 묘소를 찾았다. 정태화의 손부(임금례, 86세)는 우산을 지팡이 삼아 마을 앞산에 모셔져 있는 시조부의 묘소로 안내한다. 언덕을 힘들게 올라오는 할머니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손부는 정태화 의병장의 전설 및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사실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관동 의병 출신으로 순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강용언을 축출하고 독립 의병부대를 형성한 안규홍은 고흥, 순천 등지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충원하고 있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충원하는 양상은 심남일 의병부대에서도 흔히 보는 광경이었다.
의병 주도층이 최익현, 기우만 등 지역의 명망가들이 앞장섰던 이전과는 달리 서당 훈장, 평민층, 해산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 의병 전쟁의 전면에 나서면서 나타난 양상이었다. 특히 평민 출신이 대거 의진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보성 겸백 출신 의병들이 있었다.
보성 의병의 전설 안규홍은 의병부대를 결성할 무렵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았다. 지역 자산가들은 의병을 빙자한 도적들이 횡행하고 있을 때 그들의 재산을 지키려고 이른바 자위단을 조직했다. 안규홍도 처음에는 이 자위단에 들어갔다.
안규홍은 '담살이' 출신 의병장이라고 한다. 담살이는 새경을 받고 고용된 머슴을 말한다. 그가 어느 양반 지주 집 머슴이라는 것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안규홍의 초기 의병부대 결성과 관련해 참고되는 얘기가 정태화 의병 가문에 전하고 있다.
정태화는 본명이 재화(在化), 태화(太化)는 자(字), 호(號)는 백암이었다. 그는 1871년 보성군 백야면 입석동(현 겸백면 석호리 선돌마을)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정환종, 모친은 선갈음, 아내는 김가곡이었다. 머슴이 3명이나 되는 중농이었다. 임진 의병에 참여한 정길의 후손이라는 자부심도 강했다.
1907년 말 정태화는 일본군 기마병의 이동로를 확보하고자 오솔길을 내는 공사에 강제 동원된 동리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본군 감독자를 구타해 중상을 입혔다. 그는 몸을 은신했다.
정태화의 부친 정환중은 친척으로 집에서 일하고 있던 안규홍이 똑똑하므로 그에게 정태화의 피신을 도와주도록 했다고 한다. 이들은 그냥 도피하지 않고, 의병을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안규홍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정태화는 뒤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환중은 아들의 의병 활동을 목숨 걸고 지원했다. 이뿐만 아니라 선돌마을 및 백야면 주민들까지 안규홍의 의병부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규홍이 담살이 출신임에도 초기에 부대 결성이 어렵지 않게 이뤄진 까닭이 아닌가 한다. 겸백, 당시 백야면 출신이 보성 의병에 많이 가담한 배경도 알 수 있다.
안규홍 의병부대에 그가 보성에서 이주해 거주했던 법화마을 출신과 정태화의 고향 백야면 출신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안규홍의 의병을 지원하던 정환종의 활동은 일본군에 노출됐다. 일본군은 동리에 들어와 정환종과 아내 선갈음, 정태화의 아내 김가곡을 고문했다.
이 고문으로 정환종은 현장에서 장살(杖殺) 당했고, 김가곡은 1908년 12월 19일 사망했다. 모친 선갈음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12년 목숨을 잃었다.
의병 전쟁을 치르다 밤에 몰래 들렸던 정태화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사실을 알았다. 그의 항전 의지는 더욱 강렬해졌다.
정태화의 의병활동과 집안의 몰락사는 선돌마을에 살았던 미력댁(1897년생)의 증언을 통해 알려졌다.
생전의 미력댁은 정환종의 의병 지원활동과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은 생생하다.
그의 증언이 믿어지는 것은 굳이 사실을 과장하거나 허위로 이야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인의 만행은 백야면 주민들의 항일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한때 안규홍 의진이 300여 명에 이른 적도 있었는데 선돌마을을 중심으로 겸백면 출신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안규홍이 1908년 7월 겸백 석호산에서 재기하려 할 때 촌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음식물을 제공했다고 한다. 정태화가 그 중심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태화는 1909년 가을 일본군에 체포됐다. 이때 보성 의병 상당수도 함께 체포됐다.
