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나는 시방 '텅 빈 정자' 몇 개를 연거푸 지나고 있다

입력 2022.07.27. 18:47 이석희 기자
[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망월·담양역서 고독을 만나다

[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망월·담양역서 고독을 만나다

등에 업은 고독과 함께 걸음을 재촉

나주 화순 장성 담양은 광주로 드나드는 대표적 관문이다. 담양은 가장 인접한 관광지이다. 지명에서부터 복숭아꽃이 만발한 곳 도동고개, 노고지리 봉우리를 넘는다. 여름 햇볕은 덥다 못해 따갑다. 한 발 두 발 내딛는 길, 고독이 등딱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익숙해져야 하는 것, 등에 업은 녀석과 함께 걸음을 재촉한다.

길을 걷다 보면 가장 반가운 곳이 쉼터 정자(亭子)다. 정자는 도보 여행자들에게 잠시 쉬어가는 필수 코스, 인생 간이역이다. 광주에서 담양으로 옛날 광주선(光州線)을 따라간다.

마항역에서 담양역 가는 철교

광주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대인시장에서 나무전거리를 지나 왼쪽으로 고개를 꺾어 농산물시장 뒤편으로 도동고개를 넘어간다. 망월역, 장산역, 증암천 철교를 거쳐 마항역과 담양역에 이른다. 원래 유산교였다. 그런데 이곳에 철로가 나면서 쌍교라는 명칭이 생겨나고 그 후로 회자됐다. 1922년 12월1일 영업 개시해 1944년 11월 1일 폐역이 된 역들이다.

1925년 4월 11일 최남선은 '심춘순례(尋春巡禮)'에서 장산역 발 새벽 5시 차를 타고 담양으로 가서 송강정을 보고 김덕령 장군의 고향과 개선동 석탑을 순례했다고 했으며, 당시는 매년 30만 명이 이용할 정도이니 그 규모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일제는 1942년 하와이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 태평양전쟁을 치르며 전쟁물자로 철로까지 뜯어 공출한다. 숟가락까지 공출하던 때에 철로가 온전할 리 없다. 담양 지역의 농산물을 수탈해가기 위해 가설한 광주선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또 69년 광주선 복원 사업을 시작했고 선로를 복구하고 교량을 다졌지만, 어찌 된 연유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렇게 또다시 60여 년이 흐른 지금, 철로나 역사는 흔적조차 없다. 다만 망월역은 복다우 마을이, 장산역은 쌍교 직전 원유동 마을 길가에 자리 잡은 여행사가 예전 역 터였다. 봉산의 마항역 또한 창고가 들어섰고, 담양역 가는 오례천 철교만이 여전히 이곳이 철로였음을 증명한다.


◆사람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허허롭다

담양까지 망월 장산 마항 간이역의 역사를 아는 현지인은 많지 않았다. 마을에서 사람 만나기도 어려울 정도로 허허롭다. 또 만난 노인조차 어렸을 때 들었거나 흔적이 있었다고 어렴풋이 회고할 뿐 자세히 아는 이는 드물다.

마항역터 우측

적적한 장산마을에서 대문 틈새로 인기척이 보인다. 서슴없이 마당으로 들어서니 할머니가 과객을 반긴다. 무섭지 않으냐. 내 말에 지나가는 강아지도 반가운데 무슨 말이냐며 음료수까지 내놓는다. 기차가 다녔다는 소리를 들었단다. 윗마을 100살 먹은 할머니는 직접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았다니 거기 가서 만나보라며 나를 붙잡는다. 우습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 가고 집들만 덩그렇게 남았는가. 요란하게 지나갔을 기차도 아스라이 펼쳐졌을 철로도 일장춘몽이다.

온통 텅 빈 지갑보다 더 공허한 정자만이 마을을 지키는데 간혹 정자에서 만난 노인은 한결같이 고독하단다. 정자도 하나고 노인도 하나, 주산마을에서 만난 문동수(80) 할아버지는 이 앞 냇가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많았고 놀이터였단다. 첫 휴가를 화순 동기랑 나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 군용 배낭이 바뀌었더란다. 그래서 담양에서 화순까지 걸어가서 찾아왔다며 자신이 소속된 부대에서 M16 소총을 처음 사용했다며 그 어려운 시절 36개월 군대 생활에서 그 누구 뺨 한 대 때리지 않고 제대한 사람은 자신뿐일 거라며 잠시 추억에 젖는다. 젊어서, 그리고 많아서 그리운 과거는 어쩌면 현재 처절히 외롭다는 고독의 역설일 거다.

