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복원을 위해 2년간(2015~2017) 머물렀던 워싱턴 D.C의 풍광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감이었다. 미국 교환교수로 있을 때 맛보았던 정취가 살아난 듯해서다. 내가 근무하는 서울 정동의 경관 역시 워싱턴 D.C처럼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근대기를 상징하는 거리에는 옛 공사관들과 관공서, 학교와 교회 등의 붉은벽돌 건물이 군집한 가운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반면 이들 건축물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정미소나 양조장 같은 근대산업유산은 생산활동 지역과 연계되어야만 하는 특성으로 도처에 흩어져 있다. 건축재료도 목재나 함석 등으로 지어져 보존과 관리가 취약한 편이다.
8년 전 나주 남평주조장을 방문했을 때의 느낌도 그랬다. 특색도 건축미도 없는 주택들 사이에서 비록, 비는 새고 벽체는 허물어져 가고 있었어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니, 경이롭기까지 했다. 주조장의 내부는 더욱 놀라웠다. 쌀을 씻고 고두밥을 찌던 설비와 우물. 이 작업 공간을 중앙에 두고 냉각실, 국실(麴室), 발효실, 검사실과 주모사입실, 내실이 갈지(之)자로 배치돼있었다. 또 작업 공간 2층에는 널찍한 방을 두어 노동에 지친 직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했고, 동편 술 출고용 문 앞 위로는 기차 레일을 보(樑)로 덧대 그 위에 대형 함석 물통을 설치함으로써 목제 건물이 안고 있는 화재의 위험과, 가뭄에 대비코자 했다. 이를 통해 남평주조장은 온전히 주조만을 목적으로 철저히 계산되고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더해 고두밥 용 대형가마솥, 건조대와 술독, 입국 상자와 교반기, 남평주조주식회사가 선명하게 박힌 90여 년 전 금고, 배달직원을 위한 주변 약도, 1962년 막걸리 품평회에서 받은 상장, 배달 자전거와 홍보용 달력 등 5,0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은 남평주조장의 역사를 소리 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근대건축(Modern Movement)의 슬로건을 이보다 더 잘 담고 있는 건물이 또 있을까? 그래서 '기능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이념'을 가장 잘 표현하는 건물은 공사관이나 관공서보다는 남평주조장과 같은 산업유산인 것이다.
한편 남평주조장을 관리하고 있는 윤태석 씨는 얼마 전 조선이공대학교 미생물학 연구팀과 손잡고 발효실, 국실 등에서 채취한 시료로 4차에 걸친 실험 끝에 누룩곰팡이 복원에 성공했다. 이 곰팡이로 배양한 효모로 10년 전 주조 기능이 멈춘 남평주조장 전통주를 복원하고 있다. "이 곰팡이들은 영산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나주평야의 무지개, 남평 사람들의 체취가 어우러져 긴 세월 동안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남평주조장의 진정한 주인은 미생물이며 지역의 장소성이 남평의 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윤 씨가 한사코 스스로를 관리인이라고 소개한 까닭이다. 1932년 설립 당시, 건물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주조장임은 '양조장과 술문화 조사보고서'(2019)를 통해 국립민속박물관도 밝힌 바 있다. 소장자료와 옛 공문서를 통해 병합됐음이 드러나고 있는 횡산(橫山)양조장의 역사(1913년)까지 소급하면 남평주조장은 올해로 설립 112년이 되어 국내 주(양)조장 중 단연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남평주조장과 같은 근대산업유산은 근대 시기 일상을 뒷받침해준 살아있는 유산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남평주조장을 되살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며,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존과 활용 가치의 3대 조건은 '건물', '유물' 그리고 이를 보존하려는 '사람'이다. 문화유산이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특히 '사람'이 중요하다. 윤 씨의 전문성이나 의지를 볼 때, 남평주조장은 유산으로서 3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호남은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로 농업을 기반으로 영위해 왔다. 풍부한 곡물은 질 좋은 술을 만들어 냈고, 노동력에 기반한 탓에 많은 술을 소비케 했다. 그런데도 전라남도를 비롯한 호남지방에 보존가치가 있는 주조장이 단 한 곳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나주 남평주조장의 부활이 곧, 전라남도 정체성의 복원임을 인식할 때다.
김종헌 배재대 건축학과 교수·배재학당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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