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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은 항일투쟁, 교육에 녹아들었다

입력 2023.11.22. 18:41 김현주 기자
⑨독립운동에 앞장선 박성래·정남균·문승수㉻
완도에 있는 백산 문승수 선생 추모비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⑨독립운동에 앞장선 박성래·정남균·문승수㉻

문승수가 재학 시절 학교 성적이 매우 뛰어난 우수 학생임에도 학생 시절 성진회 창립회원으로, 그리고 독서회 조직 등에 앞섰다는 사실은 당시 판결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는 1928년 3월 졸업하고 다음 달인 4월 사립 약산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학교에 있으면서도 광주 학생 조직의 핵심 멤버로 선, 후배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문승수의 이러한 행동을 잘 알고 있었던 박성래, 정남균 교사는 1928년 10월 경찰에 체포됐을 때 문승수 관련 내용은 철저히 함구하여 보호했다. 그가 정남균의 3년보다 무거운 3년 6월 형을 선고받은 것은 일본 경찰이 학생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문승수 선생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문승수 선생은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지면서 일제의 침략 야욕이 노골화된 1905년 1월 21일 완도군 군외면 대야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통정대부 문백수로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문양준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조부 밑에서 자랐다. 6세에 사서삼경을 외웠다고 한다. 그의 천재성을 엿보게 한다. 그는 1906년 사립육영학교로 출범한 후 1911년 공립으로 전환한 완도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5년제 광주농업학교를 1923년 4월에 입학하여 1928년 3월에 졸업했다.

그는 1923년 2월에 보통학교를 졸업했는데 1922년 한국인 보통학교 학제가 4년제에서 6년제로 전환될 때 졸업시험에 합격해 5년 만인 1923년 3월 졸업했다. 그에게 '신동(神童)'이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공부 만을 알았던 문승수가 평생을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올바름을 가르친 조부의 교육에, 완도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완도는 일제강점기 치열한 독립운동 무대였다. 완도 소안도는 독립운동의 3대 성지라고 불렸다. 김(해태)을 양식해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주민이 많아 일찍부터 광주, 일본 등지로 유학을 많이 떠났다.

이들이 신학문을 배우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눈을 떴다. 완도 출신들 유학생 대부분이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선 까닭이다.

1919년 3월 15일 완도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있었다. 보통학교 학생인 그도 시위에 앞장섰을 것이다. 다음 달인 4월 7일 완도보통학교 학생 김우진, 차종화 등 20여 명이 모여 4월 8일 시위를 하자로 계획을 세우다 발각돼 전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문승수가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데 충분했다.

그는 실력을 기르는 것이 민족 독립의 지름길이라 여기고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1923년 당시 전라도 수재들이 모였다는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했다. 농업학교 내내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5년 동안 4년 수석을 해 광주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무렵 광주에 강석봉 등이 중심이 돼 조직된 신우회라는 사회주의 운동 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를 통해 학생들의 사회변혁 의식이 강화됐다. 그가 친구 강해석의 도움으로 좌익문헌을 읽는 모임인 약진회라는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강해석은 광주·전남 지역의 혁신운동의 태두인 강석봉의 아우로 청년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강해석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문승수는 비밀 모임 '약진회'를 만들었다고 본다. 성진회 이전부터 이미 그는 항일운동조직을 결성하고 있었다.

광주의 소문난 수재가 앞장서자 그 주위에 의식있는 학생들이 모였다. 장재성과 함께 성진회 결성에 앞장섰던 것은 당연하다. 4학년 때인 1926년 11월 장재성 등과 성진회를 결성했다.

몽민운동하다 투옥된 문승수 판결문(1936)

이때의 사정이 판결문에 잘 드러나 있다.

