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동곡~평동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⑨동곡~평동
'갈매기의 맹약은 해가 져도 식지 않아/ 돌을 깎아 흐르는 물가에 굽은 난간을 내었네/ 산은 형세를 따라 그림자 높거나 낮고/ 물고기 무리지어 노는 여울은 옅고도 깊네'
흐르는 물가 굽은 난간에 서서 산과 강을 바라보고 있다. 높고 낮은 산 그림자와 얕고 깊은 여울이 좋은 댓구를 이룬다. 높은 산은 그림자가 길고 낮은 봉은 그림자가 짧은 것이지만, 오래오래 거기 서 있으면 낮에는 산 그림자가 짧고, 저물녘에는 길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여름에는 산 그림자가 작고 겨울에는 산 그림자가 크다는 것을 안다. 여울은 바닥이 솟은 곳에서는 얕고, 바닥이 내려앉은 곳에서는 깊은 것이나 산 그림자가 짧게 드리울 때는 여울이 얕아 보이고,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때는 깊어 보이는 법. 그 산과 강을 나는 갈매기의 굳은 약속은 무엇일까? 낮이나 밤이나, 늘 거기 서 있는 나에게 끼룩끼룩하며 찾아와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 굽은 난간이 호가정(浩歌亭)이다. 북동에서 흘러드는 극락강과 북서에서 내려오는 황룡강이 두물머리에서 만나 이름을 바꾼 영산강, 천지가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는 듯 탁 트인 들판에 젖줄이 되어 흐르는 그 강, 호가정은 영산을 굽어보며 노평산 중턱에 서 있다. 앞 시는 조선 중기 문신 설강(雪江) 류사(柳泗, 1502~1571)가 만년에 이 정자를 지으면서 쓴 것이다. 1558년(명종13) 처음 세웠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와중에 소실돼 고종 때 재건했다. '호가(浩歌)'는 '큰 소리로 부르는 노래'이다. 소강절(邵康節)의 '호가지의(浩歌之意)'에서 따왔다. '몸은 천지의 뒤에 났지만 마음은 천지에 앞서 있으니/ 이 천하의 모든 일을 스스로 모르는 것이 없으리라/ 천지가 나로부터 왔으니 그 밖의 것은 말해 무엇하리' 소강절은 문집 '자여음(自餘吟)'을 남긴 송대의 은둔 철학자다.
그는 산언덕에 오두막을 짓고 해질녘에 술 세 동이를 마신 뒤에 시를 짓고 큰 소리로 노래했다 한다. '천지가 나로부터 왔다'는 저 일성은 얼마나 깊고 호방한가! 설강은 소강절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27세 문과에 급제해 출세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를 거쳐 전라도사 종성부사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16세기가 학문으로는 성리학의 유토피아를 꽃피웠지만 갑자, 기묘, 을사의 3대 사화가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는 그 진흙탕 속에서 살다가 벼슬을 버리고 귀향해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했다. 뒤에 조정에서 도승지와 영해도호부사의 직책을 맡겼으나 칭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호가정은 정면 측면이 각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재건하면서 원래 있던 거실을 없애고 전부 우물마루로 고쳤다. 현판은 설강이 직접 썼고, 기정진의 중건기와 이안눌, 김성원의 편액이 걸려 있다. 설강은 퇴계와 같은 해에 태어나 서로 교유가 깊었으며 71년을 살고 또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 둘은 묘하게도 생몰연대가 같다.
담양 식영정, 완도 세연정, 곡성 함허정, 나주 영모정, 영암 회사정, 장흥 부춘정, 화순 물염정과 더불어 호남 8대 정자 중 하나로 꼽힌다. 환벽당 주인 김성원의 장인이자 정철의 스승인 설강은 후학을 기르고 문신들과 교유하다가 생을 마쳤다. '설강유고집'과 '위친필봉제축유서'를 남겼다.
'시원한 돌베개에 솔 그늘 더욱 짙고/ 바람은 난간을 돌아 들 빛이 뚜렷하네/ 차가운 강물 위의 밝은 달빛아래/ 눈을 실은 작은 배가 한가로이 돌아온다/ 아래는 구강이요 위로는 하늘인데/ 늙은이 할 일 없어 세속에 내맡겼네/ 바빴던 지난 일 생각해 무엇하리/ 늦 사귄 물새가 한가로이 졸고 있네' 시문이 뛰어났던 설강, 호가정 앞 그의 시비에 이 시의 한 대목이 새겨져 있다.
