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6. 신여량

관외로 반출돼 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원래의 자리에 옮겨 놓아야 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문화 유산은 그 지역의 정체성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 문화유산을 제대로 관리, 보존할 능력이 갖추어져 있는 경우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 고흥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권율 장군의 막하에서 공을 세운 신여량 장군 유품 가운데 1987년 전남도문화재로 지정된 상가교서, 밀부유서 등 소장품이 후손의 기증으로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소유권이 이관되면서 전남도문화재 지정이 해제됐다. 상가교서, 밀부유서는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주사선연지도 등 다른 유품은 추가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고흥에서는 최근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여 추가 지정과 함께 원래 있었던 곳으로 이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오늘은 신여량 장군을 다루려 한다.
신여량(申汝樑) 장군은, 자는 중임(重任), 호는 봉헌(鳳軒), 본관은 고령, 병조판서에 증직된 신홍해의 아들로, 1564년(명종 19) 고흥군 동강면 마윤리에서 출생했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정9품 선전관이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임금이 파천할 때 평안도 의주까지 호종했다. 이때 국왕의 신임을 얻어 ‘여량(汝良)’의 이름을 나라의 동량이라는 의미의 ‘여량(汝樑)’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신여량 장군은 인터넷 등 여러 자료에는 임진왜란 중에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1604년(선조 37) 신여량을 부산첨사로 삼았다고 나와 있다. 그가 이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의 행적에 대해 후대의 기록들이 서로 엇갈려 있다. 당대의 기록보다 약간 시기가 떨어지는 ‘난중잡록’, ‘호남절의록’에 주로 의지하여 살피다 보니 혼란스런 면도 있으나 그렇다고 장군의 공적이 폄하되지는 않는다.
신여량 장군에 대해서는, ‘난중잡록’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돼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당시 남원부 서기로 재임했고,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참전한 조경남(1570∼1641)이 1618년 펴낸 것으로, 호남지역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인용 자료와 자신의 견해를 별도로 세주(細注)로 밝히는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난중잡록이 비록 전쟁이 끝난 20년 후에 펴냈다고 하지만, 사실상 당대의 기록이라 해도 좋다. 전쟁이 끝난 200년 후에 각 문중의 의도가 반영된 ‘호남절의록’ 보다 훨씬 사료 가치가 있다. ‘난중잡록’이 지닌 이러한 가치는 이 책의 내용을 전부 인용 전재한 영조 초에 편찬된 ‘대동야승’과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입증된다.
의주에서 국왕을 호종한 신여량은, 1593년 2월 전라도순찰사 권율을 따라 행주산성 전투에서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593년 중반부터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였다. 행주대첩의 공을 인정받아 김명원의 후임으로 도원수가 된 권율은 영남에 전쟁 지휘부를 설치했다. 신여량이 1595년 7월 진주판관에 임명된 배경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 근무 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아 파직됐다. 2년 동안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1603년 신여량 등이 임진왜란 당시 사실보다 과장하여 공적 보고서를 올렸다는 오해가 있었다는 조선왕조실록 기사가 있다. 그의 파직이 그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농간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신여량 장군은 억울하게 파직되었음에도 국왕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역할을 찾고 있었다. 1597년 6월 30일 난중일기에, “신여량이 흥양에서 찾아와서 연해 지역에 비가 알맞게 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라고 나와 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유일한 신여량 장군 얘기이다. 