체포될 때의 사정을 해방 후 마을에 들렸던 정태화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고 한다. "마을 인근 아라리제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말을 타고 가던 2명을 체포했다가 무장을 안했다 하여 풀어줬는데 일본군 정찰병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일망타진당했다." 정태화 등이 아라리제 전투에서 체포됐음을 알려준다.
이때 전투에 참여한 이들의 실체를 밝혀주는 수형인 명부가 이번에 찾아졌다. 최동조(17세, 미력면), 박문주(25, 노동면), 조웅(23, 백야면, 겸백면), 김선화(40, 율어면), 한치영(39, 백야면), 선채규(43, 조내면, 조성면), 변봉일(39, 백야면), 정태화(39, 백야면), 정치도(34, 겸어면) 등이다.
이 가운데 선채규는 안규홍 의진의 선군장, 후군장을 맡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09년 10월 30일 재판, 11월 5일 형 확정 등 동일 날짜에다 같은 지역 출신인 것으로 보아 이들이 보성 의병의 한 의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믿어진다.
광주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정태화는 탈옥에 성공했다. 그는 안규홍 의진과 접선을 시도하며 의진을 복구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를 체포하려는 일본 군경을 피해 이름을 '재화(在化), '태화(太化), '재화(在和)' 등으로 바꾸며 은둔했다.
1930년 무렵 선돌마을과 멀지 않은 보성 득량면 마천리 산간에 신분을 숨기며 해방을 기다렸다. 이때 만난 여인 사이에 태어난 수현은 1951년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한다. 대를 이은 희생이다.
40대가 훌쩍 넘은 정태화의 손자(정순권)는 조부의 빛나는 역사를 찾으려 했다. 미력댁의 증언 및 당시를 기억한 이들의 구술을 통해 백야면에서 전개된 의병사를 복원하려 했다. '백암실기'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정태화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같은 의진을 구성한 선채규는 이보다 앞서 2006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들불처럼 일어난 남도 의병, 목숨 바쳐 일제에 맞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전선에 앞장서 왔다. 사진은 조선 오란(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인좌의 난)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호남 의병 2천143위를 기리는 충의사 호국충혼탑.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⑮끝·에필로그?지난 7월 25일 광복회 전남지부 회원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백두산(중국 장백산)이 천지와 간도 일대를 답사했다. 천지 비경을 보는 것은 날씨가 예측 불허해 운이 따라야 했다.올라가는 데 비가 쏟아지더니 천지를 보려고 할 때 구름이 살짝 걷히며 비경을 살포시 드러냈다. 신비로웠다. 단군신화가 떠올랐다.천지 올라가는 낡은 지프를 타려고 무려 2시간 넘게 줄을 섰다. 평일인데도 수만 명이 몰려 있었다. 충격이었다.대한민국 국민은 우리 팀 말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말 안내판도 없다. 이상하다.중국인에게 장백산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몰렸을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조선족 출신 가이드에게 물었다. 2007년 무렵부터였다고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 측이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할 때이다.천지 입구에 영상물 상영하는 공연장이 있었다. 백두산의 사계(四界)를 소개하는 데 천지에 말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중국 역사를 열었음을 웅장하며 신비롭게 묘사했다. 이른바 장백산에서 중국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단군국조는 어디로 가야 할까. 역사가로서 느낀 자괴감은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의 토대이다. 정체성을 잃은 민족은 존립의 근거가 없다.1907년 8월 1일 일제는 기습적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해 국권 침탈을 노골화했다. 서울 시위대 박승환 대대장은 부대 해산명령 대신 자결을 통해 부하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서울 시위대, 지방 진위대 등 자랑스런 대한제국 군인들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의병봉기가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다. '13도 창의군'이라 해 1만명 이상으로 구성된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일본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남도 의병장들이 광주감옥에 투옥됐다.남도 의병은 1907년 가을부터 1909년 10월까지 만 2년 동안 일본군과 400차례 가까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거의 이틀에 한 차례 전투가 치러진 셈이다.1909년 통계를 보면 남도 의병이 전국 의병 봉기의 60%를 차지했다. 