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조예·영화 전폭 지원
사전검열 폐지… 창작 자유↑
日대중문화 개방 파격 '성공'
한류열풍 아시아까지 휩쓸어
기초생활보장제 도입 성과
국민연금 확대·의약분업 등
복지정책 역사의 큰 전환점

◆문화·예술을 사랑한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은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판소리에 추임새를 넣을 줄 알았고 꽹과리, 장구, 북도 조금은 칠 줄 알았다. 그는 야당 지도자 시절 바쁜 일정에도 틈이 나면 연극, 뮤지컬, 영화를 보러 갔다. 손숙의 연극을 좋아했고 어느 해 여름 냉방장치도 제대로 가동하지 않는 극장에서 3시간 동안 안숙선 명창의 '수궁가'를 들었다. 그는 차 안에서 서태지의 노래를 자주 듣곤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쓴 책 중에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1997)가 있다. 김대중은 이 책에서 이선희, 이미자, 현미, 김혜자, 최명길, 안성기, 신애라, 차인표, 임권택, 이장호 등 많은 문화예술인에 대한 소감을 피력했는데 대부분 자신이 직접 만나 느낀 것을 토대로 썼다. 김대중 대통령은 코미디언들과도 대화가 잘 통했는데, 이는 그의 풍부한 유머 감각 때문이었다. 김대중이 1992년 정계 은퇴를 한 후 그의 사무실에는 공연과 전시 초대권이 수북이 쌓였다. 그가 영화, 연극 등을 즐긴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문화·예술을 이해하고 또 문화예술인들과 가까이 지낸 대표적 정치인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 중 문화 부문 예산을 사상 처음으로 전체 예산의 1%가 되도록 했다. 그의 대통령 재임 시기가 IMF 위기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때 파격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최측근인 박지원을 1999년 5월부터 2000년 9월까지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를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한 것도 문화정책에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적극적으로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문화정책 기조를 압축적으로 설명해 주는 말이다.
영화계의 경우 영화진흥위원회를 설립하고 영화 지원 사업을 본격화했다. IMF 때 미국은 한미투자협정 협상에서 스크린쿼터제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김 대통령은 스크린쿼터제를 지켜냈다. 그는 또 1천500억 원의 영화 진흥기금을 조성하는 등 영화산업 진흥에 많은 지원을 했다. 영화 사전 검열제를 폐지해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신장시켰다.
김대중 정부의 문화정책은 문화 전반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김대중 정부 때 만들어진 영화로서 많은 관람객을 모은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등은 우리의 이념과 현실을 가감 없이 녹여낸 작품으로서 검열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2년 5월에는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취임 초기에 25.1%에서 2002년 임기 말에는 50% 내외로 올라갔다. 영화인들은 영화산업에 기여한 공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대통령 퇴임 후인 2003년 김대중을 제11회 '춘사 나운규 예술 영화제'의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0월 일본 방문 시점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처를 하려 했다. 참모들이 우려했다.
"대통령님,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할 경우 일본의 저질 문화 등이 들어와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야당 등 일부에서는 반일감정과 결부하여 대통령님을 비난할 것입니다."
"나도 모험이란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지만, 흡수되지 않고 중국 문화에 우리의 독창성을 보태 지금과 같은 높은 수준의 우리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는 대성공이었다. 우려했던 것과 정반대로 일본에 한류열풍이 불었다.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 조치는 김대중 대통령이 평소 한국 문화에 대해 가졌던 자신감의 반영이었다. 한류는 일본 안방만이 아니라 아시아를 휩쓸었다.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 국가들의 안방을 점령했다. 한국의 아이돌이 아시아 청소년들의 우상이 됐다.

◆복지국가의 토대를 다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널리 알려진 '비버리지 보고서'는 1942년에 나왔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은 사회보장 제도의 확립을 국가의 핵심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1990년대까지도 복지정책 확대론자들을 좌파주의자라 매도하고 심지어는 북한의 노선을 추종하는 위험인물로 분류해 비난과 탄압의 대상으로 삼기까지 했다.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선 나라치고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IMF 경제위기로 열악한 복지환경이 더욱 악화하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복지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 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된 2000년부터 그가 준비한 복지정책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0년 1월 4일 신년사에서 '생산적 복지'에 대해 언급했다. 생산적 복지의 3대 방향으로 국민기초생활 보장, 일을 통한 복지 구현, 삶의 질 향상 기반 구축 등을 제시했다. 복지를 자선이 아니라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는 IMF 체제 이후 우리의 선택은 시장 경제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함과 동시에 생산적 복지는 시장 경제의 부작용과 폐해를 바로잡고 보완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생산적 복지정책은 2000년 10월부터 실시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시행으로 윤곽을 드러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근로 능력과 관계없이 최저생계비 이하 저소득층의 기초 생활을 국가가 보장하는 제도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최저 생활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를 법률에 규정했다. 지난 40년간 시혜적 단순 보호 차원의 생활보호에서 벗어나 복지가 국민의 권리이며 국가의 의무임을 명확히 밝혔다. 일부 보수층에서 이 제도를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비판했지만, 김 대통령은 밀고 나갔고 큰 성과를 낳았다. 생계 급여 수급자는 1997년 37만 명에서 2002년에는 155만 명으로 증가했다.
4대 보험의 대상자도 많이 증가했다. 김대중 정부는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의 적용대상을 1인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해 모든 국민이 실업과 산업재해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했다. 국민연금의 적용대상은 도시 지역 주민에까지 확대했다. 국민연금제도 도입 11년 만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 중 중학교 의무교육의 확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동안은 도서 벽지 일부 학교에서만 실시했지만 2002년부터 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로써 국가 의무 교육기관이 6년에서 9년으로 늘었다.

