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174 옛 광주적십자병원. 광주천 앞, 골목 모퉁이 낡은 건물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사적지다. 45년 전,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들이닥친 공수부대에 맞섰던 광주 시민들의 상흔이 깊게 배인 곳이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총격에 피를 흘리는 부상자들이 속출하자, 시민들은 "피가 모자란다"는 소문에 제 피를 나누려 긴 줄을 섰다. 5월 21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직후였다. 생명·나눔·연대, 대동정신의 상징으로 꼽히는 이유다.
소설과 영화에도 곧잘 등장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 속 무대가 됐던 '소년이 온다'가 대표적이다. 한강 작가는 아버지(한승원 작가)가 가져온 '5·18 사진첩'을 통해 이 병원을 처음 접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은 순간이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주인공 만섭(송광호)과 광주 택시기사인 황태술(유해진)이 처음 만난 곳이다.
이 같은 상징성·장소성을 지닌 옛 광주 적십자병원이 트라우마 치유센터로 거듭난다. 광주시는 옛 적십자병원 보존·활용 계획안을 마련하고, 19일 공청회를 열 계획이라고 10일 밝혔다. 병원은 2천393㎡ 면적에 본관(지하 1층, 지상 4층), 별관(지상 2층), 영안실(지상 1층) 등으로 이뤄져 있다. 시는 지난 2014년 폐쇄된 병원의 주요 역사적 공간을 보존하고, 트라우마 치유 실증센터도 만들 계획이다. 건물 리모델링을 통해서다. 1층은 역사성을 살렸다. ▲생명나눔 공간(헌혈센터) ▲디지털 역사관 ▲응급실·진료실 보존 공간 등이다. 2·3층은 치유공간이다. 인공지능(AI) 기반 트라우마 치유 실증센터와 함께 헌혈실·중환자실·수술실 보존 공간을 둔다. 옥상에는 정원과 휴식 공간도 마련한다. 광주시 관계자는 "그 간 5·18 단체, 시민단체, 건축 전문가, 공공건축가 등이 참여한 전담팀(TF)을 꾸려 의견을 수렴해 왔다"면서 "5·18 정신의 기억과 치유의 상징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병원은 1996년 4월 서남학원재단으로 인수됐다. 서남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됐지만, 경영 악화 등을 이유로 폐쇄됐다.
유지호기자 hwaone@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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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불덩이가···" 광양 산불에 뜬눈으로 지새운 밤
22일 오전 광양 옥곡면사무소에 마련된 산불 대피소에 주민들이 모여있다.
"커다란 불덩이가 짚 앞마당에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잔디가 다 타버렸어. 얼마나 놀랐던지… 하마터면 통나무로 된 우리 집도 잿더미가 될 뻔했다니까."국가소방동원령까지 발령됐던 광양 산불은 이틀 만에 완전히 진화됐지만, 화마가 스치고 지나간 마을에는 당시의 긴박함이 여전히 짙게 남아 있었다.22일 오전 광양 옥곡면사무소에 마련된 산불 대피소의 모습.22일 오후 찾은 광양시 옥곡면 점터마을. 전날 거센 불길이 휩쓸고 간 마을 산자락 곳곳은 타다 남은 나무와 검게 그을린 재로 뒤덮여 있었다. 붉게 치솟던 불길은 사라졌지만, 매캐한 연기 냄새는 아직도 마을 골목과 집 안 곳곳에 배어 있었다.산불이 시작된 지점 바로 앞에 살던 주민 A씨는 대피소에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밤을 보낸 뒤, 대피 명령이 해제되자마자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주택은 큰 피해를 면했지만, 정성껏 가꿔오던 밤 산과 고사리밭은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A씨는 "불난 산이 집 바로 코앞이라 조금만 더 바람이 불었으면 집까지 홀라당 탈 뻔했다"며 "눈앞에서 그렇게 큰불을 보니 손이 벌벌 떨리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집이 계속 마음에 걸려 대피소에서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피 명령이 해제되자마자 돌아와 보니 집 안 가득 연기가 차 있어 빼내느라 애를 먹었다"며 "사람이 다치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생계 수단이던 고사리밭과 밤 산이 모두 타버려 