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과 바다를 누볐다” 상량문으로 증명된 흥국사 300인 의승군

입력 2026.06.29. 17:12 한경국 기자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3.흥국사와 의승(義僧) 수군(水軍)
흘국사 대웅전. 국가유산텅 국가유산포털 제공

여수 영취산에는 조계종의 개조인 보조국사 지눌이 1195년(고려 명종 25)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흥국사가 있다. ‘흥국(興國)’이라는 절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호국불교의 성지이다. 흥국사에는 ‘의승수군 유물 전시관’이 있다. 임진왜란 때 승려의 신분으로 수군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싸웠던 승려, ‘의승’들이 일본군과 싸울 때 입었던 피묻은 옷, 흥국사 승려들이 만든 전라좌수영 관련 건축용 기와 등 의승수군과 관련된 유물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내부 수리중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눈부신 활약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의병들의 활동은 관군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현실을 반영한다. 당시 의병은 육상만이 아니라 해상에도 존재하였다. 해상 의병 활동이 육상에서 활동만큼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이들이 수군과 결합하여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육군과 달리 수군은 바다에 익숙하고 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참전할 수 있었다. 주로 연해 지역 주민들이 수군으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연해 주민으로서 수군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해상의병’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해상의병으로 활동한 이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수군 지휘부의 독려에 따라 직접 전투에 참전하거나 해안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의승군’이 있다. 의승군은 ‘서산대사 휴정’을 정점으로 결성된 전국단위의 조직이었다. 포로 교환 협상단을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간 ‘사명대사 유정’, 행주산성 전투의 ‘뇌묵대사 처영’ 등이 의승군 이름을 빛내고 있다. 최근 준공된 해남 대흥사의 호국대전은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보관된 사찰로 호국사찰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한말 대흥사 심적암 일대에서 대흥사 소속 승려들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 산화한 것도 의승군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의승군 가운데 전라좌수영에 속한 의승수군의 활약은 눈부셨다. 이들은 휴정이 지휘한 전국 단위의 조직망에 입각하여 활동한 것이 아니라 전라좌수군에 자원 종군하며 이순신의 지휘에 따라 활동하였다.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은 이순신의 장계(狀啓)에 잘 드러나 있다.

“…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여러 사찰에 은닉한 승려들과 병적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적발하여 석주·도탄·두치 등지에 나누어 파수 보도록 하였더니 승려들이 소문을 듣고 즐거이 모여들어 한 달 이내에 4백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 용맹과 지략을 가진 자들로 순천 사는 승 삼혜는 시호별도장, 흥양 사는 승 의능은 유격별도장, 광양 사는 승 성휘는 우돌격장, 광주 사는 승 신혜는 좌돌격장, 곡성 사는 승 지원은 양병용격장으로 정하고 … 강희열과 승 성휘 등을 두치로, 신해는 석주로, 지원은 운봉 팔량치로 정하고 … 강희열과 승 성휘 등을 군과 협력하여 사변에 대비할 것을 전령했고, 성응지에게는 전적으로 순천성 수비하는 책임을 맡기고, 승 삼혜는 순천에, 승 의능은 본영에 각각 머물며 방비하고 있다가 적의 형세를 보아서 육전이 중대하거든 육전으로 가고, 해전이 중대하거든 해전으로 가라는 뜻을 약속하였으나, 물길을 차단하고 도망하는 적의 큰 부대를 섬멸하자면 병력이 외롭고 약해져서는 안 될 것이라 소속 해군력을 넉넉히 정돈해야 하겠기로 의병장 성응지, 승장 삼혜·의능 등에게는 전선을 나누어 주어 수선하여 갈라타고 바다로 나가도록 명령하였습니다.”(이충무공전서, 1593년 1월 25일)

1593년 1월에 올린 장계에 따르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삼혜·의능·성휘·신해 등 승려들에게 직책을 주고 두치(광양)·석주(구례)·운봉(남원) 등 각각 요해처를 지키게 하였다. 이에 따르면 전라좌수영 산하에 조직된 의승수군은 이순신의 규합에 호응하는 형식으로 조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92년 8~9월 경 이미 영·호남 경계지역 사찰에 창의(倡義)를 요청하였고, 이순신의 요청에 따라 의승군이 조직되어 주요 진지 방어에 나섰다.

