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 유리처럼

입력 2026.05.12. 13:48 김혜진 기자
포도나무아트스페이스 30일까지
김홍빈 개인전 '깨지지 않는'
한강 '소년이 온다' 속 유리
깨져도 다시 붙는 물성 주목
스러져도 이어지는 정신 은유
포도나무아트스페이스는 30일까지 김홍빈 개인전 ‘깨지지 않는’을 선보인다. 사진은 김홍빈 작가와 전시 전경.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중략)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 부분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등진 이(김진수),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의 부채감이 담긴 장이다. 그날 이후 많은 유리는 부서졌고 흩어졌다. 그러나 유리는 부서졌을지언정 그 조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양림동의 포도나무아트스페이스는 전시 ‘깨지지 않는’을 통해 유리의 변하지 않는 물성에 주목하고 80년 5월의 광주와 2024~2025년 광장의 기억을 잇는다.

김홍빈 작 ‘5월 16일 분수대 광장’

이번 전시는 독일Art5예술협회의 유재현 기획자가 기획하고 김홍빈 작가가 작업해 이뤄졌다. 포도나무아트스페이스와 유 씨, 김 작가는 2023년과 지난해에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바탕으로 한 작업을 선보인바 있다. 문학적 서사를 빌려 항쟁의 기억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하며 80년 5월 광주를 ‘하나의 사건’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시간으로 마주하게 한다.

지난 전시에서 김 작가는 나경택 당시 옛 전남매일신문 기자가 촬영한 ‘민주대성회’ 대형 사진 위에 블루스크린 천을 덧씌운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푸른 바탕에는 망월동 구묘역의 영정사진 형태를 떠낸 흰 타원들이 별처럼 떠있는데 이는 영정사진조차 없이 목숨을 잃은 많은 이들의 존재를 은유한다.

이번 전시에서 김 작가는 지난 전시에서 선보인 블루스크린 작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들의 희생이 지금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유리’로 표현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유리’는 폭력 속에서 산산이 부서진 뒤에야 비로소 인간의 영혼과 존엄을 드러내는 존재로 그려진다. 전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유리의 물성 자체에 주목한다. 충격으로 깨지더라도 전기가마에서 열을 가하면 액체 형태가 되며 깨진 조각끼리 달라붙는 유리의 물성에 주목,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뤄가는 과정을 은유한다.

김홍빈 작 ‘모임’

유 기획자는 “전시의 제목인 ‘깨지지 않는’은 가장 쉽게 깨질 수 있는 유리의 성질로부터 가져온 역설로 유리는 깨지지만 깨지면서도 계속 이어진다”며 “우리가 서 있는 이 시간 역시 그렇게 이어져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유리의 물성을 활용해 작업한 메인 작품은 설치작업 ‘도청 앞 분수대를 위한 샹들리에’.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분수를 역전시킨 모양이 이 샹들리에이다. 도청 앞 분수대 모양을 한 이 샹들리에의 타원형 유리장식에는 ‘민주대성회’ 사진 속 군중의 모습이 담겼다. 이 샹들리에 맞은편에는 은박담요를 두른 시민 형상을 설치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어지는 연대를 시각화했다.

김홍빈 작 ‘도청 앞 분수대를 위한 샹들리에’

이 작품 뒷편으로는 ‘5월16일 분수대 광장’이 전시됐다. 나 전 기자가 찍은 민주대성회 사진 위로 깨진 유리를 배치함으로서 80년 5월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계엄군의 폭력 앞에 산산이 부서지며 소설 속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음을 이야기한다.

김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유리는 단순히 연약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깨지고 흩어지는 순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다시 이어지며 남아 있는 정신을 의미한다”며 “한국의 민주주의 또한 유리처럼 국가폭력에 의해 깨지더라도 그 고통을 기억하고 서로 연결되며 연대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광주의 5월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전시에서 되짚어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30일까지.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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