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대북 실용주의적 관점
한미관계 역사상 최고 돈독
중국·일본 설득 지지 끌어내
'4대국 안전보장론' 현실화
일관된 삶 남북화해에 헌신
대통령 덕목 최고 외교 역량
2024연중기획 탄생100년 DJ를 그리다-⑥외교를 아는 대통령 DJ
1945년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렸다. 해방의 기쁨이 크기는 했지만 천 년 이상 강력한 중앙집권적 단일 국가를 유지해왔던 조선 민족에게 남북 분단은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번 나뉜 국가를 다시 통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많은 시간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해방 후 정치인 중에서 여운형의 좌우 합작 운동을 지지했고 서재필의 실사구시 정신을 흠모했다. 특히 그는 김구를 흠모했다. 그는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해방 후 남북 단일 국가 노선을 추구한 김구가 남쪽과 북쪽 민중들에게 가장 신뢰를 많이 받았던 인물이라고 평했다.
김대중은 1963년 제6대 국회에 진출했다. 6대 국회에서 큰 이슈로 떠오른 주제는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였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이었다. 소련·중국·북한의 3각 동맹에 맞서 미국·일본·남한 3각 동맹을 구축하려 한 미국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촉구했다. 1964년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본격화되었고, 1965년에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한일 간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대학생들과 야당은 1964년 한일회담 시작 때부터 굴욕 회담이라고 비난하며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 나섰다. 정부가 1964년과 1965년에 각각 계엄령과 대학 휴교령, 위수령을 내려야 할 만큼 반대 운동은 격렬했다.
정치권에서는 제일 야당인 민정당의 윤보선 총재가 한일회담 반대 운동의 선두에 섰다. 윤보선은 박정희 정부가 불과 3억 달러에 과거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면제해주고 '이승만 라인'을 팔아넘기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대중과 그가 소속한 민주당 총재 박순천의 생각은 달랐다. 김대중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제 대국으로서 일본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련·중국·북한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까지 잠재적 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국교 정상화에 대한 조건 없는 비판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에 대한 사과와 독도 문제의 해결 등 구체적 사안을 가지고 협상력을 높이는 방향에서 비판을 제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사안은 외교 문제에 대한 김대중의 생각과 태도가 매우 실용주의적임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남북문제와 경제문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다. 김대중은 남북문제를 논할 때 서독의 외교정책을 자주 거론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서독이 동서독 화해정책을 추진하고 동유럽 공산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예로 들면서 우리나라도 북한과 대화를 하고 유고슬라비아처럼 비록 공산국가지만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한 국가와는 외교 관계를 맺는 등 외교정책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1971년 제일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박정희와 경쟁했다. 이때 김대중이 내건 주요 공약 중 하나가 4대국(미·일·중·소) 안전보장론이었다. 4대국 안전보장론은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국에 남과 북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를 통해 남북한 평화 공존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4대국 안전보장론은 남북문제는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 평화라는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김대중이 평화통일론을 제창한 1971년 당시는 '통일'이라는 단어만 사용해도 경우에 따라 '빨갱이'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반도 주변이 미·일·남한과 중·소·북한으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대중의 4대국 안전보장론은 많은 사람에게 신선함과 충격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2월에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가 오랫동안 구상하고 다듬었던 4강 외교를 현실화할 기회가 다가왔다. 김대중은 1998년 6월 초 미국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평소 미국이 1945년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데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미관계의 특별한 관계를 존중했고,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도 신봉했다.
김대중의 미국 방문의 주목적은 IMF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적 지원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햇볕정책 지지 획득이었다. 김대중은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클린턴은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때 영변 핵발전소 지역을 폭격하려 했던 인물이다. 김대중은 클린턴에게 햇볕정책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그 근거를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찾았다.
그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 등 공산권과 대결정책을 펼친 결과와 1970년대 중반 이후 데탕트 정책을 펼친 결과를 비교했다. 중국에 대해서도 봉쇄정책을 펼친 결과와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교류 협력정책을 펼친 결과를 인용했다. 두 가지 사례 모두 대결이나 봉쇄정책이 아닌 데탕트 정책이 미국에 더 이득을 안겨주었다고 말했다. 베트남도 전쟁으로는 이기지 못했지만, 교류 협력정책을 통해 친미 국가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클린턴은 김대중의 이야기를 들은 후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이 말은 대북 정책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외교정책에 많은 영향력을 갖고 있던 미국 의회도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김대중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명성과 권위, 평화와 통일에 향한 진정성, 그리고 그의 장기인 설득력이 대미 외교에서 큰 빛을 발휘했다. 김대중과 클린턴 재임 기간의 한미관계는 역사상 최상의 돈독한 관계였다.
클린턴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부시는 대북 강경론자였다. 그가 2002년 2월 한국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표현한 것처럼 "젖 먹던 힘을 다해" 부시를 설득했고, 마침내 그에게서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는 말을 끌어냈다. 남북화해와 통일을 향한 그의 노력과 헌신은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1998년 11월 김대중이 국빈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장쩌민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고 한중관계 및 남북관계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장쩌민은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은 올바른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한반도의 평화 안정이 중국의 기본 입장입니다." 장쩌민의 말은 곧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그대로 옮겨놓은 말이었다.