앞으로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앞서 이날 오전 옥곡면사무소 대피소에는 하룻밤을 불안 속에서 떨어야 했던 마을 주민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여성 침구실'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은 노란 천막 앞에는 대한적십자사의 응급구호세트 박스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봉사자들은 주민들을 살피며 식사를 챙기는 데 분주했다.22일 광양시 옥곡면 한 야산에서 전날부터 이어진 불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주민들은 대부분 연기와 불길 속에서 경황없이 집을 뛰쳐나오느라 옷가지나 생필품은 물론, 평소 복용하던 약조차 챙기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주민 김인옥(65)씨는 "평소처럼 운동을 하려고 밖에 나왔는데, 마을이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며 "잠시 뒤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져 집 앞마당 잔디가 순식간에 다 탔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불이 이렇게 무서운 건지 그때 처음 알았다"며 "그 상황을 말로 옮기기도 어려울 만큼 정신이 없었다. 옆집 할머니도 울고, 나도 울고… 밤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날이 밝자마자 집에 있던 강아지를 데리고 나왔다"고 말했다.박정희(77)씨도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들이 '산불이 났다'고 전화해 놀라 뛰쳐나왔다. 불덩이가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옮겨붙는 모습을 보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며 "전등도 끄지 못하고, 매일 먹는 약도 챙기지 못한 채 나왔다. 걱정이 계속돼 몸까지 안 좋아진 상태로 밤을 보냈다"고 하소연했다.22일 오전 광양시 옥곡면 한 야산에 불이 나 한때 국가소방동원령이 발령된 가운데, 현장통합지휘본부가 꾸려진 옥곡중학교 운동장에서 관계당국이 산불 진화 관련 논의를 하고 있다.대피 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건너편 마을 주민들도 안절부절못하긴 마찬가지였다.이웃들을 돕기 위해 봉사에 나선 광양동부농협 농가주부모임 회원 정현순(62)씨는 "골짜기 하나 차이로 우리 집까지 불이 번지지 않았다"며 "이장들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대피를 알리던 긴박한 장면이 아직도 또렷하다"고 말했다. 정씨는 "회오리바람이 불지 않아 면 전체로 피해가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불 냄새와 연기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상황은 우리 마을도 마찬가지였다"며 "옥곡면 사람들은 서로 다 아는 가족 같은 사이다. 내 집이 불탄 것처럼 마음이 쓰여 새벽 5시30분부터 봉사나왔다"고 말했다.22일 오후 광양시 옥곡면 점터마을 한 주민이 전날 발생한 불로 모두 타버린 집 앞 산을 가리키고 있다.이번 산불로 옥곡면과 진상면 일대 5개 마을 주민 601명이 면사무소와 마을회관, 경모정 등으로 긴급 대피했다.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산불은 전날 오후 3시2분께 광양시 옥곡면의 한 주택에서 발생한 불이 강풍을 타고 인근 야산으로 번지면서 확산됐다. 당국은 헬기 48대와 장비 421대, 인력 4천300여명을 투입해 밤샘 진화 작업을 벌인 끝에 18시간 59분 만인 이날 오전 10시30분 진화율 100%를 선언했다. 불에 탄 산림 면적은 48㏊로 추정되며, 이는 축구장(0.714㏊) 약 67개에 달하는 규모다.주불 진화 이후 당국은 잔불 정리와 뒷불 감시 체제로 전환하고, 산불조사감식반을 투입해 정확한 발생 원인과 피해 면적, 재산 피해 규모를 조사할 방침이다.김영록 전남지사는 "강풍과 야간 산불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산림청 소속 특수진화대를 비롯한 민관군의 공조와 총력 대응 덕분에 대형 산불로 번질 수 있었던 상황을 빠른 시간 안에 진화할 수 있었다"며 "갑작스러운 산불로 큰 불편과 불안을 겪은 주민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강주비기자 rkd98@mdilbo.com·광양=이승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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