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18 황병학
진월면 망덕만서 첫 전투 치러
과감한 헌병분견소 본대 공격
특공조로 헌병 포박·총기 탈취
임시정부 도움으로 만주 망명
손자는 5·18 주남마을 희생자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광양 출신 황병학 의병장이 1908년 7월 26일 의병을 일으키면서 발표한 격문이다. 200여 명의 의병들이 모였다. 황병학은 의병장에 추대됐고, 5촌 당숙인 황순모는 선봉장을 맡았다. 그들 대부분은 산포수들이다. 사냥꾼들이라 지리에 밝고 사격술도 능해 일당백의 전투력을 가졌다. 이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황병학은 광양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만주에서까지 독립운동에 힘쓴 남도 의병장이다.

◆광양 헌병분견소 농락한 의병부대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며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던 1876년 1월 11일, 황병학은 광양군 진상면 비평리에서 아버지 황재모와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문(英文)이다. 어려서부터 서당과 향교에서 한학을 배웠고, 광양의 명산 백운산을 오르내리면서 사냥을 즐겼다.
황병학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 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고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치열한 의병전쟁으로 발전하자 자신도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첫 전투는 1908년 8월 5일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 전투였다. 황병학은 망덕포구에 일본 선박 1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격과 수영에 능한 150여 명을 뽑아 특공대를 편성했다. 80여 명으로 편성된 제1대는 10여 척의 일본 선박을 기습 공격했다. 여러 척의 선박을 침몰시켰을 뿐만 아니라 잠에 취해 있던 일본인 다수를 사살했다. 제2대는 망덕포구 부근의 일본인 주거지를 습격했다. 10여 채의 일본인 가옥을 불태우고 4명의 일본인을 사살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다수의 무기도 노획했다.

망덕만 전투에서 승리한 황병학 의병부대는 백운산을 거점 삼아 일본군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1908년 9월 초순, 순천 주둔 헌병분대와 광양 헌병분견소 병력이 합동작전으로 백운산에 주둔한 황병학 부대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00명의 정예 의병을 특공대로 편성해 광양 옥곡면 옥곡원 뒷산 골짜기에 매복시킨 뒤, 기습 공격을 단행해 적들을 다수 사살해 퇴각시켰다. 황병학은 왼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적은 지금 당황하고 있다. 전투 대열을 갖추기 전에 박살을 내야 한다. 기운을 내라"고 의병들을 독려해 결국 승전을 거두었다.
한 달여 상처를 치료한 후 다시 돌아온 황병학 의병장은, 1909년 1월 일본군 습격을 계획했다. 일본군이 의병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주력하자 광양 헌병분견소 본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백운산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을 혼란시키기 위해 공격 루트와 퇴각 루트를 달리했다. 1909년 1월 23일 밤, 50여 명의 특공조가 광양 헌병분견소에 은밀히 잠입해 총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 헌병들을 전원 포박한 다음, 10여 정의 총기를 빼앗았다.
이에 일본군은 대대적인 보복 작전을 전개했다. 황씨 집안의 집성촌인 비촌마을 주민들에게 온갖 고문을 가했고,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렸다. 황순모는 가족들의 후환을 걱정해 귀순했지만,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일본군이 백운산을 포위하며 압박을 가하자 황병학은 백운산을 포기하고 여천 앞바다에 있는 묘도로 근거지를 옮기려고 했다.
1909년 7월 19일 광양면 황금동 나루터에서 묘도로 가려고 선박에 승선하고 있던 중, 이 사실을 알고 대기 중인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아 100여 명의 의병 가운데 절반 이상이 희생당했다. 황병학은 부상을 입은 채 겨우 포위망을 뚫고 피신했다. 특히 일본군이 전개한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타격을 입고 재기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황병학 의병장은, 국권 회복의 새로운 방도를 모색했다.

