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를 몰아내고 국권을 지키려 일어난 영호도회소와 김인배

입력 2026.06.29. 17:13 차솔빈 기자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11. 영호도회소와 김인배
광양 다압 섬진나루, 영호도회소 농민군이 서부 경남으로 진군한 곳. 광양시청 제공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부터 비롯된 제2차 동학농민전쟁은,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싸운 전면전이었다. 때로는 정부군과 싸우기도 했지만, 정부군의 실질적인 지휘는 일본군이 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이야기할 때 전봉준, 김개남 등의 활동을 주목하지만, 실제는 무장의 손화중, 무안의 배상옥이 이끄는 농민군 세력이 이들보다 최소 2~5배 정도로 규모가 컸고, 나주의 오권선, 장흥의 이사명·이방언도 전봉준 못지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더구나 순천 지역을 근거로 김인배가 결성한 ‘영호도회소’는 제2차 동학농민전쟁 때 결성된 최초의 전투부대로, 일본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2차 전쟁의 주무대는 전남지역이었다.

2차 전쟁에 나선 동학농민군들은, 스스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의병이라 불렀다. 이들의 목숨을 건 항전은, 국권 피탈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데 있었다.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항전이 한말 의병전쟁, 일제강점기 빛나는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동학 의병의 활동을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아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2차 동학 농민전쟁을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보는 것에 의외로 과거의 기득권적 사고에 젖어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제2차 동학농민전쟁 진압군이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 하여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 곳곳에 동학농민군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선양되고, 또 그들이 독립유공자로 추앙되고 있다. 마치 5·18 진압군이 국가 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

1894년 4월 23일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경군대장 이학승이 대패하고 4월 27일 전주성이 함락되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에 4월 30일 借兵(차병) 문서를 발송했다. 그러자 일본은 청에 텐진조약 제5조를, 조선에 제물포조약 3조의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파병을 통보했다. 5월 2일 일본군은 5사단 11, 21연대를 중심으로 혼성여단을 편성했다. 그리고 5월 7일 오토리 공사가 이끄는 혼성여단이 인천항에 상륙한 것을 필두로, 일본군이 계속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다. 일본이 대규모 병력 파병은 거류민 보호 명분이 거짓이었음을 말해 준다.

한편 부산 거주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일본은 7월 30일 부산에 수비대를 파병했다. 이 부대의 주 임무는 경상도 일대에서 일본군 병참 시설을 공격하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수비대는 곧 전투 경험이 풍부한 후비보병 부대로 8월 30일 교체됐다. 전남을 비롯 경남 서부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에 대한 대응이 이뤄진 것이다. 부산 수비대에는, 150명의 수비대 병력 외에 2척의 일본 함정과 330명의 육전대 병력이 배속돼 있었다.

제2차 동학농민군 봉기의 중심에 영호도회소가 있었다. 영호도회소는 1894년 6월 전북 금구 출신 김인배가 순천 지역에 내려와 결성한 전투부대다. 김인배는 1870년 6월 10일 당시 금구 봉서마을, 현 전북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용배(龍培)이며, 본관은 김해, 안경공파 71세손이라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쾌활했고, 신동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는 문장도 뛰어나고 말도 잘해 다른 아이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기골이 장대해 장차 장군감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김인배는 후손이 끊긴 종백부 김현모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그의 집안은 100여 석을 수확하고 상당수 머슴을 거느리는 부농이었다.

김인배는 그가 1891년 5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금구 김덕명의 집에서 포덕 행사를 할 때 입도했다. 김인배는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봉기하였던 백산 봉기 때 참전했다가 전주화약 이후 김개남 부대와 합류하여 남하했다. 김인배는 김개남이 관할 구역인 순천을 순행할 때 순천에 남아 이곳에서 세력을 키웠다. 이때 김인배를 따르는 세력이 10만 명을 훌쩍 넘었다.

김인배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기세에 눌린 순천부사는 도피하기에 급급했다. 김인배는 순천에 무혈입성하였다. 순천 지역은 이미 1862년 임술 농민봉기의 중심지였고, 광양 일대도 1869년 광양변란, 1889년 농민봉기가 일어나는 등 농민들의 저항 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김인배가 빠른 속도로 조직을 결성하여 세력을 키울 수 있는 배경이다.

