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왜곡 끊어내고··· 냉철한 역사적 평가를

입력 2024.05.13. 13:52 이윤주 기자
DJ, 5월17일 계엄군에 체포
50일만 진압 소식 듣고 혼절
신군부, 선동·내란음모 조작
사형선고로 벼랑끝 내몰려
6월항쟁으로 정치 활동 재개
국가기념일·국립묘지 승격
대통령 집권 명예회복 앞장
5·18 관계 객관적 조명 절실

2024연중기획 탄생100년 DJ를 그리다-⑤김대중과 5·18

◆5·18 발발과 확산 배경으로서 김대중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김대중으로 칭함)이 1980년 계엄군에 의해 체포된 것은 5월 17일 저녁 10시 무렵이었다. 그러나 5월 18일 오전 일찍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한 학생 대부분은 김대중이 체포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시위대가 '김대중 석방하라!'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것은 18일 정오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계엄사령부가 김대중 등 정치인과 민주인사들의 체포를 공식 발표한 것은 18일 오후였지만, 그 전에 김대중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광주시민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18일 오후 이후 항쟁 기간 내내 광주시민이 외친 구호 속에는 '김대중 석방하라!'라는 구호가 빠짐없이 등장했다. 항쟁 기간에 발표된 유인물에도 김대중의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이 많이 담겨있었다. 목포 등 전남 일원에서 개최된 집회와 유인물에도 '김대중 석방하라!'라는 구호는 꼭 들어가는 내용 중 하나였다.

광주시민 등 호남인들은 오랫동안 박정희 정권의 호남 차별에 대해 분개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가 피살되자 호남인들은 당연히 민주체제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했다. 호남인들은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 군부독재 체제하에서 겪었던 지역 차별도 시정이나 완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1980년 호남인들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면 김대중의 집권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김대중이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의 강력한 경쟁자였고, 유신체제 아래에서 탄압을 많이 받았으며, 민주진영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점을 상기했다. 호남인들에게 김대중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동향인으로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소외를 해소해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로 각인됐다.

그런데 전두환과 신군부가 5월 17일 저녁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등 민주인사들을 체포했다. 호남인들은 김대중의 체포와 함께 민주정권의 도래는 물론이요 호남인들에게 가해졌던 차별과 불이익의 개선 기회 역시 사라져버렸다고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계엄군들이 광주시민들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잔인무도한 진압행위를 벌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호남인들의 실망과 분노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는 자기의 가치와 명예의 위반에 대한 반응이며,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뿐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이, 주변 사람들, 이웃들에게 일어난 일에도 반응하는 감정이고, 불의에 대한 느낌과 인식에 근원을 둔다고 말했다. 5월 18일 호남인들이 느낀 분노는 민주주의의 무산에 대한 분노, 자신들의 생존권이 위협받은 데 대한 분노, 자신들의 지도자이자 희망인 김대중의 체포에 대한 분노 등 복합적이었다.

내란음모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5·18과 동시에 진행된 김대중의 수난

김대중이 광주에서 항쟁이 발생하고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체포된 지 50여 일이 지난 7월 10일이었다. 그날 신군부의 실력자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장 이학봉 대령이 김대중을 회유하기 위해 감옥을 찾아왔고, 수사관은 '광주사태'를 보도한 신문을 보여주었다. 김대중은 신문에서 광주시민들이 계엄령 해제와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 숫자가 100명을 넘었다는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식에서 깨어난 김대중은 죽고 싶었다. 항쟁이 발생한 원인과 배경은 다양했지만, 김대중에게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자신과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당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며 통곡했다.

한편 계엄사는 김대중이 체포된 지 14일이 지난 5월 31일 '광주사태의 경과와 발생원인'이라는 발표문에서 '광주사태'를 김대중의 선동 때문에 발생한 사건으로 단정지었다. 계엄사는 이런 발표를 하기 위해 이미 5·18 직후부터 체포되어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연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초기 학생수습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창길, 도청 함락 당시 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종배, 여성운동 지도자인 조아라, 1960년대 중반에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던 정동년 등 많은 사람이 수사를 받을 때 김대중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추궁당했다.

