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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 기록 한 줄뿐이지만 일평생 독립운동·민족교육 헌신

입력 2023.08.23. 18:46 양기생 기자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
⑤3·1운동의 영웅 신의구
1918년 광주 숭일학교 교사 부임
이듬해 3·1운동 학생들과 참여해
보안법 위반으로 1년 넘게 옥살이
동학·의병 앞장선 집안 내력 한몫
신 선생은 1892년 12월 3일 고흥군 고흥읍(면) 등암리 1050번지에서 부친 응모와 모친 동래 정씨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인 그는, 1916년 순천매산학교를 거쳐 1918년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광주 숭일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판결문에도 있지만, 그는 역사적인 3월 10일 광주 시위의 적극 가담자의 1인이었다.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⑤3·1운동의 영웅 신의구

올해 78주년 광복절은 필자에게는 뜻깊은 날이었다. 광주시장으로부터 순국선열들의 역사를 찾고 그 선양에 끼친 공적이 있다고 해 '나라 사랑 유공자 표창'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 연구서로 발간하고, 그들의 아픈 역사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등 지역 정체성 확립에 도움을 주었다는 의미의 수상이다.

2020년 집필한 '독립운동가 의사 김범수 연구'의 주인공인 김범수 선생의 얘기가 중앙 일간지에 자세히 소개돼 경기도 양평에 거주하는 지인한테도 연락이 왔다. 언론의 위력을 실감한다.

전남도가 전국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최초이자 유일하게 추진하고 있는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및 서훈신청 용역 2단계' 사업의 책임을 지고 있는 필자는, 평생 가장 기쁘고 보람된 일이라고 여기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판결문에 드러나 있지 않은, 지역에서조차 잘 모르고 있는 독립운동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1895년 시작된 을미의병부터, 1907년부터 1909년까지의 의병 전쟁만 하더라도 110년이 훌쩍 넘었고, 3·1운동이 일어난 지도 104년이 돼 그 흔적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힘들다.

그러나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뜻밖에 자료를 찾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연히 일본에서 독립운동하다 투옥된 박진철 교장의 자서전('조국의 산하')에 나와 있는 비밀결사 및 참여 인물을 발견하고 그들의 독립운동 사례를 일본기록 등에서 찾아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박진철의 존재는 물론 자서전이 있는지도 몰랐다. 2022년 전남도교육청에서 발간한 '독립운동가 교사가 되다'라는 책을 필자가 집필했는데, 그 책에 있는 33명 주인공의 한 분인 고(故) 박진철 선생을 만나면서 그 책의 존재를 알았다.

만약 필자가 이 책을 펴내지 않았다면 책 속에 소개된 독립운동가들의 얘기는 역사에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필자가 현재 연재하는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은, 일제강점기 교직에 있으면서도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의 얘기이다.

'교사' 출신 독립운동가를 언급할 때 광주 3·1운동을 이끈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교사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광주숭일중·고등학교 총동창회는 지난 2017년 광주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내 옛 숭일학원 담장 일원에서 숭일학교 옛터 표지석 제막식 개최했다. 뉴시스

특히 숭일학교 교사로 광주 3·1운동의 기획단계부터 참여해 실행에 이르기까지 주도적 역할을 하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감형돼 1년 6월 복역한 최병준 선생과 광주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이끈 목포 출신 박애순 선생의 얘기는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최병준 선생을 도와 숭일학교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조직적으로 이끈 손익식, 강대년, 신의구 선생 등은 잘 모른다. 공훈록 외에 그를 알 길이 없어 글을 쓰는 것을 머뭇거렸다.

역사가 E.H.Carr가 말했듯이 역사는 '우연'과 '필연'의 연속이듯이 이번에 우연히 신의구 선생의 후손을 만나 이 글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필자는 최근 광복회 전남지부의 중국 답사길을 함께 했다. 연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독립운동 및 중국 정부의 소수민 정책이 해당 지역의 독립운동 사실 왜곡과 어떻게 연결되지를 설명했다. 결론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의 자긍심을 영원히 자손만대에 이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답사에서 신 선생의 손자 신천우 씨를 우연히 만났다. 너무 반가웠다. 신 선생의 행적을 추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 3·1운동 관련 판결문에다 손자가 제공한 자료 및 과거 최한영 선생이 정리한 글 등이 본고 작성에 많은 도움이 됐다.