광산 동곡은 본래 광주군 지역으로 동각(東角)면과 마곡(馬谷)면이 있었는데 1914년 둘이 합쳐지면서 '동곡(東谷)'이 됐다. 나주 노안과 붙은 광산의 남쪽 끝이다.
비옥한 평야지대여서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곡식 외에 원예작물로 애호박과 돌미나리가 유명하다. '동곡 태극애호박'은 유해물질을 차단한 봉지 속에 키우는데 크기가 균일하고 조직이 단단하다. 다른 애호박보다 당도가 높고 비린 맛이 없어서 그냥도 먹기도 한다. 된장찌개나 호박전을 부치면 일품이다. 농산물 전시회에서 큰 상을 휩쓸어 전국적으로 인기 높다. '동곡 돌미나리'는 청정지역에서 친환경 재배해 향이 강하고 속이 꽉 차 미식가들이 좋아한다. 돌미나리는 지하수로 씻어 출하하는데 체내 독소를 없애고 혈압을 낮추는 효능이 뛰어난 덕분에 타지역보다 더 좋은 값을 받는다고 한다.
또 하나 동곡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꽃게장 백반'이다. 1952년 이곳 면소재지 중앙식당 등 두 곳에서 농번기 점심시간에 팔기 시작한 것이 원조다. 간장꽃게와 양념꽃게를 전통방식으로 담아 내놓는데 돼지볶음 홍어찜 죽순무침 굴 젓갈 등 푸짐한 찬을 곁들여 식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이 꽃게장 거리 일대가 동곡에서 제일 큰 침산(砧山)마을이다. '방치매'와 '방치매배' 두 마을이 합쳐진 이 마을은 모양이 방아 같다 해 '다듬잇돌 침(砧)'자를 썼다.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의 격전지였다. 1894년 10월 손화중이 이끄는 농민군과 민종렬이 이끄는 나주 수성군이 수차례 격돌해 결국 농민군이 절멸하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동학군은 나주를 거점으로 전열을 재정비하려 했지만 이 전투에서 지고,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함으로써 혁명은 이듬해 1월 막을 내리게 된다.
복룡산 아래 너른 들판이 펼쳐진 곳이 평동이다. 들 사이로 평동천이 흘러 토질이 비옥한 곡창지대다. 긴 세월 쌀보리 농사를 지어왔다. 곳곳의 시설하우스에서 방울토마토, 가지, 수박 등 때보다 이른 원예작물을 출하한다. 토마토는 껍질이 얇고 당도가 높고, 여름 한 철 나오는 차돌복숭아도 단단하면서 달고 병해충에 강해 효자상품이다. 평동의 중심부에 일제강점기 주재소 보통학교 수리조합이 있던 옥동마을이 있다.
이곳은 '본래 백제의 복룡현(伏龍縣)인데, 신라 때 용산(龍山)으로 고쳐 무주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때 옛 이름을 복구해 나주에 예속하였고,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는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백제시대 옥(獄)이 있어 '옥밭거리'라고 불렸고, 고려 때 지은 사층석탑이 남아있어 '탑동마을'로도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옥동(玉洞)마을이 됐다. 평동 저수지 상류의 명화마을은 고려말 이충렬 공이 목화씨앗을 가지고 내려와 첫 재배를 하고, 방직법을 전수해 목화 주산지가 된 곳이다. 한여름에 눈이 내린 것처럼 목화꽃이 만발해 '명화(明花)'마을이라 했다. 뒤편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문화유산 '명화동장고분'이 있다.
장록동은 굽이 도는 황룡강변의 퇴적지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조선 초기 장록과 송촌 사이에 원(院)이 있었다. 원은 공무를 위해 지방에 파견한 관리나 상인을 위해 숙박과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여관으로 역(驛) 근처에 있다. 마을에 사장(射場)이 있어 활터로 알려졌고,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내는 3백년 넘은 느티나무가 유명하다. 배로 장록-송정을 오가는 나루터가 있었고, 거기에 목조다리가 생겼다가 60년대 뽕뽕다리가 되었다가 70년대 시멘트 다리가 되어 지금에 이른다.
황룡강이 호남대학 앞에서 두물머리 전까지 흐르는 너른 퇴적지대가 '장록습지'다. 2020년 도심습지로는 유일하게 국가지정 보호습지로 지정된 '황룡강 장록습지'다. 서울 여의도 면적과 비슷한 2.7㎢다.
