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열악한 처우에도 학생들 민족의식 일깨웠다

입력 2023.10.11. 16:55 양기생 기자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
⑧독립운동에 앞장 선 박성래·정남균·문승수<상>
日 식민지 완성 위해 공교육 장악
민족지사가 세운 사립학교 중심
독립운동 확산·애국지사 배출도
학생들이 주도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인 성진회 기념 사진.?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⑧독립운동에 앞장 선 박성래·정남균·문승수<상>

광주 동구 학동에 있는 전남대병원 응급실 옆에 꽤 오래된 이OO내과가 있다. 이 병원 벽면에 '애국지사 문승수 선생'을 소개한 동판이 있다.

동판의 주인공은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있게 한 비밀결사 성진회를 조직하고, 졸업 후 고향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항일운동을 이끌다 투옥됐고 출옥 후에 농민, 노동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 문승수 선생이다. 동판 설명 끝에 "선생은 이상명 내과의 친외조부이심"이라고 적혀 있다.

곧 동판을 제작한 이는 병원 원장으로 문승수의 외손임을 알 수 있다. 이 동판을 볼 때마다, 친손자도 아닌 외손자의 갸륵한 효심에 울컥한다.

필자가 문승수 선생을 다루려 한 까닭은 외손의 효심도 작용했지만,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독립운동을 이끈 교사, 노·농 운동의 선구자 등 독립운동에 끼친 그의 공적, 그러나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으로 몰려 억울하게 수장(水葬)된 비참한 최후 등 그의 빛나는 삶이 곧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에는, 앞서 살핀 창평의숙처럼, 뜻있는 민족지사들이 세운 사립학교가 민족의 역량을 키우고 있었다. 이들 학교는 일제 치하에 곧 창평보통학교처럼 공립보통학교로 전환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공교육을 장악해야 식민지 교육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일제는 민족지사들이 세운 사립학교를 공립으로 서둘러 전환했다.

하지만 1920년대까지 여전히 지역의 초등교육을 사립학교들이 많이 맡았다. 일제의 차별화된 교육정책으로 학령 인구의 1/6만 학교에 다니는 실정이었다.

사립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처우는 열악했지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데 앞장섰다. 필자가 번역 정리한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학생운동'(이하 판결문)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교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립학교 교사들이었다.

판결문에 들어 있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학교 가운데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사립학교가 완도 사립약산보통학교이다. 이 학교 출신 정후균과 김경태, 정병래, 정병생, 이영식, 박천세, 곽사길, 김옥도 등이 학생운동에 앞장서다 투옥된 이들이다.

약산초등학교 연혁에 따르면, 1920년 9월15일 사설 개량서당으로 출발한 약산보통학교는 1922년 5월5일 사립약산학교로 개교한 후, 1942년 5월10일 약산공립국민학교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약산초등학교는 무려 20년 넘게 사립학교로 초등교육을 담당한 셈이다.

이 학교 출신이 학생운동에 많이 참여했다는 것은, 곧 학교에서 교사들이 민족주의 교육을 했다는 의미이다. 사립 약산학교에는 독립운동하다 투옥된 전설적인 교사들이 많았다. 오늘은 이들의 얘기를 살펴보려 한다.

완도 소안도와 고금도는 3·1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소안도는 일제강점기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더불어 우리나라 독립운동 3대 성지였다.