신군부는 최종적으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발표했다. 신군부는 여기에 김대중이 일본 망명 중 결성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해 국가보안법까지 적용했다. 김대중은 내란음모사건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장남을 포함해 그의 동지들도 중형을 선고받았다. 신군부는 김대중과 '광주사태'를 연결하기 위해 1960년대에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던 정동년을 중간 매개자로 설정해 그에게도 사형선고를 내렸다.

신군부의 이런 행위들은 모두 김대중과 5·18을 연결함으로써 5·18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희석하고 그들이 광주에서 저지른 학살행위를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또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5·18과 김대중을 연결하면 김대중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자해지 차원 진실규명·명예회복

1987년 6월항쟁에서 민주 세력이 승리한 후 김대중은 자유의 몸이 됐고,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김영삼과의 단일화에 실패했고, 정권은 다시 군부 세력인 민정당의 노태우에게로 넘어갔다. 김대중은 국민들로부터 단일화 실패에 대해 혹독한 책임 추궁을 당했다.

대통령 선거 다음 해인 1988년 4월에 제13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실시됐다.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제1야당이 되면서 김대중은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국회 의석수가 여당 125석, 야당 174석으로 나타났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제1야당 총재 김대중은 16년 만에 국회의원 자격으로 정국을 이끌었다.

국회에 부과된 우선적인 과제는 전두환 정권의 실정을 규명하고 광주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었다. 국회 5공 특위 청문회와 광주특위 청문회가 각각 열렸다.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들이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전 국민에게 생생하게 전달됐다. 국민들이 경악했고 분노가 폭발했다. 전두환이 국회 청문회에 소환됐고 "살인마 전두환"이라는 국회의원들의 외침이 여과 없이 국민들에게 전달됐다.

한편 국가기구로 설립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규정했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법도 제정됐다. 이렇게 5·18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시작하고, 광주 문제의 해결 방향이 잡히면서 김대중의 어깨를 짓눌렀던 부담감도 조금씩 완화됐다.

김영삼 정부 시절 광주학살의 중심인물이자 전직 대통령들인 전두환·노태우 등이 중형을 선고받아 책임자 처벌도 어느 정도 이행됐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고, 망월동 희생자의 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시켰다. 또 항쟁의 희생자는 민주화 유공자로 규정했다. 5·18의 발발 및 확산과 깊은 관련이 있고, 5·18로 인해 사형선고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은 김대중은 야당 지도자와 대통령 자격으로 5·18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이바지함으로써 결자해지라는 기적적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드는 주인공이 됐다.

지금까지 5·18을 소재로 한 연구서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연구물 중 김대중과 5·18의 관계를 직접 연결해 다룬 경우는 거의 없다.

김대중은 5·18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5·18을 정치인 김대중과 연결했을 경우 김대중의 사주론을 내세운 신군부의 음모에 말려드는 것과 같은 부정적 현상을 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김대중을 5·18과 연결할 경우 5·18의 순수성이 훼손될 수 있다거나, 5·18에서 큰 역할을 한 민중들의 역할이 폄하될 수 있다는 우려, 혹은 영웅주의 사관에 대한 경계 등도 5·18 연구에서 김대중을 외면하게 만든 배경 중 하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최경환 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중은 진보적 인사와 학자들의 이런 태도에 서운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5·18이 발생하게 된 주요 원인과 배경 중에 신군부가 자신을 체포한 것도 포함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마항쟁과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이 연결되듯, 5·18과 자신의 체포도 직접적 연결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5·18 연구에서 특정인에 대한 강조로 인해 5·18에 참여한 주체들에 대한 경시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실제 존재했던 사실까지 눈감는 것 역시 바른 자세는 아니다. 5·18이 발생한지 45년이 됐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5년이 됐다. 김대중과 5·18의 관계는 객관적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조명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본다.

최영태 전남대 명예교수·한반도 미래연구원장


최영태 교수는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전남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전남대에서 5.18연구소장, 교무처장, 인문대학장을 지냈다.

시민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해 광주흥사단과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광주도시철도 2호선공론화위원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독일통일의 3단계 전개과정',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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