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광산 어룡동(상) 조선의 의병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②광산 어룡동(상) 조선의 의병?
'…삭막한 산천에 초목은 슬피 울고/ 마을은 잿더미가 되어 황량하기 그지없네/…유리걸식하며 날마다 관군 오기를 바라건만/ 언덕으로 뻗은 칡덩굴은 어찌 저리도 길어졌을까…'
백광훈(1537~1582)의 시 '달량행(達梁行)'의 부분이다. 조선 중기 삼당시인으로, 당대 팔문장에 꼽혔던 그의 문집 '옥봉집'에 실려 있다.
'달량'은 해남에서 완도 넘어가는 포구로 그곳에 다녀와서 쓴 시다. 여기서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선 70여척에 수천 명이 침입하여 50여일 해남 강진 장흥 일대를 쓸어버린 변란이다. 관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성은 함락되고 민가는 불타고 백성들은 유린당했다. 조선건국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왜변이었다. 걸식으로 버티면서 손꼽아 기다리건만 관군은 오지 않는다.
'언덕으로 뻗은 칡덩굴은 어찌 저리도 길어졌을까(彼葛모丘何誕節)', 이 대목은 '시경'의 '패나라의 노래'에 나온다. 모구(모丘)는 언덕이고, 탄절(誕節)은 마디가 길어졌다는 말이다.
나라가 위태로워 타국에 도움을 청했는데 원군이 오지 않자 부른 노래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언덕 너머 칡덩굴만 쑥쑥 자라는 것이다. 애통하고 절절한 시간이 흘러간다. 끝내 관군이 오지 않을 때, 의병은 일어선다.
창의(倡義)는 불의와 분노와 저항 속에서 태동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반체제적인 속성을 띄지 않을 수 없다. 적국이든 조국이든 빼앗으려는 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존, 죽이려는 자에 저항하며 목숨을 지켜내는 생존, 그 처절한 몸부림이 '창의'이다. 창의는 충(忠)의 일면과 역(逆)의 내면을 지닌 양날의 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을묘왜변 계기 조선의 불안한 미래 내다봐
양응정(梁應鼎·1519~1581)은 기묘사화가 나던 해 양팽손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양팽손은 능주에서 목숨을 걸고 조광조의 주검을 수습함으로써 '사생취의(捨生取義)'를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양응정은 시대와 골육에 흐르는 정신을 숙명으로 안고 세상에 나온 셈이다.
155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그러나 난세여서 공직은 순탄치 못했다. 세 번 파직된 뒤 복직되었고 공조참판과 대사성을 지냈다. 백광훈이 그를 사사했으며, 시문에 능했던 그는 정철 최경장 최경회 신립 박광전 등의 후학을 길러냈다. 을묘왜변으로 달량성이 함락되고 왜적이 북상하자 양응정은 문중 형제인 양달사에게 출정을 요청한다. 장형 양달수, 동생 양달사, 양달해, 양달초 등 4형제는 모친상 시묘살이 중이었는데 분연히 일어선다.
'을묘년 왜구가 창궐했을 때 수령들이 성을 버리고 제 몸만 보전한 사람도 있었지만, 해남현감 양달사와 영암참봉 양달수가 몸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다. 두 형제는 전라병사와 장흥부사가 숨지고 강진 병영 장흥 완도 등 10여 곳의 수령이 도망친 상황에서 기발한 계책으로 적들을 격파해 백성이 도륙당하는 것을 막아냈다.'
1842년 전주향교에서 남긴 것으로 후손이 전남도에 기증한 '통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양씨 형제는 상복을 입은 채 창의하여 의병 4천여 명을 규합, 전장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적들을 격파해 백성이 도륙당하는 것을 막아'내는 전과를 올린다. 이 대열에 백광훈이 19세, 최경창이 17세로 합류했다. 1847년(헌종13) '승정원일기'에 '양달사는 통정대부 좌승지에, 양달수는 사헌부 지평에 추증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의 창의가 훗날 이 땅에 민족의 자존으로 꽃피는 조선 최초의 의병이다.
