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도산동 임방울 생가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⑤도산동 임방울 생가
이 대회 마지막으로 출연할 명창은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리에서 온 임방울씨입니다! 불러줄 대목은 춘향가 중의 더늠 쑥대머리 입니다.'…그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심호흡을 했다. 고수가 거연하게 저리리 덩더둥 하고 마중 박을 울렸다. 그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가 "쑥대머리 구신헨용~'하고 첫 소리를 뺐다. 웅혼한 남성적인 통성이 천구성으로 이어졌다. 고수는 제꺼덕 중모리 박으로 받쳐주었다.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우리 정 정별 후에…" 먹구름 속에서 찬란하게 뻗어 나오는 햇빛 같은 소리였다.…슬픈 수리성은…하늘을 휘감는 알 수 없는 무지개 색깔의 신들린 신화 같은 광휘를 그려내고 있었다.
임방울의 한 생을 그린 한승원의 소설 '사랑아 피를 토하라'에 나오는 대목이다. 스물다섯(1929)에 조선명창연주회에서 '쑥대머리'를 불러 일약 명창의 반열에 오르는 장면이다.
"내가 만일, 님을 못 보고 옥중고혼이 되거드면 무덤 앞에 섰는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이요, 무덤 근처에 섰는 나무는 상사목이 될 것이라…", 소리를 끝냈을 때 관중은 박수를 치면서 발을 구르고 환호성을 질렀다. "네가 일등 먹어버렸다" "니가 장원이다!" "앙콜!" "한 번 더 해라" 관중의 환호성으로 극장 바닥이 꺼지고 천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소설은 그가 명창대회 최초로 재청을 받아 호남가를 부르고, 삼청을 받아 수궁가 중 토끼 화상 그리는 대목을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은 광산 송정읍(지금의 도산동)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국창이다. 본명은 승근이고 목소리가 고와 예명이 방울이다. 아버지는 가객은 아니었지만 소리판에서 칭찬받을 정도는 됐다고 한다. 모계가 세습 무업(巫業)을 했던 단골(丹骨)로 알려져 있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어머니 나주댁은 굿을 하러 다니기도 했다. 태(胎)에 깃든 예인의 기질은 거기서 내려온다. 흔히 '당골네'라고 하는 단골은 제정일치 시대 단군(檀君)의 '단'이 말의 뿌리이다. 그것이 '단월(檀越)'이 됐다가 단골(丹骨)로 와전됐다고 해석들을 하지만, 그 '붉은 뼈'처럼 제사장이며 예인이라는 '초인(超人)'의 근본을 잘 설명하는 말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근대 5명창' 김창환이 나주댁의 오라비이자 임방울의 외숙이다. 근대 5명창은 고종 후기~1930년대까지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세 사람 외에 두 사람이 바뀌어 기록되기도 하는데 늘 김창환이 맨 앞자리에 있다. 서편제 명창 이날치와 동편제 명창 박기홍이 그의 이종형제들이다. 김창환의 두 아들, 봉이·봉학, 생질 임방울로 이어지고, 임방울 누이의 딸인 명창 박화선으로 내려온다. '이조 고순(高純) 양대 간에 재(在)하여 이날치 후로 서파(西派) 법통을 독봉하다시피 일세를 진동한 명창이다. 잘난 풍채로 우왕좌래(右往左來) 일거수 일투족이 모다 미묘치 아니한 것이 없다.
미인의 일빈일소(一嚬一笑)가 사람의 정신을 황홀케 함과 흡사해 창과 극이 마조떠러지는 데는 감탄을 발치 아니할 수 없다.' '조선창극사'에 나온 김창환에게 바치는 헌사다.
