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10. 염걸

1596년 11월 정유재란 가능성이 농후할 무렵,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재침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이덕형은 “수전(水戰)이 상책이고, 그 다음이 산성을 지키는 것이니 주사(舟師)를 신칙하여 적이 오는 길을 막게 하고”라 하며 해상에서 미리 일본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성룡 역시 같은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곧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통해 일본군의 재침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익히 아는 바처럼 일본의 이간계에 휘둘린 조선 조정은, 1597년 1월 28일 이순신을 파직했다.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가가 된 원균은 같은 해 7월 무리하게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칠천량에서 참패했다. 전쟁 중에 함선 건조에 박차를 가하여 1597년 5월 무렵에 180척에 달하였던 판옥선이 겨우 12척 남았을 뿐이었다. 칠천량 해전의 참패 소식에 놀란 조정은 7월 22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기용했다.
이보다 앞서 겨우 죽임을 면한 이순신은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 중이었다. 8월 3일 진주에서 통제사 임명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진주-구례(8월 3일)-곡성-옥과-순천 부유창-순천부-낙안-보성 조양창-보성(8월 9일)-장흥 회령포(8월 18일)-해남 이진-어란포-진도 벽파진-전라우수영(9월 15일) 등을 돌아다니면서 수군을 수습했다. 이 길을 이른바 이순신의 ‘수군 재건길’이라 한다. 전남교육청에서는 몇 년 전부터 이순신 장군의 ‘수군재건길’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다. 특히 10여 일 머물렀던 보성에서 수군 재건에 필요한 상당한 군량과 병기를 확보했다.
1597년 9월 16일 유명한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진영은 당사도(현 신안군 암태도), 어외도(신안군 지도읍 어의도), 칠산도(영광군 낙월면 칠산도), 법성포, 홍농, 고참도(부안군 위도면 위도), 고군산도(군산시 선유도) 등으로 이동을 거듭했다. 그리고 남하해 1597년 10월 29일 목포 앞바다의 고하도를 거쳐 당시 강진현에 속했던 고금도(현 완도군 고금면)로 1598년 2월 17일 진을 옮겼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지휘부가 군산 선유도까지 북상한 데는 일본군이 비록 명량 해전에서는 패했지만 여전히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실제 일본 수군은 영산강 하구에 있는 무안 대굴포 일대까지 쳐들어왔었다. 이처럼 정유재란 때 원균의 칠천량 해전 참패로 조선 수군이 붕괴되면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공격에 비켜 있던 전라도 남해안 일대가 일본군의 공격에 노출됐다. 이에 전남 곳곳에서 의병들이 활발히 향토 방어를 위해 앞장섰다. 오늘 다룰 강진 출신 염걸도 그러한 대표적 인물이다.
염걸(1545-1598)은 청자로 유명한 강진군 칠량면 율변리에서 염인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주, 자(字)는 국충(國忠), 호는 퇴은당이었다. 전성부원군 충경공 제신의 후손이다. 그가 자를 ‘국충’이라 한데서 왕실에 대한 ‘충(忠)’을 가장 으뜸으로 삼았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재주가 있고 힘이 몹시 셌다고 한다. 무예도 출중하여 말타기에 능하고 활을 잘 쐈다.
염걸이 52세가 되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순천, 고흥, 장흥, 보성, 해남, 무안 등은 해안은 물론 앞서 언급한 입암산성 전투에서 알 수 있듯이 섬진강을 거슬러 내륙 깊숙이 일본군이 공격을 해왔다. 칠량만 깊숙이 자리 잡은 강진은 일본군의 주공격로에 있었다. 강진은 일찍부터 왜구의 침략이 잦았기에 조선 초에 강진에 ‘병영’을 설치했었다.

나베시마가 이끄는 일본 수군이 현재의 완도 고금도를 거쳐 지금의 구강포에 해당하는 강진 대구면 근처 구십포(九十浦)로 쳐들어왔다. 일본군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내륙으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하지만, 이 지역이 고려청자가 생산되는 유명한 도요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면 근처 사당리 미산 마을에는 사적 68호로 지정된 미산 도요지가 있다. 일본군은 이곳에 있는 도공(陶工)들을 일본으로 납치하고자 함이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강제로 끌고 간 많은 조선의 도공들을 통해 도자기 기술을 발전시켜 세계적인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다.