"피고 홍순남(洪順南)·박영자(朴永子)·최경애(崔敬愛)·양태원(楊泰元)·강대년(姜大年)·신의구(申義求)는 각자 전기 운동에 참가, 시내를 휘젓고 다녔으며, 홍순남(洪順南)·박영자(朴永子)·최경애(崔敬愛)·양태원(楊泰元)은 운동 참가 여생도 중 중요 역할을 한 자로서, 참가 전에 사용할 국기를 미리 준비하고 강대년(姜大年)·신의구(申義求)는 교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도의 망동을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생도와 함께 위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광주 3·1운동에 신 선생이 학생을 이끌고 참여하는 사실을 설명하는 당시 판결문의 일부이다.

신 선생은 이때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는데, 미결기간까지 포함하면 1년1개월 넘게 복역했다.

신 선생은 1892년 12월 3일 고흥군 고흥읍(면) 등암리 1050번지에서 부친 응모와 모친 동래 정씨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인 그는, 1916년 순천매산학교를 거쳐 1918년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해 광주 숭일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판결문에도 있지만, 그는 역사적인 3월 10일 광주 시위의 적극 가담자의 1인이었다.

광주 시위는 이미 1917년 조직된 '신문잡지종람소'라는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어 불과 며칠 만에 조직적인 운동이 가능했다. 이들의 시위 계획은, 1919년 2월 5일 서울에서 내려온 경성의전 2학년 김범수 등이 당시 광주보통학교 교사이자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인 김태열과 장성 백암산 기슭에서 비밀리에 2·8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면서 구체화했다.

광주시 서구 화정동에 위치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하지만 3월 1일 서울 시위와 보조를 맞추려고 일부러 광주 시위 일시를 뒤로 늦춘 3월 6일 밤 신문잡지종람소 회원 및 광주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졸업생,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교사 등 주동 세력 10여 명이 모여 3월 10일 시위를 조직적으로 준비했다.

시위의 핵심인 동료 교사 최병준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기로 한 신의구 등 숭일학교 교사들은 시위 당일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학생시위대를 앞장서 이끌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작은 장터(옛 광주적십자병원 쪽 천변)로 달려 내려온 숭일학교 교사·학생, 수피아학교 교사·학생들은 작은 장터 아래의 큰 장터에서 시작해 작은 장터로 올라오는 시위대와 합류했다. 시위 규모는 곧 천여 명이 훨씬 넘어섰다. 광주 시내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독립만세'를 목이 아프게 외쳤다. 신 선생은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1년 넘게 투옥 생활했다.

신 선생이 시위에 적극 가담한 것은 동학과 의병에 참여해 항일운동에 앞장선 집안의 내력도 한몫했다. 고흥에는 동학농민군 봉림조련장, 도양훈련소 등 동학농민군 훈련기관이 두 곳이나 있을 정도로 농민군이 항전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대표적 지역이다. 고흥인들이 1907년 말 시작된 의병 전쟁에도 앞장섰던 것은 이러한 전통의 계승이었다. 무등일보를 통해 소개한 바 있는 고흥의병 120명을 이끌고 팔영산 능가사의 만경암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신성구 의병장도 같은 집안이다. 동학, 의병 등 뜨거운 항일의 불길을 직접 경험했기에 신 선생의 항일 의식은 일찍부터 강하게 형성됐다.

한편 1년 넘는 옥살이 하고 출옥한 그는, 노모를 모시는 장남이었지만, 가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고흥읍, 보성 조성 등지에서 야학 교사, 곡성 석곡에서는 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며 학생, 교인들에게 독립 의지를 심어주는 일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특히 그는 광주 3·1운동에 참여한 재력가 이기호, 고흥 출신 신우구·신철수 등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모금해 극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고 생전에 증언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향리에서 마을 이름을 딴 '등암학술연구소'를 개설해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을 길러줬다. 그 당시 선생으로부터 배운 제자가 기억하는 노랫말이다.

"나를 가르치고 기르시나 나는, 우리 부모 선생밖에 없도다. 난(鸞)이 포식하는 청년 자제들아! 때를 잃지 말고 배워 보렸다. 만일 이때 허송하고 보면 후회하리니 천금 같은 시간 허송하지 말고 항상 열심히 힘쓰세"

난(鸞)은 천자를 말하는 데 일본 국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군국주의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실력을 길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대전 현충원에 자리한 신의구 선생 묘역.

선생은 1974년 7월 10일 82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1990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등암리 선산에 묻힌 유해는 1994년 9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천묘(遷墓)했다.?초당대 글로벌호학기계공학과 부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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