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9일까지 양림미술관
남구 곳곳 담은 작품 400점
올해 전국교류전으로 확대
11일 100명 참가 워크숍도
양림동 구석구석 담아내며
도시에 활력 선사 '기대'

“광주 골목골목을 직접 걸으며 차로는 보이지 않는 풍경에 매료될 수 있는게 어반스케치의 매력이랄까요. 이번 전시에 오시는 분들도 간접적으로나마 그런 매력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8일 서동환 광주어반스케치&드로잉 회장은 이날부터 19일까지 양림미술관에서 개최하는 ‘광주를 그리고 도시를 잇다’전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23년부터 이어온, 광주를 무대로 한 전시이다. 광산구로 시작해 동구, 서구에 이어 올해는 남구를 무대로 작업을 진행했다. 62명의 광주어반스케치&드로잉 회원들은 약 3개월 동안 양림동, 백운동, 봉선동, 월산동, 사직동 등 남구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저널북에 풍경을 담아냈다.
이들의 작품 속 광주천 풍경, 고싸움놀이 현장, 동네 작은 슈퍼마켓, 봉선시장, 포충사, 기독병원, 최부잣집 등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지만 사뭇 아름답고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특히 이들의 작품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대부분 아마추어 작가이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미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늦게라도 그림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혹은 심리적 안정을 위해 어반스케치를 접한 이들이다. 아마추어라지만 이게 정말 가능한가 싶은 작품들도 많다. 이같은 배경에는 광주어반스케치&드로잉 모임의 체계화한 프로그램과 모임 속 철칙이 크게 역할하고 있다.
서 회장은 “총 133명의 회원이 있는데 오픈채팅방을 통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서로 서로 격려하고 있다”며 “21일 동안 낙서라도 매일 올리는 21일 챌린지, 매주 월요일 올라온 사진을 보며 드로잉해 일요일까지 올리는 주간 미션, 매달 한 번씩 이뤄지는 야외 정기모임이 이뤄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원들의 그림을 서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서울, 수원, 전주, 부산 등 타도시의 38명 어반드로잉 작가들도 참여해 전국교류전으로 꾸려졌다. 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각 도시의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참여했다.
서 회장은 “지난해에 프랑스 클레르몽페랑시 초청으로 국제 카르네 드 보야주 축제에 참여하게 됐는데 도시를 매개로 각 나라의 예술인들이 모인다는 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나 또한 좋은 영향을 얻고 왔다”며 “이같은 경험을 토대로 다른 도시의 어반스케치 작가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이 우리 지역 작가들에게도 좋은 영감이 되겠다는 생각에 이번 전시를 전국교류전으로 확대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오는 11일에는 전시 연계로 ‘양림동 어반스케치 워크숍’을 연다. 전국의 어반스케처 100명이 이 워크숍을 위해 양림동으로 모여들어 양림동의 골목과 건축, 거리 풍경 등을 각자의 방식으로 담아낼 계획이다. 워크숍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어반스케치 작가이자 이번 전국교류전에 참여한 곰아재, 그림쟁이지니, 오영석, 윤코, 재재나무 등이 함께 할 예정으로 양림동을 넘어 도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 회장은 “100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풍경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광주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따뜻한 이야기를 다채롭게 보여줄 것”이라며 “이번 전시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한편 광주어반스케치&드로잉은 지난 2020년 4명의 회원들이 동호회 형태로 시작, 팬데믹을 거치며 현재 133명의 회원이 가입된 어반스케치 모임이다. 2023년부터 광주 각 자치구의 풍경을 담은 전시를 열어 왔으며 지난해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국 규모의 어반스케치 행사를 열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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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 철도, 기숙사까지 허허벌판에 들어선 도시
1934년 경성일보가 8월 10일자로 보도한 종연방적 광주공장 설계 개요와 관련한 기사 내용은 조선 제일의 대공장으로서 기대감을 드러냈다.당시 임동공장 설계 보도에 따르면 철근 철골콘트리트 벽돌 구조물(일부 지하층) 총 연건평 칠천팔백삼십팔평, 굴뚝은 철근콘크리트, 건물 이십구평, 창고는 철근콘크리트 벽돌 건물 구백구십일평, 창고 블라트폼 철골조 일백십팔평, 부속건물 목조 팔백팔평이다. 시멘트, 목재, 벽돌 등 재료는 회사 지급을 활용, 총공사비는 100만엔이다. 임동공장 공사비 100만엔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300억원에서 900억원 사이로 추산된다. 당시 은행원이나 관원의 일반적 월급에 대입할 경우 1엔은 약 4만원에서 6만원에 해당된다.임동공장 보존건물 선정 TF를 이끈 천득염 전남대 명예교수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건물이 미적으로 뛰어난 것보다 한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상징하는 양면적 평가가 엇갈리는 곳이다”며 “공장안에는 발전소, 변전소, 자재창고, 철도 등 복합시설이 갖춰진 또 하나의 도시였다”고 평가했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연간 1천800만근(1만1천t)의 목화량이 필요한 것으로 설계됐다.1934년에서 1935년 당시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 따르면 임동공장은 조선 제일의 면화산지인 전남지역 연간 목화 수확량을 모두 투입해도 240일 가동량에 그쳤다. 