을묘왜변 37년 뒤에 일어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조였고, 양응정은 그 불안한 미래를 내다봤다. 조정에서 왜구와 오랑캐를 물리칠 '대책'을 묻자 양응정은 '남북제승대책'이라는 책문으로 문과 중시에서 장원을 차지한다. 그는 여진에 대해서는 강경보다 회유책을 제시했고, 왜구에 대해서는 남쪽 변경의 수비를 강화하는 방어책을 내놓았다. 병조가 병권을 총괄하여 장수 선발과 양성, 군사훈련, 병선제작 등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이는 뒷날 율곡의 10만양병설의 선구가 되었고, 이순신의 해전에도 영향을 끼친 군사전략적 통찰이었다.
◆의주의 선조에게 호남 창의 알린 양산숙
광산 송산유원지에서 황룡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룡동 어등산 기슭에 박산마을이 있다. 죽산박씨의 터전으로 '박산(朴山)'마을이었는데 뒤에 '박산(博山)'이 되었다. 동구에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과 임류정이 있고, '박산의병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양응정은 은퇴 후 처가인 이곳에 내려와 살다가 임진왜란 전에 타계했다. 향년 62세. 1635년(인조13년) 순국한 양씨 일가를 포상하라는 왕명이 내려와 대문 앞에 정려를 세우는데 그 대상이 아홉이다.
첫째 양응정의 부인 죽산박씨, 둘·셋째가 2남 양산룡과 처 고흥유씨, 넷·다섯째가 3남 양산숙과 처 광산이씨, 여섯째가 4남 양산축, 일곱·여덟·아홉째가 양응정의 딸(김광운의 처)과 아들 김두남과 그의 처 제주양씨이다. 이 가운데 3남 양산숙이 임진왜란 의병으로 출전하여 의주로 피난한 선조에게 호남의 창의와 전세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어 1593년 2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했다. '…창의군이 제대로 버텨내지 못하였다. 적이 성에 올라와 병기를 휘두르니…김천일이 최경회·고종후 등과 나란히 앉아 말하기를, "여기를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 하고는…불을 질러 타 죽으려 하였는데 적이 바로 촉석루에 올라오자, 김천일이 아들 김상건,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과 함께 북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양산숙은 "위태로운 처지에서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하고 주장(主將)으로 하여금 혼자만 죽음에 빠지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7권에 나오는 대목이다. 실록은 이어진다. '양산숙은 헤엄을 잘 쳐서 그의 힘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끝내 김천일과 함께 죽었다. 그의 아내 이씨는 정유년 변란 때 산에 숨었다가 적을 만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유재란 때 왜적 맞서 정절 지킨 가족들
4년 뒤인 1597년 정유재란. 양씨 일족이 난을 피하여 무안 삼향포에서 뱃길로 떠나려 할 때 왜적들이 들이닥쳐 박씨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바닷물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정려는 인조 13년 생원 홍탁의 상소로 세워지게 된다.
당시 순절 9명 중 양산룡의 부인과 김두남의 처가 제외되어 '삼세칠정려'가 되었다. 2019년 이들 2명의 행적과 관련 내용을 '승정원일기'에서 발굴하여 이들을 추가 배향, '삼세구정려'의 현판을 새롭게 달았다.
이 피란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양산축의 처로, 고경명의 손녀이다. 고씨는 회임 중이었는데 바다에 뛰어들자 여종들이 살려낸다. 이 아이가 양만용으로 후손을 잇는다.
양만용은 1633년 생원과·진사과·대과를 한꺼번에 급제한 수재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상경 진격하던 중 남한산성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돌아간다.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핏줄은 양인묵으로 이어진다. 그는 조국광복대동단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일제강점기 3년6개월의 옥고를 치른 항일독립투사이다.
기묘사화에서 을묘왜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경술국치로 치닫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포 양팽손이 송천 양응정을 낳고, 양응정이 양산숙을 낳고, 양만용으로 이어지고, 다시 양인묵으로 내려온다.
인의예지 사단 중에서 가장 말하기 쉬운 것이 의(義)다. 의를 가르는 것은 수오지심이고, 의는 그 부끄러움을 단초로 딱 부러지기 때문에 말은 쉽다. 그러나 의는 피로 증명해야 한다. 맹자의 '생사취의'처럼,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야 하는 필연이며, 거기서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행이 어렵다.