김인배 대접주 처형지인 옛 광양시장 관사, 현재는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김인배가 ‘영호도회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영남과 호남을 아우르는 동학 의병부대를 편성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인배는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영호도회소 내에 필요한 무기와 군량미를 모으는 등 곧장 전쟁 준비를 했다. 순천, 광양은 물론, 고흥, 보성 지역 동학 지도자들도 합류했다. 1894년 7월 23일 하동에서 광양, 흥양(고흥) 지역 동학 의병 지도자들이 회동한 사실, 1894년 7월 27일 광양 동학 의병이 순천, 하동으로 이동한 사실 등은 이들 지역 동학 의병들이 영호도회소의 깃발 아래 모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제2차 동학농민전쟁 준비를 마친 김인배는, 1894년 9월 1일 영호도회소 소속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섬진나루를 건넜다. 제2차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북진하지 않고, 섬진강을 넘어 동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부산 수비대를 쫓아내는 것이 국권을 수호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영호도회소는 하동을 공략한 이후, 사천, 곤양, 완사를 거쳐 9월 13일 진주성을 공격했다. 그리고 9월 18일 진주성을 점령하고 이어 사천을 공격하였다. ‘보국안민’이라고 쓴 붉은 깃발을 대열의 전면에 내걸었다. 영호도회소는 창원, 김해 남해, 통영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진주를 점령한 영호도회소가 세력을 넓혀 남쪽과 동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9월 18일 일본 군대의 출병을 요청하였다. 일본군의 본격적인 동학 농민군 토멸 작전이 전개됐고, 9월 24일 부산 수비대가 진주로 이동했다.

영호도회소의 진군을 차단하고자 출동한 일본수비대는, 8월 30일 전투 경험이 풍부한 후비보병부대로 교체됐다. 이는 동학 농민군을 초멸하려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김인배의 영호도회소 격문에 “왜놈 오랑캐가 우리 경계를 침범했다”, 그러므로 “멸망시켜야 한다”라는 하여 척왜를 넘어 멸왜를 내세웠다.

동진하는 영호도회소와 이를 차단하려는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서부 경남 곳곳에서 치러졌다. 영호도회소는 일본군 가운데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이들로 구성된 후비보병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국권을 수호하려는 사실상의 독립전쟁이었다. 하지만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연패하며 경남 서부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순천 지역으로 퇴각한 김인배는 다시 부대를 정비해 여수의 전라좌수영 공격에 나섰다. 그가 좌수영을 공격하려 한 데는, 좌수영을 최후의 보루로 삼기 위함이었다. 김인배는 11월 10일 전라좌수영을 공격했다. 그리고 11월 16일 2차 전투에 이어 11월 20일 3차 전투가 발발했다. 11월 26일 영호도회소의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관군 연합부대 사이에 네 번째 전투가 전개됐다. 일본 함정에 승선한 육전대 100명과 좌수영 영병이 연합해 영호도회소 의병들을 덕양리 방면으로 밀어붙였다. 일본군의 함포 사격과 육전대의 도움을 받아 관군은, 전라좌수영을 공격한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을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영호도회소가 패배한 이유는 경상남도 서부지역 전투에서 패배할 때와 유사하다. 영호도회소는 관군과의 전투에서는 우위를 점하였지만,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영호도회소는 순천으로 퇴각하게 됐다. 경상남도 서부지역에서의 입지를 잃은 김인배가 전라 좌수영을 점령해 새로운 교두보를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그의 거점이었던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도 패배했다. 관군과 일본군은 영호도회소의 근거지인 순천과 광양으로 접근하며 김인배를 압박했다.

영호도회소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자 12월 7일 지역의 아전들과 민병이 손을 잡고 김인배를 체포하여 죽였다. 일본군과 치열한 독립전쟁을 치렀던 영웅은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영호도회소는 무너졌다. 김인배가 효수당하기 직전 같이 있던 처남인 조승현이 김인배에게 “매형, 집에 같이 갑시다”고 했더니, 김인배는 “나는 갈 수 없네. 자네는 집에 가서 이 소식을 전하고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여생을 다하기 바라네. 나는 여기에 포위되어 있어서 많은 동료를 버릴 수 없어,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였네. 대장부로 태어나 떳떳이 목숨을 마치겠네”라고 답했다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빛나는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의병대장의 결기가 느껴진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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