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대신 흑갈색···벼깨씨무늬병에 초토화된 전남 농가

입력 2025.10.14. 17:24 강주비 기자
올여름 이상기후에 급격히 확산
드론 방제 5차례에도 ‘속수무책’
2만평 중 90% 감염…생계 막막
“하루 빨리 조사해야 보상 가능”
병에 강한 종자 보급이 근본 대책
14일 오후 화순 사평면에서 농민 강기원씨가 벼깨씨무늬병이 퍼진 자신의 논밭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다. 강주비 기자

"벼농사 지은 지 20년인데 이런 피해는 처음입니다."

벼깨씨무늬병이 전남을 덮쳤다. 수확철 황금빛으로 물들어야 할 들녘은 온통 흑갈색으로 변했다. 벼도 잎도 쓸만한 것이 거의 남지 않았다. 정부가 뒤늦게 농업재해로 인정했지만 구체적 피해 조사와 보상안은 아직 없다. 벼를 베지도, 기다리지도 못하는 농민들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다.

14일 오후 화순 사평면에서 농민 강기원씨가 벼깨씨무늬병이 퍼진 자신의 논밭에 쭈그려 앉아 갈색으로 물든 벼잎을 착잡한 표정으로 쓰다듬고 있다. 강주비 기자

14일 오후 찾은 화순 사평면의 한 벼 농가. 노랗게 익어야 할 논밭 대부분이 어두운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벼잎과 줄기는 검은깨를 뿌린 듯 흑갈색 반점으로 뒤덮여 있었고, 일부는 썩어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벼알은 텅 비거나 얼룩진 채 말라 있었다.

논 앞에 쭈그려 앉은 강기원(60)씨는 시든 벼잎을 쓰다듬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식같이 키운 벼가 다 병들어 고사 직전이니 속이 상하죠. 지금 벼를 베어봤자 수확량은 10%도 안 될 겁니다. 그나마 푸릇한 벼들도 일주일이면 병균이 다 퍼져 똑같이 썩을 거예요."

벼깨씨무늬병에 감염돼 검은 반점이 생긴 강기원씨의 논밭에 심어진 벼의 모습. 강주비 기자

강씨의 '자식 같은 벼'들이 얼룩투성이가 된 건 벼깨씨무늬병 때문이다. 잎과 줄기, 벼알에 깨씨 같은 흑갈색 반점이 생겨 알이 제대로 영글지 못하고 생산량과 품질을 떨어뜨리는 병이다.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번성하는데,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가 이어지며 피해가 전례 없이 확산됐다.

강씨는 "병균이 바람과 물을 따라 번지는데, 앞으로도 비 예보가 계속 있어 더 퍼질까 걱정된다"고 했다.

벼깨씨무늬병은 지난 8월 말부터 본격 확산했다. 강씨는 "보통 병이 돌아도 논의 5% 정도만 피해를 봤는데 이번엔 한 달 새 논 전체가 감염됐다"고 말했다. 그가 일구는 2만평 논 가운데 90%가 이미 감염된 상태다.

벼깨씨무늬병이 퍼진 화순 농민 강기원씨의 논밭. 강주비 기자

강씨는 "농협에서 드론으로 다섯 차례나 방제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약도 없는 '불치병'이라 막막하다"며 "사평면 주민 2천500명 대부분이 벼농사로 생계를 꾸리는데 거의 모두 피해를 봤다. 서로 어떤 심정인지 너무 잘 알아 위로의 말조차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강씨는 지난 3일 결국 논 600평을 갈아엎었다. 정부의 대책이 나오지 않자 절박함을 알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같은 날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과 (사)전국쌀생산자협회 광주전남본부 회원 30여명도 벼깨씨무늬병 전수조사와 농업재해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강씨는 "정부가 아무 대책을 안 내놓으니, 농민들이 직접 논을 갈아엎으며 항의한 거다. 이 벼를 수확해 1년을 먹고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정부가 이날 벼깨씨무늬병을 농업재해로 공식 인정하고 피해 벼 전량을 매입하기로 했지만, 농민들의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병이 번지는데 피해조사가 언제 이뤄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4일 오후 화순 사평면에서 농민 강기원씨가 벼깨씨무늬병이 퍼지고 있는 자신의 논밭을 가리키고 있다. 강주비 기자

강씨는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벼를 베야 멀쩡한 것이라도 건질 수 있다. 벼를 다 베고 나서 조사하러 온다면 피해 규모를 어떻게 입증하겠나"라며 "정부 조사가 오래 걸릴 것 같으면 마을 이장단을 통해서라도 하루빨리 조사를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농민들은 근본적인 대응책으로 기후 변화에 맞는 종자 개량과 보급을 요구한다. 현재 정부가 수매하는 새청무 품종은 대부분 병에 약하기 때문이다.

강씨는 "정부가 전량 매입해도 수확량이 워낙 줄어 당장 생계가 위태롭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계속 이런 피해가 반복되면 버틸 수가 없다"며 "이상고온에도 견디고 병에 강한 종자를 서둘러 개발·보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주비기자 rkd9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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