이 땅의 첫 창의의 사표(師表) 역할을 한 양응정, 그리고 죽음으로써 부끄럽지 않은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 '양씨삼강문'은 의와 창의에 관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이렇게 민족의 창의는 힘찬 첫발을 내디뎠으니, 용이 승천하는 '어등산'이었다. 이광이 객원기자
- 500년을 넘어, 왜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몰려들까? 월봉서원은 광산구 임곡동, 이름도 정겨운 '너브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광곡(廣谷)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너브실'이다. 마을 동구 밖에는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노송숲이 있고, 그 숲 사이에 조그마한 모정이 있어 어릴적 고향에 돌아온 듯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너브실의 배산이 되는 백우산 자락에 우거진 소나무 숲을 뒤로하고 아늑하게 들어앉은 월봉서원으로 고봉 기대승 (高峰 奇大升)선생을 찾아간다. 은행나무는 샛노랗게 물이 들었고, 지나가는 답사객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비'를 맞으며 돌담길을 걷는다.그림=정암 김집중[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⑫끝·임곡 월봉서원달이 떠서 걷기에 좋은 밤, 깊어가는 가을밤. 마을을 지나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들어간다. 멀리서 누런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골목 끝에 이르자 앞이 탁 트이고 가로로 늘어선 맞배지붕의 옛 재실(齋室) 같은 학당이 있다. 달빛 가득한 마당에는 풀숲 사이로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댓돌 위에 가지런한 신발들, 그리고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들려온다.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학창의 같은 한복을 입은 한 사람 좌정하고, 그 앞에 장삼이사,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여럿이 모여 앉아 큰 소리로 글을 읽고 있다. '책을 읽으며 옛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거듭거듭 읽어 깊은 뜻에 도달해야 하네/ 보고 얻음이 마음에 와 몸에 새겨져야/ 말에 떨어지지 않고 뜻에 이를 수 있네' 고봉 시 '독서(讀書)' 첫눈이 내릴 즈음의 늦가을 저녁, 월봉서원의 풍경이다. 이 서원의 모습은 16세기인가, 21세기인가?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본다.그 전에도 단성의 도천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등이 있었다. 그런데 백운동 이전에는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祠堂) 역할에 그쳤다. 백운동서원은 고려 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그의 유배지에 세워졌다.마을이름을 따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다가,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명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향의 공간이면서 선비의 자제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공간을 겸해 '최초'라는 이름을 얻었다.소수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墓)'의 구조다. 앞에 학당이 있고 뒤에 사당이 자리한다. 향교에 가면 앞에 명륜당, 뒤에 대성전이 있는 것과 같다.지세와 풍향에 따라 전묘후학이나 좌학우묘의 다른 배치도 있지만 대체로 전학후묘 구조다. 요즘으로 치면 향교는 국립이고 서원은 사립대학이다. 15세기 후반 평민이 군역을 피해 향교로 몰려들었다. 사족들은 이를 꺼려했고, 이 때문에 관학은 후퇴하기 시작했다.조정은 사액서원에 땅과 노비를 하사했고, 면세 면역의 특혜까지 베풀며 장려했다. 오늘날 공교육을 보완하는 많은 사립학교들이 국비지원금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서원은 우후죽순 늘어났다. 관직에서 은퇴한 유학자, 사화를 피해 낙향한 선비, 재야의 양반계급들이 향촌에 서원을 세웠으며 그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다. 선학배향과 후학양성의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에 군역과 조세의 도피처로 악용되는 폐해도 컸다.186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에 따라 서원은 철퇴를 맞는다. 대원군은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했다. 이듬해 만동묘 폐쇄를 시작으로 전국의 서원 사우 1천여 곳이 헐리고 남은 것은 47개소뿐이었다.너브실 돌담길현재 전국에 향교는 234개소, 서원은 약 700여 개소가 있다. 그동안 문중들이 재건하거나, 정부와 지자체 등의 지원으로 복원·복설을 거쳐 많은 서원 향교들이 새로운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서원의 경우 강학기능은 쇠퇴하고 제향기능만 강화된 채 쇠락하여 여전히 박제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드웨어는 복원하였으되 그것을 받쳐줄 소프트웨어는 빈약하니 대중은 찾지 않고 문중, 그들만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고봉 기대승(1527~1572), 광주 출신으로 16세기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다. 자는 명언, 호는 고봉, 관향은 행주다. 