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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비밀결사 조직··· 독립운동·역사관 확립에 기여

입력 2023.11.29. 17:17 양기생 기자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
⑩끝·무등독서회 결성을 주도한 옥대호
곽이섭 아들 곽수민(왼쪽)과 옥대호 교감

이 연재의 마지막을 옥대호(玉大鎬·1925~2008) 선생으로 삼았던 것은 그에 대한 한없는 필자의 미안함 때문이다. 필자가 대학원 졸업 후 발령받고 근무했던 학교의 교감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옥대호 선생은 필자에게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설명했다. 그가 무려 10개월 가까이 투옥생활을 했지만 미결수 상태였기 때문에 수형 기록 등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불과 2년 같이 근무하다 학교를 떠나며 선생과의 인연은 끊어졌다.

필자가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의 클라이막스를 이룬 '무등독서회'라는 비밀결사를 공부하다 그가 핵심 인물임을 알았다. 무등독서회의 존재를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광주서중학생들이 조직한 '무등회'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서당훈장으로 한약방을 한 옥치원의 5남 중 4남으로,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에서 태어났다.

옥치원이 함평에서 한약방을 운영함에 따라 소학교를 함평에서 다녔다. 대화심상소학교를 다닐 때 통솔력이 뛰어나 6년간 급장을 한 옥대호는, 성적도 1위를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서예, 미술, 글짓기, 동요, 동시 등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소학교 교지에 그의 글이 게재되기도 했다.

이렇게 똑똑한 그가 말도 어눌하고 뭔가 부자연스러웠던 것이 8개월 계속되는 고문 때문이었다.

1941년 3월 25일 대화심상소학교 6년 과정을 마친 그는 다음 달인 4월 8일, 1938년 4월 공립학교로 새로 문을 연 광주사범학교에 심상과 4회로 입학했다.

광주사범학교 학적부에 보면 그는 체련(體鍊)이 우수하다고 돼 있다. 사범학교 시절 유도부를 했다. 교련, 체육, 무도 과목에서 '우(優)', 서도(書圖) 교과는 '수(秀)' 평가를 받았다. 예체능에서 탁월한 소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사실임을 말해준다. 체력장도 상급(上級)이었다.

3학년 때와 4학년 때 학적부의 성행평가에 각각 '과묵, 음울(陰鬱), 표리가 있음'이라고 돼 있다.

3, 4학년 때는 1943년, 1944년 시기로 임시정부와 연결된 비밀 결사체 무등독서회를 결성해 조직을 강화하고 항일 운동을 펼치던 시기였다. 그가 결전의 순간을 준비하며 일체 표정을 숨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사범학교 담임 교유(敎諭)가 작성한 성행평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결전의 시기를 준비하던 독립운동가의 담담한 모습을 느끼게 한다.

그는 4학년 때 '사고로 구인됐다'라고 학적부에 나와 있다. 그가 4학년 때인 1944년 10월 무등독서회 사건으로 연행돼 구속됐다고 하는 것을 학적부는 말하고 있다. 이때 그의 사고 결석일수가 109일로 나와 있다. 3학년 때 질병 결석 1일과 비교해도 사고 결석일수와 구인이 관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는 1946년 1월 14일 졸업했다. 정상적으로 보면 1945년 3월에 해야 옳다. 그럼에도 1년 늦게 졸업한 것은 1944년 10월부터 이듬해인 1945년 8월 16일까지 투옥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제 옥대호 등이 조직한 무등독서회 결성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무안 출신인 곽이섭, 함평 출신 허종철과 함께 자취했던 그는 무안향우회를 결성해 결사의 토대를 구축하려 했다.

1941년 9월 옥대호는 무안 출신 곽이섭, 이경채, 정병광, 여기에 함평 출신인 허종철까지 포함해 광주 누문동 정병광 하숙집에 모여 '무안향우회'라는 위친계를 조직하고, 문서를 작성했다.

심상과 4회, 5회까지 뜻이 같은 동지들을 규합하기로 했다.

무안향우회원들은 서석동 42번지 안동영 학우 집에 모여 임시정부 밀명을 받고 들어온 나주 출신 김준모(당시 일본 중앙대학 재학)로부터 정보를 들었다.

옥대호 등 무안향우회원들은 이 조직을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비밀결사로 전환하기로 하고 뜻 있는 동지를 규합했다. 마침내 1942년 2월 무안향우회를 계승한 '무등독서회'가 탄생했다.