일본이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의병들을 쉽게 격파하지는 못했다. 비록 화승총으로 무장해 일본군과 정상적인 전투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치렀다.일본의 식민통치 야욕을 그만큼 늦추게 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런 남도 의병의 모습을 잘 모르고 있다. 서훈자는 전국 통계의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이는 후손이 끊어졌거나 개인이 공적을 입증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더라도 전국 의병의 60%를 차지한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음을 알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에 전남도는 전국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유일하게 미서훈 독립유공자를 찾는 일을 시작했다. 3·1운동 관련 미서훈자를 찾는 1단계에 이어 1895년 의병계열부터 1945년 해방 순간까지 우리 지역에서, 우리 지역 출신들이 국내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사를 발굴하는 2단계 용역이다.2022년 10월부터 시작된 이 용역은 11월 15일 기준 의병계열 795명을 포함해 2천300여 명에 달하는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의병계열은 그 공적을 입증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다. 적어도 150명 남짓 서훈 신청이 가능하리라 본다. 60년 넘게 333명 서훈 신청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이다.남도 의병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는 노력도 부족했다. 일본이 편의상 분류한 이른바 '거괴(巨魁)'라 불렸던 심남일, 김태원 형제, 고광순, 안계홍 등 몇몇에 국한해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남도를 빛낸 많은 의병의 전적이 드러나지 않았다.예컨대 고흥 팔영산 만경암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고흥 의병 120명, 구체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수형인 명부가 있는 보성 의병,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의 주력을 형성한 어쩌면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를 형성한 영암의병 등의 존재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특히 완도, 진도, 신안 등 남도의 많은 섬 지역에서도 의병들의 활동도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형 군함까지 파병한 일본군은 때로는 해상에서 함포 사격까지 가하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남도 곳곳에서 전개된 의병들의 활약상을 그동안 피상적으로 살펴 남도 의병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일본군과 싸워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는 위대한 의병전쟁을 의병운동으로 성격을 짓거나 연합 의진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분산돼 활동해 항전이 실패했다는 주장이 그 예이다.어등산은 김준·조경환·김원범 의병장 등을 포함한 한말 의병이 최소한 50여 명이 전사한 격전지다. 사진은 한말 의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대한제국기 남도 의병은 당시 세계 최강 일본군과 2년 넘게 최후의 1인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장렬하게 옥쇄(玉碎)를 택했다. 그리고 그 의병 정신이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이러함에도 한말 남도 의병의 활동을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이러한 문제 의식을 토대로, 무등일보는 그동안 살피지 못한 의병의 실체를 추적한 특별기획 연재를 했다. 보성 의병을 개척한 정태화, 나주 의병을 상징한 송석래·최택현, 연합의진의 상징 김치홍, 작전의 귀재 권영회, 조직의 귀재 유병기 그리고 고흥 의병을 이끈 신성구 등 새로운 의병 열전을 만들었다. 남도 의병의 스토리가 훨씬 풍부해지고, 성격 규명도 보다 분명해졌다.기획연재와 더불어 대중강연을 통해 남도 의병의 활약상을 널리 알렸다. 국내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은 남도 의병의 핵심을 형성했으나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영암 의병의 의의를 심층적으로 설명해 지역민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학술포럼을 통해선 영암 의병의 실체를 밝혔다. 을미의병에서 남도 의병의 역할을 밝힌 장우순 박사, 그리고 해상 의병의 실체를 밝힌 신혜란 박사의 글 등은 그동안 학술포럼에서 쉽게 접하지 않은 주제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포럼에서 얻은 성과였다.남도 의병의 실체 규명, 빛나는 항전을 전개한 새로운 주역 발굴 및 이들의 활동이 지닌 역사적 의미까지 소개함으로써 역사의 대중화에 한걸음 더 다가간 결과였다. 앞으로도 남도 의병은 우리 민족사를 비추는 존재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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