이 무렵 이순신은 통제사 직에서 파직된 후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 중이었고, 신여량 또한 진주 판관직에서 파직된 후 고향 고흥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후 칠천량 패전으로 인한 수군 재건을 위해 전라도 방면으로 이동할 때에, 신여량은 통제사 휘하에 소속돼 명량해전 및 무술년(1598년)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신여량 장군이 이순신 장군을 도와 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내용이 ‘난중잡록’에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임진년 선조 25년(1592년) 음력 5월 4일 삼도의 해군 함대가 가덕도 앞바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다.(중략)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우수사 이억기가 함대를 이끌고 좌수영 앞바다에 대기하고 있었다. 곧 장군기를 세우고 소라를 불며 대포를 터뜨리고서 어영담을 선봉으로, 방답귀선장 신여량을 척후로, 순천부가 권준과 가리포첨사 구사직 등을 중위의 좌·우장으로 하고는 이억기의 군함과 합세하여 노략으로 향발하여 원균과 만나기로 하였다. (중략) 이순신은 바다가 좁은 곳을 보고 느릿느릿 퇴각하여 여러 배들이 차례로 나왔고, 이억이는 이미 주도(柱島) 밖으로 달아나 있었다. (중략) 이억기도 노를 재촉하여 뒤따라 와서 많은 배들이 천진현전(天地玄箭)을 발사하여 총소리가 바다를 뒤흔들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가득찼다”
이순신의 최초 승전 기록인 옥포 해전에 신여량이 참전한 사실을 다루고 있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신여량이 국왕을 호종하여 의주에 있을 때다. 더구나 이 전투를 설명하는 내용이 이후 전개되는 해전과 사실들이 섞여 있다.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 등 많은 해전에 이순신 장군을 도와 참전한 사실들이 정리과정에서 약간 혼선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난중잡록의 신여량 장군의 참전 기록에 있는 ‘방답귀선장’, ‘척후’ 등은 그가 해전에 참전할 당시 직책을 말하고 있다.
한편 신여량은 전쟁이 끝난 후 1601년 4월 어모장군, 1602년 1월 중군어모장군(中軍禦侮將軍) 즉 우후(虞候)로 활동했다. ‘우후’와 ‘중군’은 통제영에서 막하들을 통솔하고 통제사를 대리하는 직책이다. 1602년, 1603년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덕형의 제안으로 전쟁으로 중지된 과거인 ‘주사별시(舟師別試)’를 시행했다. 최종 합격자 경상우도와 전라우도 수군 합격자를 대상으로 주사연회를 열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이 ‘주사선연지도’이다. 이때 신여량은, ‘절충장군행 경상우도수군 우후(折衝將軍行慶尙右道水軍虞候)’로 주사선연에 참석해 그림을 분급받았다.
1604년 6월 14일 당포 앞바다에 왜선이 출현했다. 신여량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왜선을 격파했다. 이 승전에 참전한 28명에게 ‘당포전양승첩지도’가 분급됐다. 이를테면 해전 승전 기념사진이었다. 당포전승을 이끈 신여량은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에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다음은 그의 ‘상가교서’이다.
“경상우도수군우후 신여량은 왜적과 역전하여 이런 금참(擒斬)한 일이 있으므로 상을 더해 교서를 내린다.
왕은 이르로니. 어찌 서로 아는 것이 이리 늦었느냐. 진경이 같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그 공을 갚지 못했다. 이로써 가선의 벼슬을 내리고 훌륭한 공이 이미 들어나므로 특별한 은전을 의당 가한다. 오직 경은 호남의 웅재요. 산서의 맹기로 충절은 충분히 취할만하고 뜻은 순국하는데 있어서 몸을 돌보지 않았다. 담용이 남보다 뛰어나 활쏘기에 능하여 양팔에 쌍건을 차고 순식간에 밀려온 해적이 실로 우리 국토를 침범한 때 바야흐로 괴목, 송지, 석회 선함이 모두 떨어졌으나 독환과 장창, 이검을 견고하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병기 또한 정강해 비록 심한 풍랑을 만나도 대비할 수 있게 했다(하략)”
신여량은 승전 후 곧 9월 부산첨사에 임명됐고, 1605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됐다. 1605년 12월 말 전라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돼 1606년 1월 9일 부임됐다. 그러나 부산첨사 재임시 명나라 군병을 접대한 일이 시비가 되어 관직을 물러났다. 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의 고향인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 정려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한경국기자 hkk4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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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관광으로 하나된 영호남···동성로서 상생 '염원'