국립습지센터가 2018년 조사한 결과 생물종 829종이 서식하며, 멸종위기종 1급인 천연기념물 수달과 2급인 삵·새호리기·흰목물떼새 등이 발견됐다.
농촌지역이었던 평동에 161만평의 대규모 산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93년. 1차 2차에 걸쳐 20년 넘게 평동의 옥동(옥연 포함) 용동 송촌동 지죽동(영천 포함) 장록동 인근에 산단이 조성되면서 농업은 공업으로 바뀌고 이 일대는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됐다.
이광이 객원기자
- 500년을 넘어, 왜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몰려들까? 월봉서원은 광산구 임곡동, 이름도 정겨운 '너브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광곡(廣谷)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너브실'이다. 마을 동구 밖에는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노송숲이 있고, 그 숲 사이에 조그마한 모정이 있어 어릴적 고향에 돌아온 듯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너브실의 배산이 되는 백우산 자락에 우거진 소나무 숲을 뒤로하고 아늑하게 들어앉은 월봉서원으로 고봉 기대승 (高峰 奇大升)선생을 찾아간다. 은행나무는 샛노랗게 물이 들었고, 지나가는 답사객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비'를 맞으며 돌담길을 걷는다.그림=정암 김집중[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⑫끝·임곡 월봉서원달이 떠서 걷기에 좋은 밤, 깊어가는 가을밤. 마을을 지나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들어간다. 멀리서 누런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골목 끝에 이르자 앞이 탁 트이고 가로로 늘어선 맞배지붕의 옛 재실(齋室) 같은 학당이 있다. 달빛 가득한 마당에는 풀숲 사이로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댓돌 위에 가지런한 신발들, 그리고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들려온다.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학창의 같은 한복을 입은 한 사람 좌정하고, 그 앞에 장삼이사,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여럿이 모여 앉아 큰 소리로 글을 읽고 있다. '책을 읽으며 옛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거듭거듭 읽어 깊은 뜻에 도달해야 하네/ 보고 얻음이 마음에 와 몸에 새겨져야/ 말에 떨어지지 않고 뜻에 이를 수 있네' 고봉 시 '독서(讀書)' 첫눈이 내릴 즈음의 늦가을 저녁, 월봉서원의 풍경이다. 이 서원의 모습은 16세기인가, 21세기인가?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본다.그 전에도 단성의 도천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등이 있었다. 그런데 백운동 이전에는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祠堂) 역할에 그쳤다. 백운동서원은 고려 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그의 유배지에 세워졌다.마을이름을 따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다가,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명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향의 공간이면서 선비의 자제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공간을 겸해 '최초'라는 이름을 얻었다.소수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墓)'의 구조다. 앞에 학당이 있고 뒤에 사당이 자리한다. 향교에 가면 앞에 명륜당, 뒤에 대성전이 있는 것과 같다.지세와 풍향에 따라 전묘후학이나 좌학우묘의 다른 배치도 있지만 대체로 전학후묘 구조다. 요즘으로 치면 향교는 국립이고 서원은 사립대학이다. 15세기 후반 평민이 군역을 피해 향교로 몰려들었다. 사족들은 이를 꺼려했고, 이 때문에 관학은 후퇴하기 시작했다.조정은 사액서원에 땅과 노비를 하사했고, 면세 면역의 특혜까지 베풀며 장려했다. 오늘날 공교육을 보완하는 많은 사립학교들이 국비지원금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서원은 우후죽순 늘어났다. 관직에서 은퇴한 유학자, 사화를 피해 낙향한 선비, 재야의 양반계급들이 향촌에 서원을 세웠으며 그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다. 선학배향과 후학양성의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에 군역과 조세의 도피처로 악용되는 폐해도 컸다.186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에 따라 서원은 철퇴를 맞는다. 대원군은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했다. 이듬해 만동묘 폐쇄를 시작으로 전국의 서원 사우 1천여 곳이 헐리고 남은 것은 47개소뿐이었다.너브실 돌담길현재 전국에 향교는 234개소, 서원은 약 700여 개소가 있다. 그동안 문중들이 재건하거나, 정부와 지자체 등의 지원으로 복원·복설을 거쳐 많은 서원 향교들이 새로운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서원의 경우 강학기능은 쇠퇴하고 제향기능만 강화된 채 쇠락하여 여전히 박제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드웨어는 복원하였으되 그것을 받쳐줄 소프트웨어는 빈약하니 대중은 찾지 않고 문중, 그들만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고봉 기대승(1527~1572), 광주 출신으로 16세기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다. 자는 명언, 호는 고봉, 관향은 행주다. 