고봉은 학행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600여 수의 시를 남긴 감성 짙은 문학가이자 '사칠논변'에서 보여주듯 조선 성리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철학자이며, 중앙정계에 나아가 절의와 도의에 적합한 직론·직강을 펼쳤던 곧은 정치가였다.1578년 향촌의 사림들이 고봉의 학덕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낙암에 '망천사'를 건립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소실돼 산월동 동천 위로 이건했고, 1654년 효종의 사액을 받아 '월봉서원'이 건립된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1938년 빙월당 중건에 이어 고봉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덕사와 내삼문, 장판각을 증설했다. 1991년 동재와 서재, 외삼문을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지금 월봉서원은 문화유산의 활용 측면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다. 광산구는 2017년 전담팀을 구성하고, 퇴계의 도산서원에 필적할 수 있는 고봉의 월봉서원을 만들기 위해 많은 예산과 노력을 쏟아부었다.'선비의 하루, 꼬마철학자 상상학교, 살롱 드 월봉, 월봉로맨스, 조선 브로맨스…' 월봉서원 프로그램은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시민들, 즉 수요자의 요구와 눈높이에 맞춰 구성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많은 시민들의 발길을 서원으로 향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마을주민과 함께하는 '월봉유랑' 축제, 중장년층 대상의 '기세등등 여유', '서원아카데미' 등이 대표적인 월봉서원의 브랜드들이다.그 결과 문화재청의 평가에서 '명예의 전당상'을 수상했고,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비밀의 서원, 월봉'으로 지역문화브랜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문화재와 마을, 문화재와 학교, 문화재와 문화재를 연계해 월봉에서 무양으로, 월봉에서 필암으로, 월봉에서 도산으로 서원을 연결하고, 외국 서원과의 교류도 추진하고 있다. 또 영역을 넓혀 용아생가, 김봉호가옥, 장덕동 근대한옥, 풍영정, 호가정 등 광산구의 옛 다락집과 누정을 접목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문화유산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월봉서원 전경이 '월봉서원 르네상스' 사업은 지난해 고봉 기대승 서세(逝世) 450주년을 계기로 그의 생애와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영역까지 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대중강연과 심포지엄 등이 열리면서 핵심으로 다뤄진 내용은 조선 철학사상사의 백미를 장식한 '퇴고논쟁(退高論爭)'.조선 중기 사상계의 큰 별 이황과 26살 연하인 기대승의 장장 8년에 걸친 철학토론, '세기의 편지'라 불리는 퇴고논쟁이다.먼저 퇴계의 주장. '사단의 발은 순정한 이(純理)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이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기이원론이다.이어지는 고봉의 반론. '대체로 이는 기의 주재(主宰)이고 기는 이의 재료입니다.이 둘은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로 존재할 때는 진실로 혼합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단과 칠정은 애초부터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일원론이다. 두 논쟁은 '이기(理氣)는 섞일 수 없다(퇴계)'와 '이기(理氣)는 분리할 수 없다(고봉)'로 요약된다.논리를 비약하면, 퇴고논쟁은 이 세상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한 사람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퇴계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은 다른 것이라 선인과 악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고, 고봉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이 다르지 않으므로 선인과 악인을 나눌 수 없게 된다. 고봉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면 미워할 악인이 없게 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의 뿌리 같다. 더 나가면 사형제도의 찬반 같은 의제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이념의 논쟁에 닿을 듯하다.우리는 고봉의 사유 속에서 비로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똘레랑스와 연대(連帶)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길의 시작이 공동체 정신이고, 그 길의 목적지는 '함께 사는 세상'일 것이다.다시 비약하자면, 고봉의 사유 속에서 '동아시아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저 어등산을 무대로 일어났던 16세기 의병들, 갑오년의 동학, 구한말의 창의군들,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80년 5월까지 도도하게 흐르는 전라도, 광주정신의 단초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늦가을 월봉서원의 학당에서 500년의 시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있다. 21세기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바둑의 다음 수를, 논문의 구성을, 선악의 문제를 AI가 가르쳐주는 이러한 시대에, 저 이끼 낀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16세기 고봉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것은 그저 어느 강학소의 풍경 같지만, 서원에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이어지고, 우리의 문화유산이 빗장을 열고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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