그는 어릴 적 이종형 이날치로부터 가문의 소리를 익힌 뒤에 1902년 고종 즉위(御極) 40주년 칭경예식을 위한 협률사(協律社)의 주석으로 발탁돼 당대 최고의 국창으로 인정받는다. 소리는 서편제이나 장중하고 폭이 넓은 계면조의 성음으로 지금의 창법과 달리 고졸한 멋을 풍겼다고 한다. 발림은 '많이 꾸미지 않아도 신명이 나며, 익살스러우면서도 되바라지지 않고, 가벼운 몸짓에도 무거운 맛이 있고, 손 하나를 들어도 깊은 멋이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임방울은 외숙의 도움으로 서울 명창대회에서 '춘향가' 옥중가의 한 대목 '쑥대머리'를 부르면서 강렬한 데뷔를 하고는 탄탄대로를 걷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로소 그날부터 출세가 되어 박람회를 마친 뒤 콜롬비아 레코드에 1년간을 취입하고, 다음에 '삑터'에 2년을 종사하고, 그 다음 'OK 레코드'의 전속으로 8·15 해방의 날까지 계속하였다. 그 삼 회사에서 '쑥대머리' '호남가'를 120만장 이상을 각시 회사에서 팔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외사촌형 김봉이, 김봉학 씨는 조선명창이었는데, 나는 그 유전성으로 흘러내려 자연히 창계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임방울, 나와 창극, '조선일보' 1956.5.28)
그의 사랑은 짧고 쓸쓸했다. 동갑내기 김산호주, 소년이 머슴 살던 주인집 딸이었다. 그녀는 부잣집에 시집갔다가 홀로 되어 광주에 요릿집을 차렸다. 어른이 되어 둘은 그 집, 송학원에서 다시 만났다. 둘은 이태 동안 동백꽃처럼 붉게 타올랐으되, 사랑하는 동안 명창의 목은 시나브로 사그라들고 말았으니. 임방울은 정신을 차리고 홀로 떠나 지리산 쌍계사 토굴로 들어간다. 독공(獨功)과 득음(得音)을 위해. 독공은 살불살조(殺佛殺祖) 같은 것이다. 스승에게 소리를 배운 뒤에 독창적인 자기 소리를 찾아 산중에서 홀로 공부하는 것,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스스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과정이다. 그렇게 얻는 것이 득음이다. 그가 백척간두에 홀로 서서 절절하게 소리치며 진정한 자기를 찾아갈 때, 여인은 그를 찾아 온 지리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쌀랑쌀랑 싸락눈이 내리던 겨울날에 그녀는 동백꽃 모가지 떨어지듯 저 세상으로 갔다. 그때 임방울이 자작해 즉흥적으로 부른 것이 그 유명한 '추억'이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럈던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 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진양조의 마디마디마다, 계면조의 굽이굽이마다, 가슴 저미는 통한으로 가득한 단가. 뒤에 '망처(亡妻)를 생각함'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단가는 1930년 음반회사에서 발매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일세를 풍미한 가락이다.

식민과 해방, 그리고 전쟁, 임방울이 가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때는 민족사적으로, 판소리사적으로 어둡고 쓰라린 시기였다.
그는 그 힘든 세월을 살아온 민족의 한과 정서를 온몸으로 토해냈고, 핍박 받는 민중과 함께했다. 애절함을 자아내는 그의 창법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슬픈 정서를 어루만져 주었다.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춘향가의 '쑥대머리', 수궁가의 '토끼와 자라' 대목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1956년 '수궁가' 완창에 이어 이듬해 '적벽가'를 완창했다. 1960년 봄, 부산공연. 더늠 '쑥대머리'를 부르다가 심청가 중 '심청이 선인들에게 팔려가던 대목'으로 바꾸어 부르다가, 이번에는 춘향가 한 대목을 뽑아내더니, 다시 수궁가로 옮겨가 이것저것이 뒤섞여 버렸다.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갑자기 얼굴에 핏기가 가시면서 그는 무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목구멍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해 가을,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기어이 김제공연에 나섰다. 그는 입버릇처럼 소리 하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김제 장터에서 소리를 하다가 다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이듬해 3월 그는 영면에 들었다. 향년 57세.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하여 벼슬을 받은 적도 없고,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보유자의 예우를 받지도 못했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국창이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들어보자.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년의 가난이야. 복이라 허는 것이 어이하면 잘 타는고. …(세상에 나서) 불의행사 헌 일 없이 밤낮으로 벌었어도… 삼순구식(三旬九食)을 헐 수 없고, 일년 사절 헌 옷이라, 가장은 부황나고, 자식들은 아사지경이 되니, 내가 차라리 재결(自決)허여 이런 꼴을 안 보고자, 초매끈을 부여잡고 목을 매어 죽기를 작정하니….