"피고인 장재성 및 왕재일은 모두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부터 사유재산제도를 부인는 공산제 사회의 실현을 열망하고 있었는 바, 대정 15년(1926) 9월 무렵 위 2명은 사상상 공명(共鳴)하여 친교를 맺기에 이르렀고, 당시 같은 사상을 품고 있는 광주공립농업학교 5년생 박인성과 공모하여 위 고등보통학교 및 농업학교의 생도 중 같은 사상을 품고 있는 자를 규합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고, 위 피고인 왕재일의 분주(奔走)에 의해 동 피고인 장재성, 최규창, 김광용, 정우채, 임주홍, 정남균, 정동수, 문승수, 정종석, 김한필은 위의 박인성, 기타 여러 명의 사람과 함께 동년 11월 3일 무렵 광주 읍내 부동정의 최규창의 하숙집에 모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제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성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하략)"

일제가 이 조직의 결성을 눈치채자 곧 해체했다. 그리고 독서회 등 다른 형태의 비밀조직으로 탄생했다. 1927년 11월 김태호의 집에서 독서회 결성을 결의했다.

이때 "(김재룡이) 문승수의 권유로 사회과학연구원이 되었다"는 진술을 한 데서 문승수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2월 11일 광주 서방 지용수 집에 문승수, 최규창, 임종근 등이 모였는데 문승수 등이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강해석도 참석한 이날 모임에서 졸업 후에도 사회나 교직에 나가서도 철저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문승수, 임종근 등이 교사로 나가자마자 곧장 민족 교육에 앞장선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문승수는 1928년 4월 완도 조약도에 있는 사립 약산학교의 교사로 발령났다.

이곳에서 박성래, 정남균 등 선배들과 함께 민족교육을 하다가 1929년 광주 학생 시위가 발발했을 때 배후를 추적하는 경찰에 의해 문승수 존재가 드러났다. 그는 기소돼 1930년 10월 27일 징역3년 6월에 처해졌다. 미결구류일수 80일 본형에 산입됐다. 대구복심범원에서 1931년 6월 13일 징역 1년형으로 형량이 줄었다.

출옥 후 문승수는 고향에 내려와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완도는 농민운동의 중심지였다.

완도와 해남 농민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일제강점기 최대의 농민운동 단체의 하나인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했다. 문승수는 전남운동협의회 산하기관인 완도군농민조합 건설위원회 재정 책임을 맡았다.

성진회, 독서회 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부(4년형을 받은 문승수 이름도 보인다)

1933년 해남 북평면 성도암에서 공식 출범한 '전남운동협의회'는 완도 황동윤, 해남 김홍배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같은 해 8월 강진 병영 주재소 방화사건을 수사하던 일본 경찰이 전남 운동협의회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대규모 탄압이 시작됐다. 문승수는 1934년 2월 체포됐는데, 이 사건으로 완도, 영암, 강진, 해남, 완도 등지에서 558명이 검거되고 335명이 불기소, 183명이 기소유예, 10명 기소중지, 9월 7일에 51명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거의 3년 가까이 조사와 재판 끝에 1936년 12월 28일 이들에게 형이 확정됐는데 문승수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옥 후에 일제의 감시가 심해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에 집중하며 독립의 기회를 실폈다. 완도에서 가장 큰 선박 2척을 건조해 주민들이 생산한 김을 완도 수협에 납품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완도에서 생산된 화목(火木)을 배로 목포에 판매해 적지 않은 재산을 늘렸다. 축적한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 조달 및 마을 주민 구휼에 사용하였다.

꿈에도 그리던 민족해방이 왔다. 기쁨은 순간, 치열한 좌, 우 갈등, 친일과 빨갱이로 서로 공격하는 무서운 세상이 왔다. 그는 좌, 우 한편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자신이 빨갱이로 공격받고 있음을 알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그러한 사상을 가진 이들과 힘을 합하여 독립운동하다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된 적은 있으나 공산주의 체제를 그리워한 적이 없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를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승수 등 완도의 보도연맹에 속한 이들은 이유 없이 1950년 7월 17일 끌려갔다. 그리고 20일 완도 앞바다에 수장(水葬)됐다. 시신은 물론 찾지 못하였다.

부두에서 강제로 끌려간 것을 목격한 딸이 가져온 부친이 수장된 곳의 바닷물과 선산이 있는 장좌리의 흙이 대전 현충원의 유해를 대신하고 있다. 1982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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