일본군이 공격해오자 염걸은 두 동생 서(瑞)와 경(慶)과 외아들 홍립(弘立)을 불러 “국운이 불행하여 오랜 전란을 겪고 있으니 우리는 마땅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때이다”라고 하며 의병을 조직했다. 염걸의 거의에 동참한 의병이 300여명이나 됐다. 염걸은 해안선을 따라 수백 개의 허수아비를 설치해 우리 병사들의 규모가 일본군에 비해 훨씬 많아 보이게 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지금도 강진 대구면 바닷가에 허수아비가 서 있는 유래이다.
염걸이 일본군을 공격하려 할 때 갑자기 밤안개가 자욱했다. 염걸은 기습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지금이 승리할 때이다”고 하며 일본군 진영에 “너희들은 이곳에 염걸 장군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염걸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목숨이 아깝다면 속히 물러나라”는 글을 적은 화살을 적진에 쏘아 혼란에 빠뜨렸다. 또한 곳곳에 대나무 깔개를 설치하여 일본군이 쏜 화산을 다시 뽑아 사용하는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격퇴했다.

염걸은 일본군의 공격에 후퇴하는 척하며 인근 수정사 계곡으로 일본군을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이 전투에서 염결의 아우 경이 순절하였다. 수정사 입구에는 염걸 장군 승전 기념비가 그날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한편 강진 바로 앞 고금도에 진을 치고 일본 수군과 대치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염걸의 뛰어난 활약상을 보고 받고 조정에 공적을 담은 장계를 올렸다. 선조 임금은 염걸에게 ‘수문장’의 직책을 내렸다.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한 염걸은 장흥 회령진과 몰운대, 광양의 왜교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때의 승전 기록은 호남절의록에서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적(일본군)이 장흥의 화령 대흥교에 크게 모이니 공(염걸)이 또한 쳐서 크게 격파하였고 적장의 말을 빼앗았다”
장흥 몰운대 전투에서는 이순신의 3남 이면을 살해한 적장을 체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호남절의록에 염걸은 노량 해전, 순천 예교성 전투에서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이겼다고 나와 있다. 특히 노량해전에서 적선 수십 척을 파괴하고 적장 10여 인을 죽이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순신이 전사하는 바람에 그의 공적이 조정에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염걸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거제도까지 추격하다 순절했다. 훗날 조정에서는 그에게 선무원종공신에 녹훈해 공적을 기렸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염걸을 포함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한 두 아우 염서와 염경, 그리고 외아들 염홍립의 묘를 함께 썼는데 이를 ‘사충부자형제묘’라고 한다. 사충묘 옆에는 주인을 따라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죽은 노비를 기린 ‘충노(忠奴)의 묘’가 함께 있다. 최근까지도 ‘허수아비 의병장, 염걸’의 이야기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열리는 강진 고려청자 축제에서는 바닷가에 허수아비를 즐비하게 세워놓고 당시의 승리를 기념했다.
강진군 칠량면에 1978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그의 무덤이 있다.
염걸 의병장이 일본군을 유인하여 크게 격파한 곳의 하나인 정수사(淨水寺)는 장흥의 명산인 천관산 남서쪽에 있는 천태산에 있다. 이곳에는 도요지 인근에 있는 사찰로 도공들의 기도 도량임을 알려주는 ‘도조사(陶祖祠)’라는 사당이 있다. 고려청자를 굽기 전 도공들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좋은 청자를 만들 수 있도록 부처님께 공양과 불공을 드리고자, 그리고 힘든 삶을 이겨내고자 한 도공들이 마음의 안식처를 찾고자 절을 찾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염걸과 그의 두 아우, 외아들의 공적을 기리는 ‘충효사’도 위치해 있다.
