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샅마다 알려지지 않은 진솔한 민중 이야기 맛동네

입력 2022.05.18. 16:13 박지경 기자
[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화순군 능주
주자묘

[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화순군 능주?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보여줄 아무것 없는 마을의 문제 같지만, 마을을 고작 한 바퀴 돌고 마을 전부를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더 곤란한 문제가 된다. 한 사람의 삶도 이해하기 힘든 데, 어찌 그 마을 사람들의 삶, 그것도 수세대를 흘러온 마을 전체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오만이고, 불가능한 일이다. 능주(綾州)가 그런 곳이다. 멀리서 보면 분지여서 훤히 한눈에 드러나 보이는 것 같은데, 들어가면 갈수록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져버리는 곳 능주다.


◆열사의 영혼 깃든 작은 우물

능주는 몇십 년 전까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한 곳이다. 능성 구씨와 신안 주씨 곧 능성 주씨의 뿌리로 나주와 광주 다음으로 큰 곳이었다.

능주 터미널과 능주역은 시외버스와 기차가 수없이 들고 났다. 능주장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우시장은 호남에서 몇 번째 되지 않게 크게 섰다. 능주가 지형상 전남의 정중앙이기 때문이다.

능주역

능주를 걷노라니 마치 꿈속을 걷는 것 같다. 아니 먼지 위를 걷는 기분이다. 유년 시절 그 쉴 새 없이 드나들던 차들과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텅 빈 상가와 터미널, 공허한 능주역 주변을 보고 있노라면, 일시에 그 많던 사람들이 숨바꼭질하듯 숨었거나 어떤 공간으로 눈 깜짝할 사이 이동한 것처럼 무상감이 든다.

이한열 생가는 남정리 도로변에 있다. 30년이 훌쩍 넘었단다. 작은 마당에 아주 귀여운 우물이 있다. 어린 열사가 7년 동안 우물 주변에서 놀았을 것을 생각하며 그럴 수만 있다면 우물 속에서 열사의 모습, 열사의 영혼을 길어 올리고 싶다.

목사골능주 표지석

1987년 6월, 우리들의 꿈과 그의 혁명은 끝내 열사의 피를 보고서야 이루어졌다. 6월29일은 노태우가 항복하고 국민이 승리한 이한열의 날이다. 그날 아니 현대사의 딱 1인을 꼽으라면 6월 항쟁의 불꽃 이한열 열사다. 고교 선배인 나는 그가 얼굴에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친구에게 몸을 맡긴 채 신음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을 쳤었다.


◆힘 생기는 '팔로군 행진곡'

정율성 생가는 관영리에 있다. 중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선생은 1996년 10월 8일 부인 정설송 여사가 광주를 방문하면서 그의 음악과 삶에 대해 활발히 재조명됐다.

능주관영리 정율성 생가

아, 나팔 소리 울린다! / 혁명의 노래 드높다! / 동무들아 발을 맞춰 싸움터로 가자, / 전진! 전진!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 즉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들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능주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능주 보통학교(현 능주초등학교)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정율성은 평소 자신의 고향을 화순이라고 자주 말할 정도로 고향 능주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19살 되던 해 중국으로 건너가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의 아리랑이라고 부르는 '연안송'도 작곡하였다.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고/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 /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한 도시/ 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

'연안송'은 정식으로 출판된 적도 없으면서 1937년 중·일전쟁부터 일본이 항복 때까지 8년간의 입에서 입으로 항일 전쟁 기간 중, 중국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이 노래를 들으면 절로 영벽정 앞을 유유히 흐르는 충신강을 바라보며 혁명을 꿈꾸었을 어린 정율성 선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도 오버랩 된다.

능주130년고택

◆사당 지키는 100년 수양버들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조광조 유허비는 이한열 열사 생가 뽀짝 옆에 있다. 기묘사화 때(1519) 이곳으로 귀양살이를 한 넋을 추모하기 위해 1667년 당시 능주 목사가 세웠다.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새롭게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현량과를 설치하고 미신을 타파하는 등, 성리학에 입각한 이상 정치를 시행하려고 했던 그는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바람에 기득권 세력의 모함을 받아 이곳 남정리로 유배를 온다. 그리고 기미년 12월에 사약을 받는다. 그가 사약을 받고 마지막 남긴 시에서 그의 뜨거운 애국심을 읽을 수 있다.

능주관아터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愛君如愛父)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白日臨下土)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昭昭照丹衷)

능주수양버들

사당 옆의 100년은 훌쩍 넘었을 수양 버드나무가 지금도 나를 반겨준다. 능주는 고샅마다 알려진 이야기보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훨씬 더 많고, 어쩌면 그렇게 속삭이는 그 민중의 말에 귀가 솔깃 기울여진다.

정암 선생과 학포 양팽손의 우정과 의리는 종종 관포지교와 비교된다. 어쩌면 넓은 마음으로 친구를 이해했던 포숙이 학포라면 관중은 정암 선생은 아닐까. 그들의 삶을 어쩌면 이한열 열사도 누군가를 통해 듣고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지행일치' 개혁 세력의 줄기

130년 된 주찬향 님 고택

능주에 이런 개혁 세력이란 줄기가 있다면 그 중요한 뿌리는 주자이다. 능주는 남정리를 중심으로 능성 주(朱) 씨들이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남정리 고샅을 걷다 고색창연한 기와집이 있어 절로 발길에 끌려 들어갔다.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퇴직하여 귀향한 주찬향 씨 댁이었다. 금시초문의 나그네에게도 친절하게 집의 내력을 설명해 준다. 소작농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후한 존경을 받지 않고는 지금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집주인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주자는 지금도 능주에 있었다.

130년된 주찬향 님 고택 기둥

맑은 정신 수양을 역설한 동양의 칸트로 비유되는 주자의 주자묘가 있는 것도 자랑이다.

능주는 인헌왕후를 배출한 고향이기도 하고, 영벽정을 비롯하여 능주향교는 물론 어느 고샅이든 걸을 때마다 오래된 고향 맛이 나는 동네다.

영벽정 앞으로 충신강이 장엄하게 흐른다. 능주가 특별히 개혁적이고 의로운 인물과 관련이 많은 것은 주자의 지행일치 사상이 강처럼 굽이굽이 능주를 관통해서인지 모른다.

영벽정

능주는 이렇게 켜켜이 퇴적층처럼 삶과 역사가 쌓여가고 있다. 또 훗날 이들을 본받아 혼탁한 세상을 개혁할 인물이 바로 이곳 능주에서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은가.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toamm@hanmail.net?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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