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자리의 용기와 목소리를 바라보다

입력 2026.07.30. 13:51 김혜진 기자
파리 씨떼레지던시 파견 작가 선정된 정유승
최근 광주비엔날레 재단 공모
10월부터 3개월 프랑스 머물며
도시 외곽 여성 농민 생애와
기후위기 연결짓는 작업 계획
제12회 광주비엔날레 참여하며
개인에서 지역 여성으로 확장
“지역 이야기 계속 담아내고파”
‘집결지의 낮과 밤’, 2018

광주 서구 발산동의 한 레지던스 작업실에 들어서니 ‘예술가의 작업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질적인 것들이 눈에 띈다. 하얀 농업용 비닐이 롤째로 몇 개가 한편에 세워져 있고,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녹슬고 닳은 호미도 있다. 이 물건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컴퓨터와 두 대의 카메라도 눈에 띈다.

소외된 여성의 이야기를 영상과 사진 작업을 중심으로 담아 온 정유승 작가의 작업실이다. 임신과 출산 이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재개했다는 그의 말과 손짓에서는 여유로운 활기가 느껴진다.

◆파리로 확장하는 시각

최근 정유승 작가는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가나문화재단과 공동으로 주관하는 프랑스 파리 씨떼 레지던시 입주 작가 공모에서 파견 작가로 선정됐다. 결혼과 임신, 출산으로 약 3년의 공백 이후 작업을 재개한 터라 그에게 이번 선정 소식은 더욱 반갑다.

1940년대부터 파리의 중심인 마레 지구와 몽마르트를 거점으로 325개의 스튜디오를 보유한 씨떼 레지던시에서는 매년 1천 명 이상의 작가가 창작, 교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각 예술뿐만 아니라 무용,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이 모여든다.

정 작가는 오는 10월부터 약 3개월 동안 프랑스 파리에 머물게 된다.

“작업에 공백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원하면서도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선정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 가장 컸어요. 유럽을 가보지 않았는데 안전한 지역에 있는 레지던스에서 작업할 수 있으니 정말 좋은 기회죠”

그는 이번 파리행에서 적극적으로 교류와 홍보에 임할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유럽 내 부분 합법화된 성매매 집결지와 파리 외곽의 여성 농민들의 삶에 대한 리서치를 가질 계획이다.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여성 농민들의 생애이다. 이번 파견 작가로 선정된 이유에도 이 작업 계획이 큰 몫을 했다.

대도시 외곽 지역 여성 농민들의 생애사와 노동을 기후 위기라는 주제 아래 추적하는 작업으로 농사일은 물론 가사노동, 돌봄을 동시에 해내는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담길 예정이다. 특히 그는 생존을 위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낸 이들의 생애에 주목한다.

“설레는 동시에 긴장도 돼요. 제가 활동하는 지역과 달리 접촉할 수 있는 핫라인이 없기도 하고, 짧은 시간 안에 생애사를 듣기 위해 각각의 농민들과 유대를 쌓고 리서치를 해야 하는 것이 가장 걱정이에요. 방법에 대한 고민은 프랑스로 떠나기 전 계속 해봐야죠.”

‘황금동 여성들’, 2018

◆여성에서 여성으로

2018년 열린 제12회 광주비엔날레는 정유승 작가에게 큰 전환점이 됐다.

광주비엔날레 이전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겪는 상황에 대해 개인적 서사로 접근하며 작업으로 다뤄왔던 그이다. 큰 사건으로부터 시작한 작업이 아닌, 여자라면 으레 겪어왔던 미묘한 상황으로부터 시작된 작업이었다.

개인적 서사를 중심으로 한 그의 평면 회화 작업은 제12회 광주비엔날레 참여 작가가 되며 지역적, 사회적 이야기로 확장됐다. 큐레토리얼팀과 지속적으로 가진 스터디를 기점으로 지역 속 여성의 취약성이 담긴 공간이나 사람들을 찾아 나선 그가 주목하게 된 것은 성매매 집결지였다.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역사에서는 지워진 그들의 흔적과 역사, 경계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이후 그는 한국의 산업화 시대를 떠받친 방직공장의 여성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광주 대표적 방직공장이었던 전남방직·일신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추적한 작업을 선보였다.