정자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배고픈 시절이나 군대 이야기만 되뇔 뿐 40년대에 태어난 그들에게 담양행 기차는 신기루 같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복다우 망월역

"십 년 전만 해도 이곳 정자에 노인들이 가득했지, 중늙은이조차 어디 구석이나 차지할 수 있었나, 지금이야 이 넓은 정자에 딸랑 나 혼자 그만 세월이 너무 빨라." 마항역에서 만난 신윤철(75) 씨의 하소연이다.

정말 인파로 가득했을 마을 앞 정자에는 한더위인데도 사람이 없다. 어느 마을이건 이 정자를 짓기 위해 주민들이 십시일반 했다는 표지석에 이름들은 수백 명도 부족해서 모두 새기지 못했는데, 그 많던 이름, 지금 당장이라도 부르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기차 사라진 길목에는 말매미들만

복다우 주산리

술이 익었으니 벗이 없을 손인가? / 부르고, 타고 켜며, 흔들며 / 온갖 소리로 흥취를 재촉하니 / 근심이야 있겠으며 시름이라 붙었으랴. / 누웠다 앉았다 구부렸다 젖혔다가 / 읊다가 불다가 마음 놓고 노니 / 천지도 넓디넓고 세월도 한가하다. / 복희 황제 시대 태평성대를 몰랐더니 지금이야말로 그때로구나. / 신선이 누구던가 이 몸이야말로 신선이로구나.

아름다운 자연을 거느리고 내 평생을 다 누리면 / 악양루 위의 이태백이 살아온들 / 호탕정회야 이보다 더할쏘냐. - 송순, 면앙정가

마항 마을은 면앙정 바로 아래에 있다. 절로 송순이 되어 흥얼거리며 걷는다. 담양은 광주에서 가장 가까운 소읍이고 가사 문학의 뿌리이다. 그리고 가사는 모두 정자에서 탄생했다.

봉산에서 장산역 가는 기찻길

정자마다 정치와 외교, 동서양 철학을 운운하고, 사랑가를 부르고, 신세한탄도 하고, 하늘의 별을 보고 운명도 예견했을 사람들, 정자를 잃고 문학을 잃고 역사와 삶의 뿌리를 잃고 끝내 우리도 소멸된 기차, 고독이 되지 않을까.

기차가 사라진 길목 정자에는 여름 말매미들만 기적을 울리듯 쩌렁쩌렁 울 뿐 마을은 적적하다 못해 고요하다.

말없이 흐르는 면앙정 앞 물결도 오늘따라 더 묵묵히 흐르는 것 같다.

쌍교 앞 장산역 주변

◆시조 너무 짧아 가사로 구구절절 담아

어와 허사로다 이 임이 어디 갔나 / 잠결에 일어나 앉아 창을 열고 바라보니 / 가엾은 그림자가 날 좇을 뿐이로다. / 차라리 죽어서 지는 달이나 되어서 / 임 계신 창 안에 환하게 비추리라. / 각시님 달은 물론이고 궂은비나 되소서.

-정철, 속미인곡

가사 문학은 한편 연군가(戀君歌)이기도 하다. 출세를 위해 임금을 그리워했던 주변 사람들에게 추앙받기 위해 시조로는 너무 짧아 이렇게 구구절절 가사로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냈으리라. 어쩌면 우린 지금 그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임금보다 더 절실하게 가난하지만, 인정 넘쳤던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을 불러내고 싶은지 모른다.

쌍교

담양역부터는 사람들이 제법 붐빈다. 읍을 가로지르는 천을 따라 여름이 작열하고 있다. 사람들도 쌍쌍이 가족끼리 웃음 가득하다. 부족함 없는 시대, 넘쳐나는 풍요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왜 나는 공허와 고독을 읽는가.

옛 담양역 플랫포옴

고독은 시골 마을이나 정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읍내는 물론이고 도시 한가운데도 있다.

서로 어깨를 걸고 함께 웃고 울던 정자나 사랑방은 모두 텔레비전이나 개인용 컴퓨터 휴대폰에 빼앗기고 말았다.

원래 고독은 인간의 영혼을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결이 다르다.

장산 철로흔적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 주변에 누군가 있어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도 없는 시골 정자 앞을 지나친다. 그리고 그때마다 만난 '고독'에게 차마 말을 걸 수가 없다. 그것은 찬란하고 눈부신 고독이 아니라 시퍼렇게 멍이 든 절대 고독, 진짜 외로움이었다.

구 광주선을 따라 담양을 갔다 되돌아온다. 소멸하는 것들은 관찰의 대상만이 아니다. 내 주변의 것들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언젠가 그 물결 속에 나도 끼어있을 것이다.

걸음을 재촉한다. 상념이 많았던지 해가 제법 이울었다. 나는 시방 텅 빈 정자 몇 개를 연거푸 지나고 있다.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toamm@hanmail.net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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