흥국사 전경. 국가유산텅 국가유산포털 제공

임진왜란 초기에 육지 의병들이 관군과 별도로 움직인 것과 달리 의승수군은 관군의 일원이 되어 이순신의 명령을 받고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 전라좌수영 의승수군은, 선조 임금의 요청으로 조직된 휴정, 유정 등이 조직한 전국적인 규모의 의승군 조직과는 별도였다. 의승수군은 특정 지역의 수비 책임을 맡거나 때로는 스스로 판단하여 육전, 또는 해전에 임하였다, 이들은 군량미 등을 스스로 동원한 것으로 보아 지휘체계는 관군에 속하였으나 자발적인 의병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의승수군의 빛나는 전과는, 1593년 2월 웅천 상륙작전에서 두드러졌다. 성응지·삼혜·의능 등이 지휘한 의승 수군은, 창검을 휘두르고 활과 화포를 쏘며 하루 종일 역전하며 무수한 적병을 사살하였다고 할 정도로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은 1593년 3월 10일 조정에 장계를 보내 의승수군의 활약을 보고한 뒤 포상을 건의하였다.

“수군을 자진하여 모집하여 들어온 의병장 순천 교생 성응지와 승장 수인, 의능 등이 이런 전란에 자기 몸 편안히 할 것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정의와 기개를 발휘하여 군병을 모집하여 각각 300여 명씩을 거느리고 나라의 수치를 씻으려 하니 이들은 참으로 가상합니다. 2년째 해상에 진을 치고서 자기 스스로 군량을 준비하여 이곳 저곳 나누어 공급하며 간신히 식량을 이어대는 그 고생스러운 정황은 관군보다 갑절이나 더한데 아직도 수고로움을 거리끼지 아니하고 더욱 더 부지런할 따름입니다. 일찍이 싸움터에서 적을 무찌를 적에도 현저한 공로가 많았으며, 그들의 나라를 위한 분발심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으니 더욱 칭찬할만한 일입니다.(중략) 조정에서 특별히 표창하여 뒷사람을 격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장계에 따르면, 의승군이 300여 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곧 순천 출신 삼혜와 흥양 출신 의능 등 흥국사 출신 승려들이 조직한 승병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직이 유지된 채 전라좌수영의 독특한 편제로 자리 잡았다. 이를 확인하여 준 문서가 1988년 흥국사 심검당 복원공사 때 발견되었다. 1633년 자운 스님이 찬술한 의승 300명 명단의 상량문, 1729년 6월 덕인 스님이 찬술한 의승병 300여 명 명단, 1803년 효암 스님이 찬술한 승군 300명 명단, 1812년 4월 역시 효암 스님이 찬술한 승군 300명 명단이 있는 상량문이 그것인데, 이를 통해 흥국사가 ‘주진사(駐鎭寺)’의 기능을 오롯이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승군 300명 기록을 처음 남긴 자운 스님에 대해서이다.

1795년 정조 때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호남에 사는 승려들이 공(이순신)을 위하여 재를 올리는데 사찰마다 안 올리는 곳이 없었다. 그 가운데 자운이라는 스님은 이 공의 진중에 따라 다니기고 하고 늘 승군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더니 이 충무공이 돌아가신 뒤에 정미 600석으로 노량에서 수륙제를 열고 음식물을 성대히 차려 충민사에 제사까지 지냈다”라는 내용이 있다. 곧 자운 스님이 임진왜란 때 의승수군으로 참전하였고, 전쟁 이후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리는 일에 앞장섰음을 알려준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옥형(玉炯)’ 스님 또한 의승수군으로 참여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듯 흥국사를 주진사로 하며 인근의 여러 사찰 승려들이 자발적으로 의승으로 국난극복에 앞장선 승려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흥국사 소장 문서를 통해 의승군이 평시에도 수성의 임무와 함께 지역 경계 임무, 조선, 축성, 기와 제작, 화살 제작 등의 임무를 맡았다. 특히 ‘호좌수영지’에 따르면 전라좌수영 관하의 사찰로서 여수의 흥국사·만흥사·한산사·태성암, 광양의 황룡사 등에서 여러 가지 종이와 화살대 등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18세기 후반 전라좌수영 내에 ‘의승청(義僧廳)’이 설치되었다. 의승장 1인에 의승병 300인이 편제되어 있었다. 의승장은 오로지 흥국사에서 발탁하였다. 흥국사가 주지가 전령장 겸 파총, 석천사 우령장, 만흥사가 좌영장, 한산사가 후영장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흥국사를 중심으로 한 의승수군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으로부터 직임을 받아 활동하면서 전라좌수군으로 편성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영될 때까지 약 300여년 간 상비군으로서 전라좌수군에 편제되어 있었다. 이는 전라좌수군만의 독특한 전통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승수군의 역할이 컸음을 알려준다.(흥국사 출신 의승 자료를 제공하여 준 유물전시관 이득봉 국장께 고마움을 표한다)

한경국기자 hkk4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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