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무대 종소리 시선 단숨에
군사의 혼 무용수 몸짓에 새로
판소리 해학 곳곳…관객들 ‘웃음’
붉은 꽃잎 흩날리며 대미 장식
내년 하반기에 공식 공연 예정
“소설 벗어난 우리들의 이야기”

“원통한 내 이름 누가 좀 불러주오….”
불길이 번지고, 강 위로 죽음이 쌓인다. 적벽강에서 조조의 배들이 불타고 병사들이 허망한 죽음을 맞는다. 적벽대전은 삼국지 서사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전투로 꼽히지만, 그 전쟁터에 있던 것은 영웅들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막 태어난 아이를 두고 전장으로 향했고, 누군가는 청춘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늙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숫자에 불과했던 군사들의 이야기를 판소리와 국악, 무용으로 풀어낸 ‘적벽: 붉은 강’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10일 오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예술극장 극장1에서 ‘적벽: 붉은 강’ 쇼케이스가 열렸다.
이번 공연은 조선 후기 신재효가 집대성한 판소리 중 ‘적벽가’를 재해석했다. 판소리 적벽가의 눈대목이자 중국 삼국지 서사 중 백미인 적벽대전을 배경으로, 전쟁 속에서 희생된 군사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배치했다. 이를 통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전쟁의 광기와 인간애의 모순을 그려냈다.
무대는 ‘부름’으로 시작한다. 묵직한 종소리가 관객의 시선을 단숨에 끌어당겼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자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불러내는 소리다. 잠시 후 배들이 채워지고 강물이 붉게 변했다. 관객들은 마치 적벽대전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듯 숨을 죽인 채 무대를 응시했다.
이어 죽은 군사들의 혼이 새가 돼 나타났다. 원망과 그리움을 토해냈고, 무용수들의 역동적인 몸짓에는 전쟁의 상흔이 묻어났다. 움직임과 소리가 겹쳐지면서 전쟁터에서 사라진 이들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열다섯 살에 전쟁터로 끌려가 여든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노병의 이야기가 펼쳐지자 객석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노병은 승상 공명을 찾아가 자신의 청춘을 돌려달라고 한탄했다. 전쟁에 끌려간 어린 병사의 삶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여자 한 번 만나보지 못했다는 대목에서는 판소리 특유의 해학에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북벌 도중 오장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공명이 지난 날을 회상하는 장면을 지나자, ‘피의 눈물’이자 전쟁의 잔혹함·허무함을 상징하는 붉은 꽃잎이 무대 위로 흩날렸다.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고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듯 종소리가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연출·안무·작사를 맡은 정영두는 “소설 ‘삼국지’가 영웅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면, 판소리 ‘적벽가’에는 병사들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순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며 “한국전쟁과 5·18이 그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그렇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쟁은 소중한 사람을 잃게 하고 한순간에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어 버린다”며 “병사들의 이야기가 소설만의 아야기가 아니고 현대에도 일어나는, 우리 곁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을 다루고 싶었다”고 했다.
관객에게는 백성의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봐달라고 당부했다. 정 연출가는 “민중이 없다면 땅을 일구고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일은 어렵다”며 “대부분의 관객이 백성들일 텐데 백성들의 마음으로 작품을 보시면 훨씬 재밌게 보실 거다. 본인의 정서를 음막이나 춤에 담아 느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공연의 음악은 ‘두개의 눈’ 음악감독과 2024 국립극장 여우락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지낸 박우재 감독이 맡았다.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적벽가’ 이수자이자 광주 출신 소리꾼 김소진은 작창과 소리지도로 참여했다. 소리꾼 남상동과 이혜진, 13명의 무용수 등이 무대를 채웠다. 전남대학교 국악과 판소리 전공 재학생들도 코러스 소리꾼으로 힘을 보탰다. 본 공연은 내년 하반기 선보일 예정이다.
글·사진=강승희기자 wlog@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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