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는 다양한 얼굴로 다가온다. 그들 만의 과거·현재·미래를 담아내고 있어서다. 도시는 진화한다. 도시 정체성과 브랜드 등에 기반한 비전과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정책·예산의 우선 순위에서 벗어나 있는 광주와 전라남도가 수 천억에서 수 조원 대에 이르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다. 선거는 동력이 됐다. 대선에 매달렸던 이유다. 노무현의 '문화수도', 문재인의 '한전공대', 이재명의 '인공지능(AI) 수도' 등이 대표적이다.
광주와 전남은 정치적 색채가 명확하다. 진보·개혁진영의 심장이자 핵심 지지 기반이다. 수도권 민심의 풍향계 역할도 했다. 양날의 칼이 됐다. 발목을 잡으며 지역발전이 더뎠다. 노무현은 변곡점이 됐다. 그는 부산에서 치른 총선과 시장 선거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지역주의 탓이었다. 광주는 그에게 곁을 줬다. 1%대 지지율에서 출발해 대권을 거머쥔 배경이다. '노무현 바람'이 시작된 곳도, 선거에서 90%가 넘는 압도적 지지를 보낸 곳도 광주였다.
지방분권·균형발전 화두 여전
선이 굵었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헤엄친다'. 92년 14대 총선에서 처음 낙선할 때 그의 선거구호였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항상 어려운 싸움을 했다. 3당합당을 거부하면서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 중)"고 했다. '바보 노무현'의 지역감정·지역주의 극복은 정치 인생을 관통했다. 수도이전으로 대표되는 지방 분권과 국토균형발전은 여전한 고민거리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초반, 광주·전남에 대한 그의 생각과 평가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2003년 9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광주·전남 지역언론 합동 기자회견에서다. 오전 10시부터 2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내내 그의 정치 철학과 지역 공약 등에 대해 비교적 진솔한 설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대뜸 꺼낸 전남도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그의 대표 브랜드였던 '선택과 집중' 정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다.
"최근에 (고 박태영) 전남지사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동북아시아 관광객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세계적인 관광레저도시를 건설한다는 구상인데…. 천혜의 자원을 갖고 있는 전라남도를 선택, 집중적으로 도울 생각이다."
그 게 일명 'J프로젝트'였다는 건 며칠 뒤 알았다. 전남의 영문 첫 글자를 딴 '낙후된 전남의 미래를 획기적으로 바꾸겠다'는 박 전 지사의 야심이 깃들어 있었다. 300억 달러(약 35조원)를 유치해 인구 20만~30만 규모의 관광신도시를 만든다는게 대략적 얼개였다. 2002년 7월, 박 전 지사 취임 이후부터 추진됐다. 외국기업과 자본가들을 직접 접촉해 손수 챙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전남 서남해안 일대에 복합 해양레저타운을 건설하는 개발 프로젝트를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2∼3차례 말했다.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이듬해인 2004년 7월이었다. 당시 목포를 찾은 노 대통령은 "전남에 크게 판을 벌이겠다"고 했다. 2005년 '기업도시 특별법'에 따라 관광·레저형 기업도시로 지정되면서 속도를 냈다. 2009년 정부의 개발계획을 승인받아 2013년 착공했다. 전체 면적은 33.8㎢(1천22만여 평)에 달했다. 구성·삼호·삼포 등 3개 지구로 나눠 개발됐다. 유럽 최대 휴양지인 스페인 남쪽 지중해 연안 '코스타 델 솔'을 모델로 했다. '태양의 해안'이란 뜻이다. 40개가 넘는 골프장과 초대형 해양테마파크 등 여행상품도 다양해 연간 800만 명이 찾는 곳이다.
상전벽해. 박태영 전 지사가 설계한 J프로젝트는 2004년 박준영 지사가 부임하면서 본격화됐다.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권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관광레저 도시는 점차 잊혀졌다. 20여년 전, 전남의 미래를 담보했던 간척지는 인공지능(AI) 시대가 돼서야 빛을 발하고 있다. 현 '솔라시도(SolaSeaDo)'는 J프로젝트의 기업도시 브랜드다. 삼성은 물론 미국 글로벌기업 오픈AI와 SK 등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기업들로부터 구애를 받고 있다. 국가 AI컴퓨팅센터와 AI데이터센터가 대표적이다. 전력(태양광 발전설비)과 냉각수, 드넓고 값싼 부지 등이 강점이다. GIST·전남대 등 연구기관이 밀집한 광주와 연계성도 높다.
솔라시도 개발 모델 광주서 서비스
광주·전남의 미래 먹거리를 위한 전략적 윈윈 모델로 각광 받고 있다. '서남권 AI 투트랙 체계'가 구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솔라시도에서 개발된 AI 모델을 광주에서 서비스하는 인프라가 동시에 갖춰지면서다. AI 선도도시 광주의 위상과 기반은 함께 탄탄해 졌다. 내년도 정부 예산 확보 과정에서다. 광주가 요청한 AI 주요 신규 사업이 모두 반영되는 등 정부의 'AI 광주' 구상은 더욱 명확해졌다. 국가NPU(신경망처리장치) 컴퓨팅센터와 AI모빌리티, AI데이터센터 고도화, AI실증도시 등이 대표적이다.
