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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창의<倡義>, 어등산에서 힘찬 첫 발을 딛다

입력 2023.05.23. 18:50 박지경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②광산 어룡동(상) 조선의 의병
어룡동 박산(박뫼)마을과 '양씨삼강문' 전경을 그려 보았다.양씨삼강문은 임진왜란 의병장 양산숙과 그 일문(一門) 삼대에 걸친 9분의 충·효·절·열을 기리기 위해 박산마을입구에 세운 '삼세구정려(三世九旌閭)'이다.정려는 충신 효자 등이 살았던 마을 어귀에 붉은 칠을 한 문을 국가에서 세워줌으로써 그 인물과 후손에게 포상하는 의미와 함께 풍속의 교화에 보탬이 되고자 한 것이다.그림=김집중 작가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②광산 어룡동(상) 조선의 의병?

'…삭막한 산천에 초목은 슬피 울고/ 마을은 잿더미가 되어 황량하기 그지없네/…유리걸식하며 날마다 관군 오기를 바라건만/ 언덕으로 뻗은 칡덩굴은 어찌 저리도 길어졌을까…'

백광훈(1537~1582)의 시 '달량행(達梁行)'의 부분이다. 조선 중기 삼당시인으로, 당대 팔문장에 꼽혔던 그의 문집 '옥봉집'에 실려 있다.

'달량'은 해남에서 완도 넘어가는 포구로 그곳에 다녀와서 쓴 시다. 여기서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선 70여척에 수천 명이 침입하여 50여일 해남 강진 장흥 일대를 쓸어버린 변란이다. 관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성은 함락되고 민가는 불타고 백성들은 유린당했다. 조선건국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왜변이었다. 걸식으로 버티면서 손꼽아 기다리건만 관군은 오지 않는다.

'언덕으로 뻗은 칡덩굴은 어찌 저리도 길어졌을까(彼葛모丘何誕節)', 이 대목은 '시경'의 '패나라의 노래'에 나온다. 모구(모丘)는 언덕이고, 탄절(誕節)은 마디가 길어졌다는 말이다.

나라가 위태로워 타국에 도움을 청했는데 원군이 오지 않자 부른 노래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언덕 너머 칡덩굴만 쑥쑥 자라는 것이다. 애통하고 절절한 시간이 흘러간다. 끝내 관군이 오지 않을 때, 의병은 일어선다.

창의(倡義)는 불의와 분노와 저항 속에서 태동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반체제적인 속성을 띄지 않을 수 없다. 적국이든 조국이든 빼앗으려는 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존, 죽이려는 자에 저항하며 목숨을 지켜내는 생존, 그 처절한 몸부림이 '창의'이다. 창의는 충(忠)의 일면과 역(逆)의 내면을 지닌 양날의 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을묘왜변 계기 조선의 불안한 미래 내다봐

양응정(梁應鼎·1519~1581)은 기묘사화가 나던 해 양팽손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양팽손은 능주에서 목숨을 걸고 조광조의 주검을 수습함으로써 '사생취의(捨生取義)'를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양응정은 시대와 골육에 흐르는 정신을 숙명으로 안고 세상에 나온 셈이다.

155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그러나 난세여서 공직은 순탄치 못했다. 세 번 파직된 뒤 복직되었고 공조참판과 대사성을 지냈다. 백광훈이 그를 사사했으며, 시문에 능했던 그는 정철 최경장 최경회 신립 박광전 등의 후학을 길러냈다. 을묘왜변으로 달량성이 함락되고 왜적이 북상하자 양응정은 문중 형제인 양달사에게 출정을 요청한다. 장형 양달수, 동생 양달사, 양달해, 양달초 등 4형제는 모친상 시묘살이 중이었는데 분연히 일어선다.

양씨삼강문

'을묘년 왜구가 창궐했을 때 수령들이 성을 버리고 제 몸만 보전한 사람도 있었지만, 해남현감 양달사와 영암참봉 양달수가 몸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다. 두 형제는 전라병사와 장흥부사가 숨지고 강진 병영 장흥 완도 등 10여 곳의 수령이 도망친 상황에서 기발한 계책으로 적들을 격파해 백성이 도륙당하는 것을 막아냈다.'

1842년 전주향교에서 남긴 것으로 후손이 전남도에 기증한 '통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양씨 형제는 상복을 입은 채 창의하여 의병 4천여 명을 규합, 전장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적들을 격파해 백성이 도륙당하는 것을 막아'내는 전과를 올린다. 이 대열에 백광훈이 19세, 최경창이 17세로 합류했다. 1847년(헌종13) '승정원일기'에 '양달사는 통정대부 좌승지에, 양달수는 사헌부 지평에 추증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의 창의가 훗날 이 땅에 민족의 자존으로 꽃피는 조선 최초의 의병이다.