김대중은 1998년 10월 7일,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 그는 일본 방문에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햇볕정책에 관해 설명했고, 오부치 총리로부터 지지를 끌어냈다. 오부치 총리는 과거사에 대해 사죄했고 김 대통령은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을 채택하고 동아시아의 발전에 이바지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두 사람은 정상회담에서 '21세기 한일 파트너십'이라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 중에는 대북공조, 청소년 교류 확대 등이 포함되었다. 한일관계는 김대중 정부 시절 가장 좋았고 건설적이었다는 게 외교 전문가들과 정치권의 공통된 견해이다.
김대중은 1999년 5월 말에 러시아를 방문하여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끌어냈다. 두 나라는 공동성명에서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항구적 평화를 구축하려는 한국 정부의 노력을 긍정 평가하고 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공고하게 할 남북한 간의 접촉과 생산적 대화를 촉진하려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에 지지를 표명한다"라고 밝혔다.
김대중은 이렇게 취임 후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를 차례로 방문하여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고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끌어냈다. 그의 4강 외교는 그가 28년 전인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내세웠던 '한반도 4대국 안전보장론'을 현실화시켜나간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일관된 삶은 외교정책에서도 똑같이 드러났다.
김대중은 대통령 재임 중 동아시아 공동체 구성을 주장했고 일부 내용은 실제로 구체화하였다. 그가 제안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EU와 성격이 같다. 다만 그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성공을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에서의 북핵 문제해결과 지역적 협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동방정책을 통해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전 서독 총리가 독일 문제의 해법으로 유럽공동체 건설 혹은 유럽 연방국가 건설을 제안한 것을 상기하게 한다.
해방 후 13명의 대통령이 배출되었다. 이 중 외교적 식견을 갖고 대통령에 취임한 사람은 외교를 통해 독립을 추구한 이승만과 직업 외교관 출신인 최규하를 제외하면 김대중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이 분단되고 4강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의 특성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덕목으로 외교적 역량이 더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의 외교 역량을 말로만 높이 평가하지 말고 실제로 그의 외교 노선과 역량을 본받으려는 정치인이 많이 나오기 바란다.
최영태 전남대 명예교수·한반도 미래연구원장
최영태 교수는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전남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전남대에서 5.18연구소장, 교무처장, 인문대학장을 지냈다.
시민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해 광주흥사단과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광주도시철도 2호선공론화위원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독일통일의 3단계 전개과정',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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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소고기 수입 논란 증폭되나···"수입계획 철회해야"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이하 연맹)은 16일 오후 전남도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미국산 농산물 수입 확대 계획 철회를 촉구했다. 정부가 대(對)미 관세 협상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규제 완화, 농식품 수입 등을 고려하면서 전남지역 농·축산 농가들이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다만 정부는 농심이 들끓자 "아직 결정된 사항은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이하 연맹)은 16일 오후 전남도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미국산 농산물 수입 확대 계획 철회를 촉구했다.연맹은 "이재명 정부는 미국산 농산물 수입 확대 계획을 즉각 중단하라"며 "최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 있어 농산물 개방 압력에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은 사실상 농산물 시장 개방을 시사한 선언"이라며 우려했다.이어 "미국산 쌀과 쇠고기, GMO 농산물 수입이 대폭 확대될 경우 국내 농업 기반은 물론 국민 건강과 식량주권까지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될 것이라"며 "TRQ(저율관세할당물량) 수입량이 이미 늘어난 상황에서 미국산 쌀 4만 톤 추가 도입은 쌀값 하락과 농가 붕괴로 직결된다"고 강조했다.이들은 "이재명 대통령이 송미령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 자체가 농민을 버린 결정"이라며 "송 본부장의 구속과 통상 정책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이어 "호남 민심은 이미 이재명 정부와 멀어지기 시작했다"며 "쌀값이 무너지면 농업 전체가 무너진다. 농업을 지키는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또 연맹은 오는 18일 광주 518민주광장에서 대규모 규탄 집회를 예고하며 지역 농민단체들과 연대한 연대투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앞서 지난 14일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농산물의 경우 우리가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며 "민감하고 지켜야 할 부분이 있는 만큼 지킬 것은 지키되 협상 전체의 틀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언급했다.미국은 관세협상을 위해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유전자변형작물(LMO) 감자, 미국산 사과·쌀 수입개방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정부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는 입장이다.농림축산식품부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대미 관세협상 타결과 관련해 "정부 차원에서 결정된 사항은 없다"며 "농식품부는 우리 농업의 민감성을 최대한 반영하고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신중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농식품부는 공식적으로는 수입 확대를 반대하고 있지만 산업부와의 관련 협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산업부 역시 전날 입장을 내고 "농축산물 개방과 관련해 정부가 결정한 바 없다"면서도 "쌀과 소고기 등 농축산물의 민감성을 감안해 관게부처와 긴밀히 협의하며 신중히 대응 중"이라고 밝혔다.한편, 한국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사태 이후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금지해왔다. 30개월령 이상 소에서 광우병을 유발하는 물질이 검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지면서 당시 거센 국민적 반발이 있었다. 농식품부는 이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미국산 사과의 경우도, 미국이 사과 수입을 위한 위험분석을 신청한 1993년 이후 32년째 정부는 8단계 중 2단계 이후 검역 절차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이정민기자 ljm7da@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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