2022년 양림골목비엔날레를 통해 그는 지역 여성 농민의 생애에 주목한 작업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즈음 나주 여성 농민 구술사를 우연히 접하게 되며 광주의 여성 농민으로 관심이 확장돼 선보인 작업이었다.

“도심을 벗어나면 밭이 보이고 심긴 작물도 보이지만 이를 키우는 농민은 보기가 어렵죠. 분명 있지만 우리가 이들의 존재를 감각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문득 깨달았어요. 특히 도심에 살고 있는 우리 대부분은 지역 가장자리는 생각하지 못해요. 이 때문에 ‘광주 여성 농민’이라는 말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광주에 농민이 있나?’ 하기도 하잖아요. 농촌 지역의 여성 농민에 비해 지역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나, 더 취약하지 않나 싶어 탐구하게 됐어요.”

이 같은 작업은 같은 해 광주여성가족재단이 기획한 기후 위기 속 젠더 이슈를 들여다보는 전시를 통해 한 걸음 더 동시대 이슈로 나아가게 됐다. 기후 위기와 여성 농민 생애를 연결 지어 보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약 1년 여에 걸쳐 이어진 긴 가뭄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농사에 큰 피해를 입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정 작가는 유례 없는 기후 위기에 여성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 삶의 변화를 인터뷰 영상에 담았다. 이 작업을 하며 작가는 여성 농민을 바라볼 때 가졌던 ‘억척스럽게, 힘든 삶을 일궈왔겠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말한다.

“이 분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다 보니 수동적이기보다, 순응해 살았다기보다 거대한 변화에도 온몸으로 맞서 싸워온 주체적이고 용감한 분들이더라고요.”

‘경계지구062’, ‘광주여성농민 호미’, 2022

◆계속되는 여성, 그리고 지역 이야기

작업 재개와 함께 그는 다시 기후위기와 광주여성농민 작업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작업실과 광주 남구의 원산동 이동마을을 오가고 있는 그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작가에게 찾아온 변화는 벌써부터 여성농민들과의 유대감을 쌓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바로 출산이다.

“이전에는 저를 살짝 멀리하는 분위기였다면 엄마가 된 지금은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에요. ‘아기는 몇 살이냐’ ‘아기는 어떻게 하고 여기 있냐’는 질문을 하시면서 ‘사람’으로 인정해주시는 분위기가 있더라고요.(웃음) 할머님들의 대우도 달라졌지만 저도 많이 변했음을 느껴요. 다른 대상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품이 생겼달까요.”

이전보다 좀 더 수월하게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는 작가는 이번엔 기존에 선보였던 작품에서 더 나아가 다큐멘터리 장편 영화로 만들 계획이다. 지난해에는 광주영화학교에서 영화를 배우기도 했다. 그동안 카메라 구도나 영상미에 아쉬움을 느꼈던 터다.

“그동안 편집 프로그램이며 촬영이며 다 독학해서 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아쉬워 전문적으로 배워보자 싶어서 배우게 됐어요. 2년 정도의 시간을 갖고 사계절을 담아 차분히 만들어 보려고요.”

여성농민들이 쓴 호미를 모으고 있기도 하다. 아무리 기계가 발달해도 호미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이는 이들의 생애가 담긴 상징적 물건이기도 하다. 이들이 오래도록 쥐고 열심히 밭을 일군 흔적은 무뎌지다 못해 크기마저 작아진 녹슨 날과 껍질이 벗겨진 나무 손잡이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것을 버리지도 않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정 작가가 받아와 소중히 ‘모시고’ 있다. 자신의 신체에 맞게 변형된, 이들의 생존하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오브제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작업은 앞으로 10월부터 연말까지 이뤄질 파리 외곽 여성 농민들에 대한 작업과 함께 어우러질 예정이다.

이 작업을 이어가는 동안 작가는 오는 9월, 현재 머물고 있는 지구발전 오라의 레지던시에서 오픈스튜디오를 갖고 이어 같은 달 양림동 포도나무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연다.

“영상 촬영과 편집을 배운 것을 토대로 앞으로도 저는 기후 위기 그리고 광주 여성농민 이야기, 광주의 이야기를 계속 담아내고 싶어요.”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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