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통제사 박탈로 패전 초래하게 한 점을 후회
이순신 진가 뒤늦게 발견하고 구국을 간곡히 부탁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의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하고 있던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이 있은 지 이틀 뒤인, 7월18일 새벽에 조선수군이 전몰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통곡한다.
조금 있다가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권율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일이 여기에 까지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오전 10시가 되어서까지 두 사람은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순신은 권율에게 “내가 해안지역으로 가서 직접 보고 듣고 한 후에 대책을 세우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권율은 매우 반가워하며 이를 승낙하였다.
이순신은 지체 없이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 등 군관 9명과 함께 길을 떠났다. 전투 상황 파악에 나선 것이다. 패전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 난국 수습책이 나올 수 있다는 판단을 한 이순신. 정말 전략가답다. 언제나 현장에 답이 있다.
이순신과 같이 대동한 군관 중에는 송대립(宋大立 1550~1597)이 있었다. 그는 고흥출신으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송희립과 함께 통제사 이순신을 모시었다.
길을 떠난 이순신은 삼가현에 이른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곧 부임한 삼가현감과 한치겸을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였다.
19일에는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이순신은 단성현(경남 산청군 단성면) 동산산성에 올라 정세를 살피었다. 20일에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는데 이순신은 단성현감을 다시 만났고,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정에 이르러 진주목사를 만났다.#그림2오른쪽#
이 날 이순신은 굴동(하동군 옥종면 문암리)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이희만은 임진왜란 때 삼부자가 군수품 조달에 힘쓴 사람이다.
7월21일에 이순신은 진주를 떠나 오후에 노량에 이르렀다. 칠천량 해전에서 살아남은 거제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명이 그에게 와서 통곡하였다. 또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배설은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참, 한심한 배설이다.
이순신은 경상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만나서 패할 당시의 정황을 물어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울부짖으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육지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원균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 하였다.
이 날 이순신은 거제 소속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와 새벽 2시까지 이야기 하였다. 그는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여 눈병을 얻었다.
7월22일 아침에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순신을 보러 왔다. 배설은 이순신에게 원균이 패하여 죽은 사실을 장황하게 말하였다. 이 날 조정은 비로소 칠천량 패전 보고를 받고 선조의 주재 하에 어전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23일에 이순신은 공문을 작성하여 송대립에게 주어 권율이 있는 원수부에 보냈다. 패전과 관련하여 수군과 백성들을 만난 동향을 보고한 것이다. 이후 이순신은 하동군 굴동에서 지내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7월27일에 이순신은 정개산성 건너편에 있는 손경례의 집(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으로 거처를 옮겨 진주목사 등과 대책을 논의하면서 6일간 머문다. 이중 7월 29일에는 정개산성 밑에서 말을 달리며 군사를 점검하여 보았는데, 한심하게도 도원수가 내어준 군사들은 모두 말도 없고 활도 없어 아무 쓸모가 없었다.
8월2일 밤에 이순신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는 꿈이었다. 이순신은 꿈에 현몽을 자주 하였다. 어머니 변씨 부인이 돌아가시었을 때도 꿈을 꾸었고, 아들 면이 죽었을 때도 심란한 꿈을 꾸었다.
8월3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은 선전관 양호로부터 교서와 유서 그리고 유지를 받는다. 그것은 선조가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7월23일에 작성된 교서의 제목은 '상중에 다시 3도통제사를 임명하는 교서(起復授職 三道統制使 敎書)'이다. 기복(起復)이란 원래 어버이의 상중에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는 것이 조선의 예법인데 이런 관례를 깨고 상중이라도 벼슬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순신이 받은 임명장의 전문을 읽어 보자.
'임금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그림1왼쪽#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득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이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다 없어졌으니, 이후 바닷가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한산도를 이미 잃어 버렸으니 왜적들이 무엇을 꺼려하겠는가.
초미의 위급함이 조석으로 닥쳐온 상황에서 지금 당장 세워야 할 대책 은 흩어져 도망간 군사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배들을 거두어 모아 급히 요해처에 튼튼한 큰 진영을 세우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망갔던 무리들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한참 덤벼들던 왜적들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위엄과 은혜와 지혜와 재능에 있어서 평소 안팎으로 존경을 받던 이가 아니고는 이런 막중한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 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1592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 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 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이제 짐은 그대를 상복 중에 기용하고 또 그대를 백의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져 주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형세를 장악하여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 번 떨치게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적들 또한 우리 편이 방비하고 있음을 듣고 감히 방자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나지 못 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 지어다.
수사 이하 모두 다 그대가 지휘하고 통제하되 만약 일에 임하여 규율을 어기는 자가 있거든 누구든 군법대로 처단하도록 하라.
그대가 나라를 위해 자기 몸을 잊고 기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남은 이미 그대의 능력을 다 시험해 보아서 알고 있는 바이니, 내 어찌 감히 많은 말을 보태겠는가.
아! 저 육항(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 장수)이 국경의 강 언덕 고을을 두 번째 맡아서 변방의 군사 임무를 완수했으며 저 왕손(명나라의 관리, 성품이 곧아 남의 모함에 빠져 귀양 갔다가 다시 풀려나 복직되었음)이 죄인의 몸으로 적을 소탕한 공로를 세웠던 것처럼, 그대는 충의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바라면서, 이에 교서를 내리노니 그렇게 알지어다.'
선조는 교서에서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물러나게 하여 수군 패전을 초래하게 한 점에 대하여 후회를 하고 있다. 이순신을 백의종군케 한 점도 유감을 표시한다. 그리고 나라를 구제하여 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한다.
교서를 읽은 이순신은 지난 날 자신을 죄주고 죽음직전까지 몰고 간 임금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조속히 수군을 재건하여 나라를 구하여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이순신은 선조가 내린 교서와 유서에 절을 한 뒤에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 바로 길을 떠났다. 이제 백의종군 길은 끝났다. 지금부터는 수군 재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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