이재명 정부는 AI 3대 강국을 목표로 한다. AI 관련 경쟁력을 강화하는 일이 국가적 화두가 된 셈이다. 나라의 발전은 지방, 도시의 경쟁력 강화를 전제로 한다. 솔라시도처럼 광주와 전남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아껴둔 땅이 됐다. 넥스트 레벨로 대표되는 AI 시대를 맞아서다. AI가 낙후의 상징인 광주·전남 성장의 촉매제가 될 수 있을까. 새로운 리더십을 선택하는 2026년 6·3 지방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지방 권력은 도시의 운영 주체다. 광역단체장이 대권 주자가 되는 시대. 광주의 꿈과 전남의 발전,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선거를 기대한다. 리더는 도시를 바꾼다. 그 도시는 리더를 만들어 가며 성장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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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칼럼] 줄서기 대행, 꿀알바일까 불평등의 상징일까
선정태 취재2본부장줄을 대신 서주는 아르바이트가 세계 곳곳에 등장한 지도 수년이 지났다. 인기 맛집 앞, 한정판 굿즈 매장, 병원 접수 창구, 행정기관 민원실까지. 몇 년 전에는 또 국내 대형 놀이공원에서는 이른바 '패스트 트랙'을 구매하면 순서를 위해 줄 서지 않고 곧바로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티켓을 판매했다.돈을 지불하면 인기제품을 남보다 먼저 구입할 수 있고, 남보다 빨리 타고, 시간을 거리에서 허비하지 않는 구조가 일상이 됐다. 줄서기 아르바이트, 테마파크의 우선 탑승권, 유료 패스는 '시간을 돈으로 사는 행위'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실제로 이 '대행'은 진입 장벽이 낮고, 단기간 현금을 벌 수 있어 청년·취약계층의 생계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AI시대를 맞아,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문제 삼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줄서기 알바'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측면을 강조하며 효율의 언어로 포장된다. 바쁜 현대인에게 시간은 금이고, 누군가는 그 금을 대신 캐준다.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진 시장이 만들어진 것이다.돈을 지불하면 시간을 살 수 있게 되면서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오랜 믿음은 이제 틀린 말이 됐다. 하루 24시간이라는 물리적 조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시간은 더 이상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이 풍경은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묘한 불편함을 남긴다. 줄을 선다는 행위는 원래 '선착순'이라는 가장 단순한 공정의 약속을 전제로 한다. 더 일찍 오고, 더 오래 기다린 사람이 먼저 기회를 얻는 구조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기다림을 타인에게 외주화하는 순간, 이 약속은 균열을 일으킨다.효율과 공정 사이의 괴리돈이 있는 사람은 기다리지 않고, 돈이 필요한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팔아 대신 기다리는 대기의 외주화는 기다림이라는 불편을 사회적으로 분담하지 않고 계층을 구분해 재배치하는 행위로도 보인다. 결과적으로 기다림은 가난한 사람의 몫이 되고, 여유는 부유한 사람의 특권이 된다.'편법'이 아닌 줄서기 알바를 잘못됐다고 비난할 수 없지만,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이 당연해질수록 공공서비스와 사회적 기회마저 시장 논리에 잠식될 위험이 커진다.이미 국가에서는 병원 예약, 행정 민원, 주거 청약 등에서 대기 순서를 돈으로 우회하는 행태를 규제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질서 유지 차원이 아니라, 기회의 접근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공정은 효율보다 느릴 수 있지만, 사회를 버티게 하는 마지막 신뢰이기도 하다.공정이라는 측면에서 줄은 단순히 사람을 나열한 선이 아니다. 그 사회가 무엇을 공평하다고 믿는지 보여주는 가장 솔직한 장면이다. 오늘 우리가 그 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내일의 기회는 더 넓어질 수도, 더 비싸질 수도 있다. 공정은 늘 불편하지만, 그 불편을 감당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더 큰 대가를 치른다.모두가 바빠진 시대에 기다림을 줄이자는 요구 자체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 해법이 또 다른 불평등을 낳고 있다면, 그 방향과 속도는 다시 점검해야 한다. 공정은 빠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줄서기 알바'라는 불평등을 떠받치는 역할은 경제적 취약 계층이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시간을 사기 위해,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시간을 판다. 그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분 단위가 아니라, 햇볕 아래에서의 체력, 추위 속에서의 인내, 때로는 무례를 감내하는 감정 노동이다. 공정이 거래의 대상이 되는 순간, 기다림은 상품이 되고 사람은 도구가 된다.규칙은 있는가이 지점에서 사회적 공정성과 기회 균등의 원칙이 흔들린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 구조에서는 출발선 자체가 계층별로 달라진다. 놀이기구 탑승이라는 사소한 경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병원 예약, 행정 서비스, 교육 기회, 심지어 취업 과정에서도 '프리미엄 패스'가 붙기 시작하면 공공성은 빠르게 잠식된다.이런 구조가 불평등을 '정상화'되는 사회가 올바른 것인가. 기다림을 돈으로 해결하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사람들은 기다리는 쪽이 아니라 기다리지 않는 쪽을 기준으로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기다리는 사람은 무능하거나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으로 취급된다.이를 무제한적으로 거래 가능하게 만들면, 돈의 많고 적음이 삶의 질과 경험의 폭을 결정하는 핵심 기준이 된다. 사회는 점점 더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 앞서는 사람과 뒤처지는 사람으로 갈라진다. 시간이 이동, 참여, 생존과 직결되는 자원이 되는 SF에서 나오던 디스토피아가 되버리는 것이다.줄서기 알바가 확산하는 사회에 물을 수밖에 없다. 기다림이라는 불편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이들과 그 불편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같은 줄 앞에 서 있지만, 출발선은 이미 다르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다. 과연 기다림은 이제 누구의 몫인가.공정한 사회는 모두를 동일하게 만드는 사회가 아니다. 최소한 같은 규칙 아래에서 경쟁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 구조가 확산할수록, 우리는 같은 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줄에 서 있게 된다.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불평등을 허용할 것인가. 그리고 그 비용은 과연 누가, 얼마나 오래 기다리며 치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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