나라는 망하고 천지가 암울했던 시대, 30일 동안 아홉 끼를 먹지 못하여 백성들이 넋을 잃고 하루를 연명하던 시절, 이 소리 흥보가 '가난타령', 박타기 직전에 흥보가 부르기도 하고 흥보 마누라가 부르기도 하는, 이 소리의 끝 대목 자결하려는 장면에서, 역설적으로 청자는 다시 생의 끈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삶의 소리이기도 했던 것이니, 국창은 나라가 칭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탄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1986년 송정공원에 '국창 임방울 선생 기념비'가 세워졌고, 광산문예회관에 그의 북치는 상이 건립됐다. 지하철 송정역사에 그의 기념관이 들어섰고, 생가 주변으로 거리정비 사업이 한창이다. 매년 가을 임방울 국악제가 열려 그 뒤를 따르려는 후학들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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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넘어, 왜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몰려들까? 월봉서원은 광산구 임곡동, 이름도 정겨운 '너브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광곡(廣谷)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너브실'이다. 마을 동구 밖에는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노송숲이 있고, 그 숲 사이에 조그마한 모정이 있어 어릴적 고향에 돌아온 듯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너브실의 배산이 되는 백우산 자락에 우거진 소나무 숲을 뒤로하고 아늑하게 들어앉은 월봉서원으로 고봉 기대승 (高峰 奇大升)선생을 찾아간다. 은행나무는 샛노랗게 물이 들었고, 지나가는 답사객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비'를 맞으며 돌담길을 걷는다.그림=정암 김집중[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⑫끝·임곡 월봉서원달이 떠서 걷기에 좋은 밤, 깊어가는 가을밤. 마을을 지나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들어간다. 멀리서 누런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골목 끝에 이르자 앞이 탁 트이고 가로로 늘어선 맞배지붕의 옛 재실(齋室) 같은 학당이 있다. 달빛 가득한 마당에는 풀숲 사이로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댓돌 위에 가지런한 신발들, 그리고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들려온다.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학창의 같은 한복을 입은 한 사람 좌정하고, 그 앞에 장삼이사,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여럿이 모여 앉아 큰 소리로 글을 읽고 있다. '책을 읽으며 옛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거듭거듭 읽어 깊은 뜻에 도달해야 하네/ 보고 얻음이 마음에 와 몸에 새겨져야/ 말에 떨어지지 않고 뜻에 이를 수 있네' 고봉 시 '독서(讀書)' 첫눈이 내릴 즈음의 늦가을 저녁, 월봉서원의 풍경이다. 이 서원의 모습은 16세기인가, 21세기인가?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본다.그 전에도 단성의 도천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등이 있었다. 그런데 백운동 이전에는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祠堂) 역할에 그쳤다. 백운동서원은 고려 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그의 유배지에 세워졌다.마을이름을 따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다가,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명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향의 공간이면서 선비의 자제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공간을 겸해 '최초'라는 이름을 얻었다.소수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墓)'의 구조다. 앞에 학당이 있고 뒤에 사당이 자리한다. 향교에 가면 앞에 명륜당, 뒤에 대성전이 있는 것과 같다.지세와 풍향에 따라 전묘후학이나 좌학우묘의 다른 배치도 있지만 대체로 전학후묘 구조다. 요즘으로 치면 향교는 국립이고 서원은 사립대학이다. 15세기 후반 평민이 군역을 피해 향교로 몰려들었다. 사족들은 이를 꺼려했고, 이 때문에 관학은 후퇴하기 시작했다.조정은 사액서원에 땅과 노비를 하사했고, 면세 면역의 특혜까지 베풀며 장려했다. 오늘날 공교육을 보완하는 많은 사립학교들이 국비지원금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서원은 우후죽순 늘어났다. 관직에서 은퇴한 유학자, 사화를 피해 낙향한 선비, 재야의 양반계급들이 향촌에 서원을 세웠으며 그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다. 선학배향과 후학양성의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에 군역과 조세의 도피처로 악용되는 폐해도 컸다.186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에 따라 서원은 철퇴를 맞는다. 대원군은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했다. 이듬해 만동묘 폐쇄를 시작으로 전국의 서원 사우 1천여 곳이 헐리고 남은 것은 47개소뿐이었다.너브실 돌담길현재 전국에 향교는 234개소, 서원은 약 700여 개소가 있다. 그동안 문중들이 재건하거나, 정부와 지자체 등의 지원으로 복원·복설을 거쳐 많은 서원 향교들이 새로운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서원의 경우 강학기능은 쇠퇴하고 제향기능만 강화된 채 쇠락하여 여전히 박제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드웨어는 복원하였으되 그것을 받쳐줄 소프트웨어는 빈약하니 대중은 찾지 않고 문중, 그들만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고봉 기대승(1527~1572), 광주 출신으로 16세기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다. 자는 명언, 호는 고봉, 관향은 행주다. 