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근대교육의 선구자 학산 윤윤기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④근대교육의 선구자 학산 윤윤기?
"마음을 다해 학문을 권장하고 부지런히 힘써 인(仁)을 베풀었다. 은혜를 입게 하고 덕을 베풀며 학교를 세워 오래도록 봄이 오다"
위대하도다. 학산(學山) 선생은 칠원의 훌륭한 집안인데 재주와 품격이 단정하고 온아했으며 학식이 고명하였다. 갑술년(1934년) 봄 학교를 건설해 홀로 계책을 다했으며 어질고 수고를 하고 나무 아래에서 교화함이 극진해 학교를 준공해 입실하니 촌음을 아꼈다. 병자년(1936) 풍우에 교실이 무너져 다음 날부터 또 나무 아래에서 교학하기를 게을리 아니했다. 정축년(1937년)에 다시 창건하니 노심 진력함이 배로 더했다. 기타 지방 출입에 각종 사업을 친절히 설명하고 지방의 개발에 한결같으니 눈으로만 보고 있을 수 없고 침묵만 할 수 없어 비석에 새겨 오래도록 전하게 하고자 한다. 1939년 5월 천포 유지 일동 세움 죽포 조득송 역.
이 글은 1939년 보성군 회천면의 회천동초등학교(현재는 폐교됨) 앞에 세워져 있는 학산 윤윤기(윤승원) 기념비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기념비는 이 학교의 모태가 된 천포간이학교를 개척하고 정착시킨 그의 공덕을 칭송한 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것이다. 원래는 한자로 쓰인 비문을 현대어로 풀어쓴 것이다.

학산 윤윤기(尹允基·承遠 1900~1950년)는 보성군 노동면 신천리에서 부친 윤병남과 모친 김삼송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첫 부임지인 장흥 안영공립보통학교 교원명부에는 1900년 7월9일 보성군 복내면 장천리 148번지 출생으로 나와 있다.
학산은 1924년 4월1일 광주에 있는 전남공립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23년 4월16일 특과 50명, 강습과 50명의 정원으로 개교했다가 1931년 폐교한 전남공립사범학교는 1938년 광주사범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다. 당시 전남공립사범학교는 특과 2~3년, 강습과 6개월~1년의 교육과정을 운영했다. 1924년 4월 입학한 학산이 1년 후인 1925년 3월30일 조선공립보통학교 훈도 임명장을 받은 것을 보면 그가 강습과를 수료했음을 알 수 있다. 학산은 1925년 3월31일부터 1934년 4월27일까지 9년 동안 장흥 안양공립보통학교에서 훈도(교사)로 재직하며 많은 학생을 길러냈다.
학산은 이들 학생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였다.
"(학교가 일본인 교장과 경찰들의 감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윤 선생님은 대놓고 수업 시간에 한글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말로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강조하셨죠.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그 두 가지가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장흥향교 전교 마상용 선생의 회고
이렇게 첫 부임지에서 민족혼을 강조했던 학산은, 1934년 4월 보성군 회천면 회천공립보통학교로 옮겼다.
그리고 1년 후인 1935년 천포리에 신설된 천포간이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간이학교는 2년제 단기과정의 초등 교육기관이다. 회천보통학교에 부임한 학산은 천포리 학생들이 교육 기회가 충분하지 않음을 알고 방과 후에 동네 아이들을 마을 제각으로 모아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학산은 간이학교를 세워 비록 2년제 과정이긴 하지만 공교육을 시키고자 했다. 그는 마을 유지들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는데, 마을 유지 임상현이 쾌척한 토지에다 그가 출연한 사재를 보태 1935년 천포간이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그는 이 학교 훈도를 자원했다. 하지만 학교 건물은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고, 이듬해 1937년 다시 건물이 세워지는 등 어려움의 연속이었으나 학산은 꿋꿋이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냈다.
이 무렵은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던 때였으나, 학산은 조선어 교육과 민족사 교육을 했다. 학산은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한글 교재 및 한글 공책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칠판에 판서하였을 뿐, 공책에 기록하는 것을 금지했다.
학산이 민족교육을 실시하자 일제는 1939년 보성북공립심상소학교(보성초등학교)로 발령을 냈다. 그러자 천포 사람들은 학산의 공적을 기억하고자 기념비를 세웠다. 맨 첫머리의 글이 바로 이 기념비에 새겨진 글이다.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이 강화되던 1940년 1월 학교에 사표를 제출한 학산은 평소 꿈꾸었던 민족교육을 위해 보성 회천면 봉강리에 양정원(養正院)이라는 학교를 설립했다.

양정원의 설립 주체를 가지고 보성의 부호이며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민족주의자 봉강 정해룡과 학산 윤윤기 사이에 논란이 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보건대, 정해룡 선생의 재정적 후원과 학산의 출연이 더해져 양정원이 세워졌음은 분명하고, 학교 운영은 학산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1940년 4월 12일 1기 입학생을 받아들인 양정원은 경제적 부담이 전혀 없는 무상교육이었다. 1947년 폐교될 때까지 2천여명의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92년 4월 제자들이 보성 양정원 터에 세운 표지석에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무상교육을 편 배움터로 자주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킨 유서 깊은 땅으로 빛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학산은 양정원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도 중국을 오가며 임시정부 외무 차장과 의정원 의원을 역임한 장건상, 조선의용대 정치부장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김성숙을 만나 독립의 방책을 논의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특히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몽양 여운형과 교류를 활발히 한 학산은, 몽양이 1944년 결성한 조선건국동맹의 호남 책임자였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 합작을 추진한 몽양의 정치노선을 따른 학산은, 오세창, 송진우, 김성수 등 330여명이 연서한 '국민대회준비취지서'에 이름을 올렸고, 보성군 인민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좌·우의 특정 이념에 갇혀 있지 않았다. 1947년에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결성한 좌우합작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통일정부 수립에 앞장서던 학산을 당시 우익들은 그를 좌익으로 몰아 공격했는데, 양정원 건물이 좌익의 소굴이라 하여 불태운 데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보성 경찰은 그의 고향 노동과 가까운 미력면 도개리 계곡에서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학산이 피살된 53년이 지난 2003년, 학살 현장인 미력면 도개리 고개에서 학산 윤윤기 선생 학살 현장 및 추모 위령제가 열려 그날의 한을 풀어 주려 했다. 학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등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이제 시작 단계라고 해야겠다. 초당대 글로벌호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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