5일 대구 동성로 28아트스퀘어 일원에서 열린 ‘2026 동서화합 영·호남 문화예술관광박람회’ 개막식에서 김종석 무등일보 대표, 손인락 영남일보 대표, 추경호 대구시장, 최병남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문화예술과장 등 참석자들이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동서간 화합과 상생을 염원하는 ‘2026 동서화합 영호남 문화예술관광박람회’(이하 박람회)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지난 2024년 첫 박람회를 시작으로 올해 3회째를 맞은 박람회를 맞아 지역과 세대를 넘어 문화로 하나 된 영호남은 수도권 일극 체제와 지방소멸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상생 의지를 다졌다.무등일보와 영남일보가 공동 주최·주관하고, 전남광주통합특별시·대구시·경북도가 후원한 이번 박람회는 지난 4일부터 3일간 영호남 40여 개 지자체·기관단체가 참여, 대구 동성로 28 아트스퀘어 일원에서 열렸다.대구 중심지이자 젊음의 거리인 동성로에 마련된 70여 개 부스엔 주말 나들이를 나온 가족단위 관람객부터 친구·연인과 함께 한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지난 5일 열린 개막식에는 추경호 대구시장과 황명석 경북도 행정부지사, 김용섭 문화체육관광부 지역문화정책관을 비롯한 영호남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 기관·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경북 도립교향악단과 대구시립극단의 식전 공연을 시작으로 국민의례, 내빈 소개, 축사, 퍼포먼스, 부스 라운딩 순으로 진행됐다. 휴일 오후 동성로 일대를 찾은 많은 지역민은 물론, 광주·전남에서 온 주민들도 함께해 한층 더 의미를 더했다.특히 이번 박람회는 다채로운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큰 관심을 받았다.나만의 여행 성향을 분석해 여행지를 추천해 주는 ‘나와 맞는 대구·경북 ×광주·전남 푸드 MBTI’ 트래블 라운지를 찾은 젊은이들은 질문에 따라 자신만의 추천 여행지를 찾아 나서며 즐거워했다.영호남 명소를 배경으로 추억 사진을 남기는 ‘동서화합 네 컷’은 인화지가 금방 동이 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앞선 4일에는 영호남 관광 교류의 시작이자 양 지역 청년 100명이 참여하는 ‘문화로 투어단’ 출정식이 경북도청에서 열렸다.47명의 대구경북 젊은이와 53명의 광주특별시 젊은이로 구성된 투어단은 안동 전통문화 현장을 시작으로 포항의 야간경관과 경주의 역사문화 자원을 체험한 뒤 대구에서 근대문화 현장을 살펴봤다.이들은 같은 길을 걷고 문화를 함께 경험하며 ‘경쟁이 아닌 함께 상생하는’ 동반자임을 느끼고, 체감하며 마음을 나눴다.개막식에 참석한 추경호 시장은 “영호남은 오랜 세월 대한민국을 떠받쳐온 두 축이자 역사의 고비마다 위기를 함께 극복하며 국가 발전을 이끌어온 든든한 동반자”라며 “동성로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들리고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어우러질 때 진정한 동서화합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김종석 무등일보사장은 “박람회의 첫 번째 가치는 동서화합이고, 두 번째는 인구소멸 시대에 우리 지역이 살아남을 길을 찾는 데 있다. 무등일보와 영남일보가 민간 차원에서 행사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며 “앞으로 광주·전남과 대구·경북이 문화관광을 통해 지역 발전의 주체로 나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손인락 영남일보 사장도 “지방소멸은 어느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남과 호남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풀어야 할 공동의 과제”라며 “문화와 관광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가장 따뜻하고 강한 힘이다. 영호남 문화관광 교류를 확대하고 지역균형발전의 길을 함께 열어나가자”고 밝혔다.한편 광주 5·18 민주광장일원에서 18일부터 20일까지 열리는 호남권 박람회는 문화예술관광과 ‘AI반도체’로 대변되는 미래 첨단산업이 접목된 다채로운 체험·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도철원기자 repo333@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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