고봉은 학행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600여 수의 시를 남긴 감성 짙은 문학가이자 '사칠논변'에서 보여주듯 조선 성리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철학자이며, 중앙정계에 나아가 절의와 도의에 적합한 직론·직강을 펼쳤던 곧은 정치가였다.1578년 향촌의 사림들이 고봉의 학덕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낙암에 '망천사'를 건립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소실돼 산월동 동천 위로 이건했고, 1654년 효종의 사액을 받아 '월봉서원'이 건립된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1938년 빙월당 중건에 이어 고봉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덕사와 내삼문, 장판각을 증설했다. 1991년 동재와 서재, 외삼문을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지금 월봉서원은 문화유산의 활용 측면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다. 광산구는 2017년 전담팀을 구성하고, 퇴계의 도산서원에 필적할 수 있는 고봉의 월봉서원을 만들기 위해 많은 예산과 노력을 쏟아부었다.'선비의 하루, 꼬마철학자 상상학교, 살롱 드 월봉, 월봉로맨스, 조선 브로맨스…' 월봉서원 프로그램은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시민들, 즉 수요자의 요구와 눈높이에 맞춰 구성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많은 시민들의 발길을 서원으로 향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마을주민과 함께하는 '월봉유랑' 축제, 중장년층 대상의 '기세등등 여유', '서원아카데미' 등이 대표적인 월봉서원의 브랜드들이다.그 결과 문화재청의 평가에서 '명예의 전당상'을 수상했고,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비밀의 서원, 월봉'으로 지역문화브랜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문화재와 마을, 문화재와 학교, 문화재와 문화재를 연계해 월봉에서 무양으로, 월봉에서 필암으로, 월봉에서 도산으로 서원을 연결하고, 외국 서원과의 교류도 추진하고 있다. 또 영역을 넓혀 용아생가, 김봉호가옥, 장덕동 근대한옥, 풍영정, 호가정 등 광산구의 옛 다락집과 누정을 접목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문화유산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월봉서원 전경이 '월봉서원 르네상스' 사업은 지난해 고봉 기대승 서세(逝世) 450주년을 계기로 그의 생애와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영역까지 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대중강연과 심포지엄 등이 열리면서 핵심으로 다뤄진 내용은 조선 철학사상사의 백미를 장식한 '퇴고논쟁(退高論爭)'.조선 중기 사상계의 큰 별 이황과 26살 연하인 기대승의 장장 8년에 걸친 철학토론, '세기의 편지'라 불리는 퇴고논쟁이다.먼저 퇴계의 주장. '사단의 발은 순정한 이(純理)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이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기이원론이다.이어지는 고봉의 반론. '대체로 이는 기의 주재(主宰)이고 기는 이의 재료입니다.이 둘은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로 존재할 때는 진실로 혼합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단과 칠정은 애초부터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일원론이다. 두 논쟁은 '이기(理氣)는 섞일 수 없다(퇴계)'와 '이기(理氣)는 분리할 수 없다(고봉)'로 요약된다.논리를 비약하면, 퇴고논쟁은 이 세상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한 사람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퇴계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은 다른 것이라 선인과 악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고, 고봉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이 다르지 않으므로 선인과 악인을 나눌 수 없게 된다. 고봉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면 미워할 악인이 없게 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의 뿌리 같다. 더 나가면 사형제도의 찬반 같은 의제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이념의 논쟁에 닿을 듯하다.우리는 고봉의 사유 속에서 비로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똘레랑스와 연대(連帶)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길의 시작이 공동체 정신이고, 그 길의 목적지는 '함께 사는 세상'일 것이다.다시 비약하자면, 고봉의 사유 속에서 '동아시아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저 어등산을 무대로 일어났던 16세기 의병들, 갑오년의 동학, 구한말의 창의군들,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80년 5월까지 도도하게 흐르는 전라도, 광주정신의 단초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늦가을 월봉서원의 학당에서 500년의 시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있다. 21세기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바둑의 다음 수를, 논문의 구성을, 선악의 문제를 AI가 가르쳐주는 이러한 시대에, 저 이끼 낀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16세기 고봉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것은 그저 어느 강학소의 풍경 같지만, 서원에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이어지고, 우리의 문화유산이 빗장을 열고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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