무등독서회 창립 당시에 는 옥대호를 비롯해 이경채, 안동영, 정광영, 허종철 등 무등향우회 전원과 전북 순창이 고향인 홍완표를 포함한 10명이었다. 이들은 첫 모임에서 '무등독서회'로 결정하고, 매달 2회 만나자고 결의했다. 홍완표에게 전주사범, 순천농림, 광주사범 연합조직을 편성하는 문제를 일임했다.

1942년 4월 무등독서회 2차 모임을 갖고 행동강령을 작성해 미군 상륙과 같이 행동대원 봉기토록 학도대 편성을 결의하고 "군국주의는 멸망한다. 일본은 물러간다"라는 삐라와 벽보를 명치정(현 금남로) 일대와 일본인 집 곳곳에 부착했다. 이와 동시에 곽이섭이 제작한 태극기를 나누어 가졌다.

이들은 무안 사창 일대, 이웃 몽탄, 그리고 허종철의 동네인 영흥리 일대에서 초저녁 동각 사랑방에서 연합군 승전 소식과 임시정부 정황을 소개했다. 그리고 옥대호는 그의 외가가 있는 무안 일로 도장포의 주민들에게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홍보했다.

이들은 공출 결사 반대, 징용, 징병 반대 결의 등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얻어냈다.

이 무렵 이경채, 조규학, 안동영, 노동훈 등은 학교에서 전남 경찰부 고등계 형사들에게, 홍완표 등 3명은 전북 경찰부 고등계 형사들에게 체포됐다. 죄목은 '비밀결사 결성죄', '치안유지법 위반죄'였다. 홍완표의 친형 홍완식(목포 척식회사 행원)은 목포에서 체포돼 전북 경찰부로 압송됐다.

옥대호는 전남 경찰부에서 전북 경찰부로 이송됐는데, 그곳에는 이미 체포돼 온 허종철, 곽이섭, 정병광이 고문을 받고 있었다. 1945년 3월 9일 여러 경찰서에 분산돼 조사받던 회원들이 광주경찰서로 통합 이감시켜 조사했다.

이들을 통합 수감한 이유는 광주경찰서에는 사상범만 모두 수감한다는 조치 때문이었다.

국가보훈부에는 이들 공훈 사실이 1945년 3월 투옥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자료에 근거한 것 같다. 실제는 이보다 훨씬 이른 1944년 10월이었다. 한편 패망이 다가오자 이들에 대한 총살 지령이 6월, 7월 두 차례 있었다. 물고문, 불인두 고문, 장작 곤봉, 난타 등의 고문이 이어졌다. 전 회원들이 모두 뼈다귀 유령의 몰골이 됐다.

옥대호 등은 1945년 8월 16일 오후 7시 석방되고, 1주일 동안 광주 치안 임무를 수행하고 8월 22일 귀향길에 올랐다. 옥대호는 함평 학교역까지 실려 갔고, 20리 길을 숙부 등에 엎혀 고향 사창 집에 왔다.

곽이섭 광주사범 졸업증서

1945년 9월 옥대호 등은 광주사범학교에 복학해 이듬해 1월, 5회와 함께 졸업했다.

교사 자격증을 얻었지만,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등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등 체육과에 입학해 1949년 7월 졸업했다.

9월부터 제2의 고향인 함평 학다리중 고등학교를 시작으로 목포사범학교, 목포중학교, 목포중앙여자중학교에서 1973년 8월까지 체육 교사로 전남의 중등교육 발전에 공헌했다.

1971년 교감 자격증을 취득한 옥대호는 1973년 9월부터 1991년 정년 때까지 영암도포중학교, 나주문평중학교, 무안청계중학교, 일로여자중학교 교감을 역임했다. 그는 독립운동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했다. 말도 어눌하고 부자연스러웠다.

강건했던 젊은이가 감옥에서의 혹독한 고문 때문에 평생 그 고통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갔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교사로서, 관리자로서 책임을 다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이 오롯이 전남교육의 사표로 남아 오늘날 '의향'의 전통이 살아 있는 전남교육의 등불이 됐다.

옥대호는 동료들의 공적을 밝히는 것을 비밀결사를 결성한 자신의 책무로 인식했다. 그는 앞장서 자료를 모으는 등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대통령표창(1995)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들의 왜곡된 공적 사실을 바로 잡으려고 하다가 2008년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광주교육대학교에는 1928~29년의 학생운동과 무등독서회의 항일 투쟁을 기억하는 학생독립운동탑이 우뚝 솟아 있다.

그러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는 '무등독서회'는 없고, 주역인 옥대호 선생 사진도 없다. 후손이 똑똑하면 없는 역사도 만들지만, 후손이 그러하지 못하면 있는 역사도 남의 역사가 된다.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두 눈 부릅떠야 할 때이다.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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