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의 한숨···마실 물까지 차별받는 세상

입력 2023.07.12. 13:36 박승환 기자
제1부 물과 불평등 ⑤가뭄에 드러난 불편한 진실
“재난은 돈 앞에 평등하지 않더라”
제한급수 문턱서 30년전 트라우마
식수난에 163일 '밤샘 물받기' 일상
부자동네는 '펑펑' 씁쓸한 빈부격차
'없는 사람들'에 더 혹독해지는 재난

2023 무등일보 특별 대기획

[제한급수 경고…재난의 양극화] 제1부 물과 불평등 ⑤가뭄에 드러난 불편한 진실

내 나이 80, 산수(傘壽)를 넘었네요. 산(傘)을 파자(破字)하면 팔(八)과 십(十)이 된다고 해서…. 보통 팔순이라 하죠. 장조(杖朝)라고도 하는데, 주나라 조정에서 여든 살이 되면 신하가 지팡이 짚는 걸 허락했다는 데서 말미암았죠. 쓰는 말에서부터 나이 먹은 티가 팍팍 나네요 ㅎㅎ. 그 만큼 경험 많고 다양한 삶의 군상을 지켜봐 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세요.

주소는 '광주 서구 천변좌로 12-16'. 임동오거리에서 서구청 방면으로 양동교를 지나 쭉 오다 보면 오른쪽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은 곳. 바로 '발산마을'이죠. 광주의 대표적 달동네를 꼽을 때 마다 제 이름이 불립니다. 6·25전쟁 이후 광주천을 따라 피란민들이 모여들면서 터를 닦았죠. 많을 땐 건물이 330여채나 됐 답니다.

1970년대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청춘들이 몰려들었어요. 광주천 건너 1㎞ 가량 떨어진 곳에 전남방직·일신방직이 있어서죠. 그 땐 24시간 3교대로 근무하던 여공들이 많았어요. 값 싼 생필품 구하기도 쉬웠죠. 걸어서 20분 거리에 양동시장이 있어요. 호남권 최대 전통시장이죠.

'휴 우∼'.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지금은 많이 늙었죠. 도로·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은 무척 열악합니다. 오죽하면 도심 속 낙후지역의 대명사가 됐겠습니까. 그 나마 23년 전 8차선 양동로가 뚫리면서 '도심내 고립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불량·노후 주택이 조밀조밀 모여 있어요. 골목길은 차량 진출·입이 곤란하답니다. 폭이 2~3m에 불과해서죠.

지금은 빈집들이 더 많아요.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떠나서죠. 그래서 허름한 주택가를 알록달록한 색칠을 한 주택과 벽화들로 꾸며 밝고 화사한 동네로 바꿔놨어요. 2016년 수립한 '도시재생 전략 계획' 덕분입니다. 레트로 바람이 불 때 마다 'SNS 핫플'로 심심찮게 소개되곤 하죠. 아 참, 여기서 나고 자란 양학선 선수를 빼 놓을 수 없어요.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체조영웅, 다 들 아시죠?

동네사람들끼리는 가족·친구 처럼 지내요. 시쳇말로 '없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있는 정, 없는 정' 쌓여서죠. 그래서 비밀이 없어요. "김씨네 막내딸이 올해 결혼한다지?" "신랑이 무려 열 살이나 많다네", "박씨가 얼마 전 일을 그만뒀대"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뒀겠어?", "최씨네 장남이 며칠 전 아들을 낳았대" "할머니가 손주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잘 됐네." 이웃집 숟가락 갯수까지 꿸 정도죠.

그래서인지, 어려운 일 일수록 잘 뭉쳐요. 제한급수 문턱까지 갔던 지난 3월 12일 아침도 마찬가지였죠. 이날 오전 6시쯤, '제한급수 위기!'라며 물 절약을 알리는 재난문자가 신경질 적으로 울려댈 때였죠. '동복댐 저수율 19.87%.' 마의 20%가 14년 만에 무너졌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쏟아지는 뉴스에, 동네 아재들이 하나 둘 서복수씨 집에 모여 들었죠. 사랑방 같은 곳이에요. 인테리어 일을 했던 복수씨는 강산이 다섯 번 변하는 동안 살아온 찐 '토박이'였습니다.

"형님! 이대로라면 또 제한급수 하겠던데요."

"지긋지긋한 코로나19 한숨 돌리나 했더니…. 쯧쯧."

속에 담아둔 말을 어렵게 꺼낸 이웃집 김씨와 박씨 얼굴엔 불안감이 스칩니다.

"왜들 그래. 새삼스럽게…"

복수씨는 무덤덤하게 내뱉었지만, 30년 전 아픔이 '트라우마'처럼 되살아 납니다.

광주의 대표적 달동네로 꼽히는 서구 천변좌로 12-16 발산마을 전경. 6·25전쟁 이후 광주천을 따라 피란민들이 모여들면서 터를 닦았으며 한때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청춘들이 몰려들기도 했으나 지금은 도심 속 낙후지역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도로·상하수도 등 기반시설과 주택들이 열악하다.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떠나면서 현재는 빈집들이 더 많다.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 1992년, 광주 격일제 제한급수

1992년 12월 중순쯤. 서울로 대학 간 복수씨의 첫째 딸이 첫 겨울방학을 맞았을 때였죠. 광주 식수원인 동복댐의 저수율이 3.7%까지 떨어졌어요 지금보다 15%p 이상 낮았으니, 완전히 말랐다고 봐야겠죠. 결국 광주 전 지역에 하루걸러 하루만 수돗물이 공급되는 격일제 제한급수가 시작됐어요. 방학이라 집으로 내려온다는 딸을 극구 말리던 복수씨의 모습이 아직도 선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요. 더구나 낯선 객지에서 고생하는 딸 인데…. 복수씨는 하나 뿐인 딸이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그런 재난 상황을 경험하게 하기 싫었던 거예요. 그래서 보고 싶은 마음도 한 켠에 묻어둬야만 했죠.

