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20. 김응문

지난 2022년 4월 28일, 무안에서 한 구의 유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한 김응문의 유해였다. 문헌 속 이름으로만 남아 있던 인물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후손과 연결될 수 있었다. 동학농민군의 유해 가운데 과학적 분석으로 신원이 확인된 최초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사례였다.
김응문은 1894년 고막포 전투 등에 참여했다가 그해 12월 9일 체포됐다. 당시 호남초토영에서 중앙에 보고한 문서에는 그의 이름과 체포 날짜, 신문을 받은 뒤 사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008년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김응문이 참여자로 등록되고, 후손 54명도 유족으로 인정받았다. 128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유해가 후손을 만나면서 기록과 기억 속에 머물던 한 사람의 삶이 비로소 역사적 실체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김응문의 유해가 던지는 질문은 한 사람의 죽음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흔히 떠올리는 가난한 농민 출신의 동학군 지도자만은 아니었다. 무안 몽탄의 차뫼마을에 살던 나주김씨 가문의 유학자였으며, 그 집안은 학문과 충절을 중시해 왔다. 김응문의 동생은 무안향교의 최고 책임자인 재장을 맡았고, 또 다른 동생은 노사 기정진의 학맥을 이은 기우만과 교유했다.
그렇다면 유교적 질서를 지키고 동학의 확산을 경계했을 법한 유학자 집안이 왜 동학농민군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무안에서 동학의 교세가 확산된 것은 1890년대 초였다. 1892년 삼례집회에 이어 1893년 보은집회에는 무안 동학교도 80여 명이 참여했다. 이듬해 백산대회에 참가한 각 지역 지도자를 기록한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배규인·배규찬·송관호·박기운·정경택 등과 함께 김응문의 이름이 나온다. 무안 출신 장령급 지도자만 15명에 이르렀다. 무안이 전라도 서남부 동학운동의 주요 근거지였음을 보여준다.
김응문은 동학농민전쟁 초기부터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이 처음부터 모두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향교의 재장은 유교적 향촌질서를 대표하는 자리였다. 인근 나주에서는 향약을 조직하여 동학의 확산을 막으려 했으므로, 무안향교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응문 일가 안에서도 처음에는 동학을 둘러싼 생각이 같지 않았을 수 있다.
실제로 제1차 봉기 당시만 해도 동학농민군과 유생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었다. 손화중은 “사족으로 명망이 높은 사람도 따르지 않고, 부자도 따르지 않으며, 글 잘하는 선비도 따르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동학농민군은 각 고을의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사들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성리학을 정학으로 여긴 위정척사계 유생들에게 동학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이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이었다. 1894년 6월 21일, 양력으로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고종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게 됐다. 이어 친일 정권을 세우고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때부터 동학농민군의 투쟁 목표도 반봉건 투쟁에서 국권 수호를 위한 항일투쟁으로 달라졌다. 무안 출신의 전직 고위 관료 옥경련 역시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일본군을 끌어들인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고 군사를 길러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 뒤 무안으로 내려왔다. 이후 고향 사창과 무안향교 일대를 오가며 지역 유생들에게 구국운동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동학의 확산을 경계하며 배척하던 유학자들에게도 일본군의 국권 침탈은 외면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였다. 동학농민군과 위정척사계열 유생이 ‘척왜’와 ‘보국’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만날 수 있었던 이유다.
김응문의 형제들도 이 무렵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차뫼마을의 김응문 집을 중심으로 병기를 만들고 군자금을 모았으며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마을 대밭 뒤편에는 대장간을 설치해 무기를 만들었다. 고인돌 주변에는 총과 화살을 숨기고, 인근 집에는 엽전과 화살촉·창·칼·탄환 등을 비축했다. 무안 집강소가 있던 청천리의 화약제조소와도 협력해 나갔다.
1894년 가을, 무안 동학농민군은 대접주 배상옥의 지휘 아래 재봉기했다. 무안과 함평을 비롯한 서남해안의 농민군은 오늘날 초당대학교 일대로 전해지는 동학골에 모인 뒤 고막포와 고막원으로 진출했다. 진도와 여러 섬에서도 농민군이 합류했다. 『금성정의록』은 이 일대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을 5만∼6만 명으로 기록했다. 고막포 전투는 무안·함평·나주와 서남해안 농민군이 결집한 대규모 항전이었다.
11월 18일 동학농민군은 나주 수성군과 장등 일대에서 격돌했다. 그러나 대포와 천보총으로 무장한 수성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퇴각하던 농민군은 밀물이 들어온 고막포에서 강을 건너지 못해 큰 희생을 입었다. 이후에도 서창의 창고를 공격해 세곡을 거두어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며 저항했지만, 11월 21일 다시 공격을 받고 흩어졌다.
김응문은 고막포 전투 후 함평 엄다리에 있는 며느리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밀고로 붙잡혔다. 관변 기록인 「전라도 각 읍에서 붙잡은 동도의 수효와 노획물을 함께 기록한 성책」에는 “거괴 김응문·김자문·정여삼·김여정·장용진·조덕근은 신문을 겪은 후 죽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김자문은 김응문의 동생이고, 김여정은 김응문의 아들이었다. 부자와 형제가 함께 붙잡혀 혹독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2월 12일 선봉진이 무안현에 보낸 감결에는 김응문의 동생 김효문을 비롯한 10명을 체포하라는 지시가 나온다. 또 다른 동생 김윤문도 제2차 봉기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은 끝에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차뫼마을의 김성권과 김용길 등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김응문 한 사람의 유해가 아니라, 한 집안과 한 마을의 희생이 함께 기억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김응문 일가의 이야기는 동학농민전쟁을 단지 농민만의 전쟁으로 이해해서는 그 전체 모습을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하고 국권을 위협하자 유학자와 향촌 지식인, 평민과 농민이 신분과 사상의 차이를 넘어 항일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모두가 동학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대의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무안의 나주 김씨 김응문 일가뿐 아니라 청계의 달성 배씨, 해제의 해주 최씨 등 무안의 대표적 유생들도 제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다. 이들의 참전은 임진왜란 때의 향토방어와 의병활동을 계승하는 한편, 뒤이어 일어난 1896년과 1907년 호남의병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동학농민전쟁과 항일의병전쟁을 서로 단절된 역사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202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그 가치와 중요성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기록이 세계의 유산이 됐다고 해서 역사의 빈틈까지 저절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무안에서 확인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80여 명에 이르지만, 아직 이름과 행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적지 않다.
128년 만에 후손을 찾은 김응문의 유해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날 누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는가. 김응문 일가가 지키고자 한 것은 특정 신분이나 학파의 이익이 아니었다. 일본군에게 짓밟힌 나라와 자신들이 살아온 공동체였다. 그 앞에서 유학자와 농민, 양반과 평민의 경계는 무너졌다. 김응문 일가의 삶과 죽음은 동학농민전쟁이 새로운 세상을 향한 민중혁명이면서 동시에 국권을 지키기 위해 신분과 계층을 초월해 일어선 항일전쟁이었음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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