공장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웅장한 건물에는 수 천명의 인력을 운영할 방직시설이 갖춰져 있었다.부산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 다음으로 전국 섬유업체 중 규모나 인력구성에 있어 큰 회사였다. 전통적 농업중심의 판을 깨는 산업시설이었다.러시아 건축사가 설계한 톱니모양 지붕을 얹은 형태의 직물 생산 공장 면적은 축구장 5개가 들어설 만큼 넓었다. 지붕은 한쪽 직각을 이루고, 반대쪽은 40% 기울기를 보였다. 북향 채광창을 둔 톱니형 지붕은 직사광선을 피하면서 작업장에 일정한 자연광을 들이기 위한 방직공장 특유의 설계였다. 온도 변화를 줄여 방적 과정에서 실이 끊어지는 것을 막는데도 유리했다.생산구역에서 작업실은 원활한 방적 방직공정에 맞춰 배치됐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건물은 1층이었다. 원자재, 반제품, 완제품을 반입하고, 이동하는데 인력이 적게 들게 하기 위한 설계였다. 목화묶음이 공장안으로 들어오면 여러 단계의 방적공정을 거쳐 실이 되고 다시 직조공정을 거쳐 무명베로 만들어졌다.그러면 수천명이 24시간 기계를 돌리는 공장은 어떻게 움직였을까.임동공장에서는 기계를 돌리는 전기는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200평의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발전소는 무연탄을 원료로 2천500㎾급 전력을 생산했다. 화력과 불을 사용해 증기를 발생시키는 기력발전소는 방적공장의 전기공급을 위한 산업용 민간 자가 발전시설이었다. 연료인 무연탄은 화순탄광에서 철도를 통해 공장 내부까지 들여왔다. 공업용수는 영산강 물을 사용했다. 화재에 대비해 고가수조까지 뒀다.보일러실의 고가 수조는 당초 2개였다. 화재발생시 진압하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였다. 물은 광주천이 아닌 영산강에 취수시설을 설치, 끌여왔다. 조선총독부는 거대한 임동공장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물을 영산강 수계에서 대규모 취수토록 했다.조선총독부와 전남도가 당시 지역 농민들의 농업용수나 자연생태계보다 일본 독점자본의 공장 가동을 최우선으로 막대한 인프라 특혜를 제공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국가기록원에는 전남도가 종연방적 임동공장으로 영산강의 물을 끌어들이는 공작물 설치 및 허가를 한 문서가 남아있다. 고가수조는 방직물의 특성상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않으면 공장 전체가 타버릴 우려가 있어 이에 대비한 중요한 시설이었다.1935년 공장 준공때부터 운행된 철도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의 주요한 운송 인프라였다. 화순탄광 석탄과 원료와 면제품 수송을 위해 개설됐다. 화순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은 트럭에 실려 화순역까지만 수송됐고, 이후 열차에 실려 광주역을 거쳐 공장 내부 발전소까지 운반됐다.광주역은 현재 전남광주특별시 동구 대인동에 자리잡은 동부소방서 자리이다. 철도는 또한 면화와 제품을 외부로 실어날랐다. 1960년대 광천동 공단까지 연장돼 산업물자 수송에 활용되다가 1990년 폐쇄됐다.그러나 발전소도 철도도 스스로 공장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거대한 생산도시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수천명의 노동자였다. 그 대부분은 젊은 여성들이었다.이들의 주거시설은 기숙사였다. 임동공장은 적게는 2천명, 많게는 4천명의 노동자가 근무했다. 대다수 여성이었다. 노동자들의 숙소용으로 쓰인 기숙사는 여성용 목조단층건물 8동, 남자용 1동 사택 50호가 있었다. 1개동마다 16개의 방이 있었고, 각 방에는 14~15명이 수용됐다. 단순 계산하면 여성 노동자 약 1천800~1천900명을 동시에 수용할수 있는 규모다.여성 기숙사는 건물의 중심부에 위치, 수많은 건물과 담에 포위된 양상을 띠었다. 이 기숙사들은 종연방적이 1961년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두 개 회사로 분리 당시에 남측 기숙사는 전남방직, 북측 시설과 공간은 일신방직으로 넘어갔다. 1980년 발행된 광주시사에는 ‘1961년 전방과 일신방직으로 분리된 두 회사는 남측에 전방, 북측에 일신방직이 자리잡았다’고 기록돼 있다,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 기숙사는 1970년 철거됐다. 이후 기숙사는 철근콘트리트로 지어졌고,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규모는 아니었다.공장은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공장 내부와 주변에는 기숙사뿐만 아니라 수영장, 종교시설, 학교까지 들어섰다. 생산시설로 출발한 종연방적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확장된 것이다. 1938년 공장내에 수영장이 건설됐다.광주에서 받은 혜택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명목이었다. 1945년 11월에는 전방교회가 김형남에 의해 설립됐다. 전방교회는 기숙사 2층에서 예배를 시작으로 유치원으로 장소를 옮겼고, 1948년 예배당을 신축했다.2002년까지 방직공장 서쪽에는 전남중·고가 있었다. 전남중·고는 1951년 문을 연 광주공과기술학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공과기술학교는 방직공장이 세운 사립학교였다. 공과기술학교는 1958년 전남중학교로 변경했다.1935년 일본 자본이 세운 공장에 해방 이듬해 노동자 1천700명이 15m 태극기게양대를 세웠다. 노동자들이 뜻과 돈을 모아 일본 자본이 세운 회사에 국권회복의 상징을 세운 것이다. 건물 대부분은 이제 사라졌고 태극기 게양대도 개발을 위해 철거돼 보관중이다.1930년대 이후 280여채에 달했던 건물은 이제 5개 시설만 남았다. 발전소도 철도도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목조 기숙사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건물만으로 종연방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거대한 공장을 하루 24시간 움직인 중심에는 기계앞에 섰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있었다.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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