광주에선 92년 12월 21일부터 이듬해 6월 1일까지, 163일간 제한급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광주시내 전역과 전남도 일부지역에 제한급수가 시작됐다. 광주시는 21일부터 광주천과 용봉천을 경계로 동서로 나누고 광산구는 정수장 입구를 경계로, 남북으로 나누어 홀수일에는 동구 전역과 북구 전 지역(동운동 본촌동을 제외) 주민 12만 가구와 광산구 남쪽 송정동 도산동 주민 7천8백가구, 나머지 지역은 짝수일에 수돗물을 공급키로 했다.'('광주 전지역에 급수제한'이 실시된다는 내용의 당시 신문 기사 중 일부.)

그 때 그 고통은 상상도 못해요. 지금이야 집집마다 수도가 있죠. 그 때만 해도 마을 중턱에 17가구 전체가 사용하는 공동수도 하나가 전부였어요. 하루에 12시간, 그중에서도 저녁 시간대에만 물이 공급됐죠. 복수씨는 물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물을 받느라 밤 잠을 설치기 일쑤였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낮엔 돈을 벌어야만 했으니까요.

좁은 골목길은 항상 사람들로 빽빽했습니다. 소방차가 못 들어오니 물 나오는 시간이 되면 공동수도 앞에 양동이를 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밀려들면서죠. 각 가정마다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물 받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복수씨는 50만~6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죠. 딸아이 대학 등록금도 전부 대출을 받은 상황이라 고된 일도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 "약수터마다 장사진" "생수값, 석유 2배"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어느 날이었죠. 하루는 복수씨가 반상회에서 아이디어를 하나 냈어요. "물탱크를 설치해 지하수를 끌어올리자." 뭐라도 해야 된다는 강박이 심할 때였어요. 배수관에서 녹물이 섞여 나오면서였죠. 급수와 단수가 반복되면서 관에 녹이 꼈던 거죠. 녹물은 끓여 먹는 것 조차 불가능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힘을 보탰습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광주·전남지역엔 식수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신문 보도를 좀 살펴보죠.

'갑작스런 격일제 급수 소식에 밤새 수돗물을 받아 두느라 밤잠을 설쳤다' '시민들은 시내 음수대 및 약수터를 찾아 식수를 구하기 위해 장사진을 이뤘다' '여관·음식점·공중목욕탕 등 물 사용이 많은 접객업소들은 영업시간을 단축하는 등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생수가 석유보다 2배 이상 비싼 가격에 거래돼 소비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등등.

시도는 성공적이었요. 우선 동네 꼭대기에 물탱크를 설치했죠. 1만t 규모였는데, 주민들 하루치 사용량이었어요. 쓰면 다음날 또 물을 받는 식으로 해서 호스를 가정 마다 연결했죠. 24시간 내내 지하수를 쓸 수 있다는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낮에도 물이 나온다는 게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요.

복수씨는 광주시청에서 소독약을 얻어와 물탱크 안에 덩어리째 넣었어요. 위생을 위해서였죠. 다행히 탈이 난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광주 전 지역이 가뭄 상황이다 보니 지하수 양이 한정적이었죠. 결국 한 방울의 물이라도 아끼기 위한 절약 정신이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 "부촌에선 물 콸콸 … 얼마나 아깝던지"

'빈부격차'의 현실도 경험했다고 해요. 잘 사느냐, 못 사느냐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물의 양이 달랐기 때문이죠. 돈 있는 사람들에겐 제한급수가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졌을 거라는 거죠. "광주에선 동명동이 부자들이 사는 동네죠. 그 때 동명동으로 일을 나가 보면 설거지를 하더라도 물을 콸콸 틀어놓고 하는 등 아끼는 게 없었어요. 그 때 씽크대로 흘러내리던 그 물이 얼마나 아깝던지…." 광주가 다 같이 겪는 물 부족이었지만, 사실은 아닌 거죠. 거짓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복수씨를 포함해 마을 사람들의 화장실 변기에는 지금도 물이 가득 담긴 페트병이 있습니다.

"형님! 예나 지금이나 돈 있는 사람들은 다시 찾아온 물 부족에 아무런 감흥도 없겠죠?"

"농담이 아니라 물을 한 방울이라도 아끼기는커녕 돈 주고 살 게 뻔해요."

이어진 김씨와 박씨의 말에 복수씨는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만약 제한급수가 시행된다면 92년 상황과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없는 사람들'만 힘든 법이죠. '재난은 돈 앞에서 평등하지 않더라'는 건, 30년 전 복수씨가 생생하게 경험한 제한급수의 교훈인 셈입니다.

박승환기자 psh0904@mdilbo.com


이 기획기사는 서사적 글쓰기인 '내러티브 저널리즘(narrative journalism)'을 활용했습니다. 지난해 10월부터 제한급수 위기에 가슴 졸이며 생활했던 경험 등을 현장감 있게 전달해 보자는 취지에서입니다. 관찰자로서 기자 자신이 직접 일하면서 보고 느낀 감정과 인간관계 등을 단순 사실 전달식 기사 형태에서 벗어나 소설처럼 이야기하듯 구성했습니다. 물 부족이 현실화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위험 등을 독자 여러분들께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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