고봉은 학행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600여 수의 시를 남긴 감성 짙은 문학가이자 '사칠논변'에서 보여주듯 조선 성리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철학자이며, 중앙정계에 나아가 절의와 도의에 적합한 직론·직강을 펼쳤던 곧은 정치가였다.1578년 향촌의 사림들이 고봉의 학덕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낙암에 '망천사'를 건립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소실돼 산월동 동천 위로 이건했고, 1654년 효종의 사액을 받아 '월봉서원'이 건립된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1938년 빙월당 중건에 이어 고봉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덕사와 내삼문, 장판각을 증설했다. 1991년 동재와 서재, 외삼문을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지금 월봉서원은 문화유산의 활용 측면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다. 광산구는 2017년 전담팀을 구성하고, 퇴계의 도산서원에 필적할 수 있는 고봉의 월봉서원을 만들기 위해 많은 예산과 노력을 쏟아부었다.'선비의 하루, 꼬마철학자 상상학교, 살롱 드 월봉, 월봉로맨스, 조선 브로맨스…' 월봉서원 프로그램은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시민들, 즉 수요자의 요구와 눈높이에 맞춰 구성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많은 시민들의 발길을 서원으로 향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마을주민과 함께하는 '월봉유랑' 축제, 중장년층 대상의 '기세등등 여유', '서원아카데미' 등이 대표적인 월봉서원의 브랜드들이다.그 결과 문화재청의 평가에서 '명예의 전당상'을 수상했고,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비밀의 서원, 월봉'으로 지역문화브랜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문화재와 마을, 문화재와 학교, 문화재와 문화재를 연계해 월봉에서 무양으로, 월봉에서 필암으로, 월봉에서 도산으로 서원을 연결하고, 외국 서원과의 교류도 추진하고 있다. 또 영역을 넓혀 용아생가, 김봉호가옥, 장덕동 근대한옥, 풍영정, 호가정 등 광산구의 옛 다락집과 누정을 접목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문화유산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월봉서원 전경이 '월봉서원 르네상스' 사업은 지난해 고봉 기대승 서세(逝世) 450주년을 계기로 그의 생애와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영역까지 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대중강연과 심포지엄 등이 열리면서 핵심으로 다뤄진 내용은 조선 철학사상사의 백미를 장식한 '퇴고논쟁(退高論爭)'.조선 중기 사상계의 큰 별 이황과 26살 연하인 기대승의 장장 8년에 걸친 철학토론, '세기의 편지'라 불리는 퇴고논쟁이다.먼저 퇴계의 주장. '사단의 발은 순정한 이(純理)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이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기이원론이다.이어지는 고봉의 반론. '대체로 이는 기의 주재(主宰)이고 기는 이의 재료입니다.이 둘은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로 존재할 때는 진실로 혼합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단과 칠정은 애초부터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일원론이다. 두 논쟁은 '이기(理氣)는 섞일 수 없다(퇴계)'와 '이기(理氣)는 분리할 수 없다(고봉)'로 요약된다.논리를 비약하면, 퇴고논쟁은 이 세상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한 사람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퇴계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은 다른 것이라 선인과 악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고, 고봉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이 다르지 않으므로 선인과 악인을 나눌 수 없게 된다. 고봉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면 미워할 악인이 없게 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의 뿌리 같다. 더 나가면 사형제도의 찬반 같은 의제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이념의 논쟁에 닿을 듯하다.우리는 고봉의 사유 속에서 비로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똘레랑스와 연대(連帶)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길의 시작이 공동체 정신이고, 그 길의 목적지는 '함께 사는 세상'일 것이다.다시 비약하자면, 고봉의 사유 속에서 '동아시아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저 어등산을 무대로 일어났던 16세기 의병들, 갑오년의 동학, 구한말의 창의군들,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80년 5월까지 도도하게 흐르는 전라도, 광주정신의 단초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늦가을 월봉서원의 학당에서 500년의 시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있다. 21세기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바둑의 다음 수를, 논문의 구성을, 선악의 문제를 AI가 가르쳐주는 이러한 시대에, 저 이끼 낀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16세기 고봉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것은 그저 어느 강학소의 풍경 같지만, 서원에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이어지고, 우리의 문화유산이 빗장을 열고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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