한 겨울임에도 소안도 사람들은 한 사람이 감옥에 갇히면 "감옥에 들어간 사람을 생각하여 이불을 덮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항쟁을 전개하였다. 현재도 태극기가 1년 365일 걸려 있는 곳으로 유명한 이 섬은 독립운동하다 투옥된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소안도가 이러한 빛나는 전통이 세워지게 된 데는 섬 주민들의 항일의지를 하나로 모았던 '수의위친계'라는 독립운동 조직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 결사의 영향으로 소안도, 고금도 등에서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처럼 완도에서 독립운동이 거셌던 까닭은 김(해태) 양식을 통해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신교육에 관심이 높았던 주민들의 높은 민족의식이 주된 배경이다. 1905년 세워진 사립육영학교(1911년 완도공립보통학교로 변경)를 시작으로 소안도에 개교한 사립 중학학원(사립 소안학교 전신), 노화도의 사립 영흥학교, 고금도의 사립 약산학교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를테면 사립 약산학교는 고금면 조약도 주민 800여 호가 매호에 곡물을 할당해 거두고 해태양식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토대로 최병준이 1917년 세운 학교였다.(학교 연혁에는 1920년 개량서당이 세워졌다고 하나 1924년 신문에는 세워진 지 7년 되었다고 함) 그러나 1924년 당시 교장이 회계 업무가 불투명하다 하여 주민들이 문제를 제기하여 물러나고 새로이 교장 신합희, 교감 박어채, 학감 김두현, 교원 박성래 등을 뽑았다. 곧 사립약산학교는 사실상 주민들이 세운 학교나 다름없다.

이때 교사로 뽑힌 박성래는 1925년 12월, '지나친 감정에 의지'라는 글에서 조선을 멸망시킨 일본의 처사에 분개하고 장차 이를 회복하기 위해 아동의 각성을 촉구하는 뜻의 문서를 작성하고, 이어 1926년 1월20일에는 '신년을 맞이하는 어린 친구에게'라는 제목의 문서를, 같은 해 2월24일에는 '고민의 서곡'이라는 제목의 산문시 같은 문서를, 그리고 3월 무렵에는 무제(無題)로 이전과 같은 문자를 나열해 조선의 현상으로써 불합리한 사회라고 논술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분기(奮起)를 촉구하는 취지의 문서 및 '아들들이여 우리나라는 이러하다.'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현상으로써 조선인의 생활 복리를 개의치 않는 잔인, 폭력적인 정치와 같다고 논평한 문서를 각각 저술해 학생 교육에 활용했다.

박성래는 이렇게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다 1928년 10월 20일 체포돼 재판에 넘겨져 금고 6월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1928년 10월 무렵에 사립 약산학교에는 박성래를 비롯해 정남균, 문승수 등 당대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이 교사로 있었다. 약산학교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정남균, 문승수 선생은 광주학생운동을 이끈 성진회의 창립회원이었다.

정남균은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이던 같은 고향 출신으로 학교 1년 후배 문승수와 1926년 11월 비밀조직 성진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곧 그 조직이 경찰에 노출돼 자진 해산되자 방학 때 고향에 내려와 "농촌의 비애와 희락"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며 농촌을 순회했다. 정남균은 1927년 3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달인 1927년 4월 약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키워줬다.

그런데 성진회 해체를 논의한 곳이 광주에 있는 정남균 하숙집이었다.

이로 미루어 정남균이 성진회 조직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남균은 약산학교에 부임한 후에도 1926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현하(現下) 조선과 총독부 경제책'이라는 제목의 소위(所爲) '산업 제1주의 또는 산미증식계획' 이라는 의논, 기타를 논평한 글을 인쇄하는 등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이 때문에 1928년 10월 20일 박성래와 함께 체포돼 재판에 넘겨져 12월 벌금 20원을 선고받았다. 정남균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고 성진회가 배후 세력으로 일본 경찰에 탐지되면서 재차 체포돼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판결문에 정남균 직업을 '면화상'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1928년 10월 체포될 때 학교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애국지사 문승수의 묘

정남균의 농업학교 1년 후배이자 같은 완도 출신 문승수가 있다.

문승수는 군외면 대야리 출신으로 완도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이 뛰어나 5년 만에 보통학교를 졸업해 마을에서는 신동으로 소문나 있었다. 광주농업학교 다닐 때 4년 동안 수석, 1년 차석을 차지하여 전체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수재였지만, 그는 현실에 영합하지 않고 민족 독립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정남균과 함께 1926년 결성된 성진회 창립 회원이었다.

그는 성진회가 위장 해체된 이후에 더욱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
연재마감

기획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