을묘왜변 37년 뒤에 일어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조였고, 양응정은 그 불안한 미래를 내다봤다. 조정에서 왜구와 오랑캐를 물리칠 '대책'을 묻자 양응정은 '남북제승대책'이라는 책문으로 문과 중시에서 장원을 차지한다. 그는 여진에 대해서는 강경보다 회유책을 제시했고, 왜구에 대해서는 남쪽 변경의 수비를 강화하는 방어책을 내놓았다. 병조가 병권을 총괄하여 장수 선발과 양성, 군사훈련, 병선제작 등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이는 뒷날 율곡의 10만양병설의 선구가 되었고, 이순신의 해전에도 영향을 끼친 군사전략적 통찰이었다.

양씨삼강문'삼세구정려'비각

◆의주의 선조에게 호남 창의 알린 양산숙

광산 송산유원지에서 황룡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룡동 어등산 기슭에 박산마을이 있다. 죽산박씨의 터전으로 '박산(朴山)'마을이었는데 뒤에 '박산(博山)'이 되었다. 동구에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과 임류정이 있고, '박산의병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양응정은 은퇴 후 처가인 이곳에 내려와 살다가 임진왜란 전에 타계했다. 향년 62세. 1635년(인조13년) 순국한 양씨 일가를 포상하라는 왕명이 내려와 대문 앞에 정려를 세우는데 그 대상이 아홉이다.

박산의병마을 표지석

첫째 양응정의 부인 죽산박씨, 둘·셋째가 2남 양산룡과 처 고흥유씨, 넷·다섯째가 3남 양산숙과 처 광산이씨, 여섯째가 4남 양산축, 일곱·여덟·아홉째가 양응정의 딸(김광운의 처)과 아들 김두남과 그의 처 제주양씨이다. 이 가운데 3남 양산숙이 임진왜란 의병으로 출전하여 의주로 피난한 선조에게 호남의 창의와 전세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어 1593년 2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했다. '…창의군이 제대로 버텨내지 못하였다. 적이 성에 올라와 병기를 휘두르니…김천일이 최경회·고종후 등과 나란히 앉아 말하기를, "여기를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 하고는…불을 질러 타 죽으려 하였는데 적이 바로 촉석루에 올라오자, 김천일이 아들 김상건,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과 함께 북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양산숙은 "위태로운 처지에서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하고 주장(主將)으로 하여금 혼자만 죽음에 빠지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7권에 나오는 대목이다. 실록은 이어진다. '양산숙은 헤엄을 잘 쳐서 그의 힘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끝내 김천일과 함께 죽었다. 그의 아내 이씨는 정유년 변란 때 산에 숨었다가 적을 만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유재란 때 왜적 맞서 정절 지킨 가족들

4년 뒤인 1597년 정유재란. 양씨 일족이 난을 피하여 무안 삼향포에서 뱃길로 떠나려 할 때 왜적들이 들이닥쳐 박씨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바닷물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정려는 인조 13년 생원 홍탁의 상소로 세워지게 된다.

당시 순절 9명 중 양산룡의 부인과 김두남의 처가 제외되어 '삼세칠정려'가 되었다. 2019년 이들 2명의 행적과 관련 내용을 '승정원일기'에서 발굴하여 이들을 추가 배향, '삼세구정려'의 현판을 새롭게 달았다.

이 피란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양산축의 처로, 고경명의 손녀이다. 고씨는 회임 중이었는데 바다에 뛰어들자 여종들이 살려낸다. 이 아이가 양만용으로 후손을 잇는다.

양만용은 1633년 생원과·진사과·대과를 한꺼번에 급제한 수재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상경 진격하던 중 남한산성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돌아간다.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핏줄은 양인묵으로 이어진다. 그는 조국광복대동단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일제강점기 3년6개월의 옥고를 치른 항일독립투사이다.

기묘사화에서 을묘왜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경술국치로 치닫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포 양팽손이 송천 양응정을 낳고, 양응정이 양산숙을 낳고, 양만용으로 이어지고, 다시 양인묵으로 내려온다.

'삼세구정려'편액

인의예지 사단 중에서 가장 말하기 쉬운 것이 의(義)다. 의를 가르는 것은 수오지심이고, 의는 그 부끄러움을 단초로 딱 부러지기 때문에 말은 쉽다. 그러나 의는 피로 증명해야 한다. 맹자의 '생사취의'처럼,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야 하는 필연이며, 거기서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행이 어렵다.

이 땅의 첫 창의의 사표(師表) 역할을 한 양응정, 그리고 죽음으로써 부끄럽지 않은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 '양씨삼강문'은 의와 창의에 관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이렇게 민족의 창의는 힘찬 첫발을 내디뎠으니, 용이 승천하는 '어등산'이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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