김대중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고 또 가장 많은 사회 갈등을 일으켰던 정책으로는 의약분업 정책이 있다. 의약분업은 말 그대로 의사는 진단과 처방을, 약사는 조제와 투약을 전담하는 것을 말한다. 2000년 의약분업을 시행하려고 하자 의료계가 강력히 반발했다. 2000년 6월 20일 의료계는 전국적으로 폐업을 단행했다. 의약분업 문제가 국가적 사안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의약분업 시행 후 항생제의 사용이 크게 줄어드는 등 효과가 컸다.
김대중 정부 때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 도입, 국민연금 대상 확대, 건강보험 통합, 의약분업 실시 등은 우리나라 복지정책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복지정책의 확대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필수적 코스였고 우리 경제는 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복지정책 확대의 길은 예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복지부 장관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다. 좋은 일을 시행했지만, 국민연금, 건강보험 통합, 의약분업 실시 과정에서 정부가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대중의 복지정책은 한국 복지국가의 태동을 알리는 사건이지 완성은 될 수 없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선진국가에 진입했지만, 복지수준은 아직도 기대치에 못 미친다. 다행인 것은 후임 정부들이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마다 미루지 않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시대에 부여된 과제, 즉 민주주의의 공고화, 한반도 평화와 통일, 정보통신 산업의 진흥 외에 문화·복지국가의 초석을 다져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을 선진국가로 발돋움하게 한 주인공이다. 자랑스러운 대통령이다.
최영태 전남대 명예교수·한반도 미래연구원장
최영태 교수는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전남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전남대에서 5.18연구소장, 교무처장, 인문대학장을 지냈다.
시민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해 광주흥사단과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광주도시철도 2호선공론화위원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독일통일의 3단계 전개과정',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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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소고기 수입 논란 증폭되나···"수입계획 철회해야"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이하 연맹)은 16일 오후 전남도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미국산 농산물 수입 확대 계획 철회를 촉구했다. 정부가 대(對)미 관세 협상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규제 완화, 농식품 수입 등을 고려하면서 전남지역 농·축산 농가들이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다만 정부는 농심이 들끓자 "아직 결정된 사항은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이하 연맹)은 16일 오후 전남도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미국산 농산물 수입 확대 계획 철회를 촉구했다.연맹은 "이재명 정부는 미국산 농산물 수입 확대 계획을 즉각 중단하라"며 "최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 있어 농산물 개방 압력에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은 사실상 농산물 시장 개방을 시사한 선언"이라며 우려했다.이어 "미국산 쌀과 쇠고기, GMO 농산물 수입이 대폭 확대될 경우 국내 농업 기반은 물론 국민 건강과 식량주권까지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될 것이라"며 "TRQ(저율관세할당물량) 수입량이 이미 늘어난 상황에서 미국산 쌀 4만 톤 추가 도입은 쌀값 하락과 농가 붕괴로 직결된다"고 강조했다.이들은 "이재명 대통령이 송미령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 자체가 농민을 버린 결정"이라며 "송 본부장의 구속과 통상 정책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이어 "호남 민심은 이미 이재명 정부와 멀어지기 시작했다"며 "쌀값이 무너지면 농업 전체가 무너진다. 농업을 지키는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또 연맹은 오는 18일 광주 518민주광장에서 대규모 규탄 집회를 예고하며 지역 농민단체들과 연대한 연대투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앞서 지난 14일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농산물의 경우 우리가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며 "민감하고 지켜야 할 부분이 있는 만큼 지킬 것은 지키되 협상 전체의 틀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언급했다.미국은 관세협상을 위해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유전자변형작물(LMO) 감자, 미국산 사과·쌀 수입개방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정부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는 입장이다.농림축산식품부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대미 관세협상 타결과 관련해 "정부 차원에서 결정된 사항은 없다"며 "농식품부는 우리 농업의 민감성을 최대한 반영하고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신중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농식품부는 공식적으로는 수입 확대를 반대하고 있지만 산업부와의 관련 협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산업부 역시 전날 입장을 내고 "농축산물 개방과 관련해 정부가 결정한 바 없다"면서도 "쌀과 소고기 등 농축산물의 민감성을 감안해 관게부처와 긴밀히 협의하며 신중히 대응 중"이라고 밝혔다.한편, 한국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사태 이후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금지해왔다. 30개월령 이상 소에서 광우병을 유발하는 물질이 검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지면서 당시 거센 국민적 반발이 있었다. 농식품부는 이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미국산 사과의 경우도, 미국이 사과 수입을 위한 위험분석을 신청한 1993년 이후 32년째 정부는 8단계 중 2단계 이후 검역 절차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이정민기자 ljm7da@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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