한경국기자 hkk4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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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관광으로 하나된 영호남···동성로서 상생 '염원'
5일 대구 동성로 28아트스퀘어 일원에서 열린 ‘2026 동서화합 영·호남 문화예술관광박람회’ 개막식에서 김종석 무등일보 대표, 손인락 영남일보 대표, 추경호 대구시장, 최병남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문화예술과장 등 참석자들이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동서간 화합과 상생을 염원하는 ‘2026 동서화합 영호남 문화예술관광박람회’(이하 박람회)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지난 2024년 첫 박람회를 시작으로 올해 3회째를 맞은 박람회를 맞아 지역과 세대를 넘어 문화로 하나 된 영호남은 수도권 일극 체제와 지방소멸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상생 의지를 다졌다.무등일보와 영남일보가 공동 주최·주관하고, 전남광주통합특별시·대구시·경북도가 후원한 이번 박람회는 지난 4일부터 3일간 영호남 40여 개 지자체·기관단체가 참여, 대구 동성로 28 아트스퀘어 일원에서 열렸다.대구 중심지이자 젊음의 거리인 동성로에 마련된 70여 개 부스엔 주말 나들이를 나온 가족단위 관람객부터 친구·연인과 함께 한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지난 5일 열린 개막식에는 추경호 대구시장과 황명석 경북도 행정부지사, 김용섭 문화체육관광부 지역문화정책관을 비롯한 영호남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 기관·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경북 도립교향악단과 대구시립극단의 식전 공연을 시작으로 국민의례, 내빈 소개, 축사, 퍼포먼스, 부스 라운딩 순으로 진행됐다. 휴일 오후 동성로 일대를 찾은 많은 지역민은 물론, 광주·전남에서 온 주민들도 함께해 한층 더 의미를 더했다.특히 이번 박람회는 다채로운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큰 관심을 받았다.나만의 여행 성향을 분석해 여행지를 추천해 주는 ‘나와 맞는 대구·경북 ×광주·전남 푸드 MBTI’ 트래블 라운지를 찾은 젊은이들은 질문에 따라 자신만의 추천 여행지를 찾아 나서며 즐거워했다.영호남 명소를 배경으로 추억 사진을 남기는 ‘동서화합 네 컷’은 인화지가 금방 동이 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앞선 4일에는 영호남 관광 교류의 시작이자 양 지역 청년 100명이 참여하는 ‘문화로 투어단’ 출정식이 경북도청에서 열렸다.47명의 대구경북 젊은이와 53명의 광주특별시 젊은이로 구성된 투어단은 안동 전통문화 현장을 시작으로 포항의 야간경관과 경주의 역사문화 자원을 체험한 뒤 대구에서 근대문화 현장을 살펴봤다.이들은 같은 길을 걷고 문화를 함께 경험하며 ‘경쟁이 아닌 함께 상생하는’ 동반자임을 느끼고, 체감하며 마음을 나눴다.개막식에 참석한 추경호 시장은 “영호남은 오랜 세월 대한민국을 떠받쳐온 두 축이자 역사의 고비마다 위기를 함께 극복하며 국가 발전을 이끌어온 든든한 동반자”라며 “동성로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들리고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어우러질 때 진정한 동서화합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김종석 무등일보사장은 “박람회의 첫 번째 가치는 동서화합이고, 두 번째는 인구소멸 시대에 우리 지역이 살아남을 길을 찾는 데 있다. 무등일보와 영남일보가 민간 차원에서 행사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며 “앞으로 광주·전남과 대구·경북이 문화관광을 통해 지역 발전의 주체로 나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손인락 영남일보 사장도 “지방소멸은 어느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남과 호남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풀어야 할 공동의 과제”라며 “문화와 관광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가장 따뜻하고 강한 힘이다. 영호남 문화관광 교류를 확대하고 지역균형발전의 길을 함께 열어나가자”고 밝혔다.한편 광주 5·18 민주광장일원에서 18일부터 20일까지 열리는 호남권 박람회는 문화예술관광과 ‘AI반도체’로 대변되는 미래 첨단산업이 접목된 다채로운 체험·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도철원기자 repo333@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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