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5월은 학교를 가지 않은 날이 유난히 많았다. 5월 신록이 짙은 어느날 아침이었다. 선생님은 특별한 사유도 없이 60여명의 동급생들에게 당분간 휴교령이 내려졌으니 가정학습에 집중해 달라는 말만 하고 추후 통지는 학부모통신문을 통해 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봄기운이 천지에 넘쳐나 감당을 못 하더니 푸르름이 꽃향기를 뒤덮고 운동회와 소풍 일정이 잡혀 설레던 나날이었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말만 연신 되풀이했다.골목에서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들과 형, 동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TV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와 함께 대머리에 근엄한 표정을 한 장군 하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광주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열한 풍경을 제외하고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일상이었다. 적어도 겉모습은 그랬다.
그렇게 한주가 지나고 TV화면과 어른들의 쑥덕거린 소리로 들리던 광주 시내의 시위대 모습이 집앞의 풍경이 됐다. 유리창이 깨어진 버스와 트럭 등을 타고 수십명의 시민과 청년들이 민주화 구호를 외치며 광주 인근 시골지역까지 쏟아져 나왔다.
알 수 없는 공포와 긴장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필자가 기억하는 1980년 5월의 모습이다. 그때는 몰랐다. 왜 어른들이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고 잘 다니던 학교가 왜 문을 닫았으며 대학생 형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유를 누구 하나 시원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5월 말이 지나고서야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사이 대통령이 바뀌었고 뉴스에서는 얼마 안 지나 과외금지령과 대학졸업 정원제를 실시한다는 등 정부 담화가 발표됐다. 사람들의 시선은 프로야구 개막과 다가오는 88올림픽 개최로 모아졌다.
그렇게 모든 진실과 풍경은 묻혔다.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을 진학하고서였다. 80년 5월 광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자 대한민국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 됐고 43년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도 못했고 숨진 이들과 유족들의 고통과 희생도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또 5월이다. 살아남은 우리가 숨죽일 수 없는 이유다.
최민석 문화스포츠에디터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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