◆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손자는 민주화운동
황병학은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고흥에서 활동하던 기산도를 만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했다. 그러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군자금 모금책임자로 훗날 임시정부 국무위원까지 역임한 함평 출신 김철을 만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회 전라남북도 의무금 모집단을 조직하는 데 동참했다. 의무금 모집단에는 기산도·김철·김종택·이인행·박은용·김영탁·민치환·이문복 등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들은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국립대회취지서, 고유문 등을 인쇄해 순천, 곡성, 남원, 순창 일대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부호들을 찾아다니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1919년 10월 동료 김종택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탄로 나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국외 망명을 결심했다. 11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 차장으로 활동하던 김철의 도움으로 만주로 망명했다.
병학이 만주로 망명한 후인 1920년 7월 19일 일제는 궐석재판을 통해 징역 3년형이 처해졌다. 그는 주로 용정촌, 흑룡강 일대에서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1923년 봄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다 의주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평양형무소에서 4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고, 1927년 출옥해 귀향했다.
이후에도 조국 광복에 헌신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해 재차 만주로 망명을 시도했다. 의병 전쟁 중에 입은 총상의 악화, 일경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 그리고 4년여에 걸친 감옥 생활의 후유증으로 인해 1931년 4월 23일 5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현재 황병학의 흔적은 그의 첫 전투지인 광양 진월면 망덕포구와 그의 고향인 진상면 비촌마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황병학 아들 황길현은 한국전쟁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다. 손자 황호걸은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이다. 황호걸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광주일고 부설 방송통신고에 다녔다. 3학년이던 황호걸은 도청 지하실에서 시신 닦는 일을 했다. 시신을 안치할 관이 부족해지자 화순으로 관을 구하러 가다가 주남마을 앞에서 계엄군들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유명한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때 희생됐다. 본인은 '독립운동', 아들은 한국전쟁 '학도의용군', 손자는 '5·18 유공자'였다. 황병학 가문은 의향을 정체성을 빛낸 대표적 가문이라 하겠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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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물들인 남도 의병의 희생···항일 투쟁 밑거름으로
전해산 의병장 동상에 새겨진 최후진술.호남호국기념관 제공
동학 동민 전쟁부터 백성들은 스스로 나라의 위기를 인식하고 '의병'이라 칭했으며 이러한 정신은 한말 의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의병 운동이 조직상의 결함을 드러냈다고 폄하하지만, 남도 의병이 수년간 일본군과 대등한 교전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평소에는 소규모 부대로 유격투쟁을 벌이다가도 필요시에는 대규모 연합 의진을 구성해 전면전을 펼친 유연성에 있었다. 또 항전을 장기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의병부대들이 해체된 이후로도 3·1운동과 항일운동단체 조직, 무장독립 전쟁으로도 이어졌다.무등일보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공동기획한 '남도 의병 열전'을 마무리 하며 한말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광주 서구 농성광장에 조성된 김태원 의병장 동상◆ 동학농민전쟁의 활발한 재평가최근 순천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들을 어떻게 성격지을 것인가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해 우리의 주권을 짓밟는 것을 본 백성들은 이를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로 인식했다. 이에 신분을 떠나 하나가 돼 대일 항전에 나서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스스로를 '의려(義旅)' 곧 '의병'이라 칭했으며 '동학의병'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전남은 일본군과 처절한 항전을 한 지역 중 하나다. 발표에 따르면 전남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러진 전투만 50여 회가 넘는다고 한다. 장흥 석대들에는 며칠 동안 일본군과 밀리지 않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의 항전이 한말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부터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다. 최근 정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고 나선 것은 다행이다. 때마침 문을 여는 남도 의병박물관에 '2차 동학'을 별도의 공간에 넣어 그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자 한 것은 긍정적이다.◆의진 간 활발한 연합전선 펼쳐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은 한말 의병의 활동을 '운동'에서 '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 투쟁을 하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서울 진공작전에 나선 13도 창의군의 결성이 그것이다.한말 의병은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 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새로운 활동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후기 의병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 '창의회맹소'는 의진 간의 연합작전도 전개했다.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이 연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1907년 12월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중요 전투에서는 서로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의진의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별로 유격투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호남창의회맹소'는 여러 차례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돼 순국한 이후에는 김용구와 김태원, 김율을 중심으로 분화됐다. 1908년 4월 김태원과 김율이 순국한 이후에는 심남일·조경환·전해산·오성술·안규홍·박도경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됐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분화 모습을 통해 회맹소가 합진보다 연합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호남창의회맹소와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진 담양 금성산성◆일본 정규군과 대등한 교전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3회나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등 전남 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전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심남일·이대극·안규홍 의병 등 11개 의병부대 약 2천명이 참여했다. 심남일이 연합의진 형성에 가장 적극적이었기에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됐다. 이것은 전기·중기 의병 때 분산적으로 활동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호남동의단'의 구성은 앞뒤에서 동시에 몰아치는 '기각지세'의 형성에서 의진 간 연합전선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들은 연합작전을 수행해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구체적으로 1909년 2월 치러진 남평 덕룡산 전투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이 인솔하는 250명의 의병이 덕룡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 군경과 3시간에 걸쳐 총격전을 벌였다. 박사화 의병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강무경을 비롯해 또 다른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는 박민홍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호남의소'의 특징은 의병부대들이 강력한 의진을 구성해 일본군 정규군과 2년 가까운 독립전쟁을 치른 원동력이었다.일부 연구자들은 1909년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하지만 앞서 살펴본 여러 의병 부대의 특성을 살펴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실상을 모르고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구례 연곡사에 위치한 녹천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장기항전으로의 전환 시도앞서 1908년 13도 창의군이 결성돼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할 때 유인석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로 호응해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국내에서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당시 의병의 역량으로는 일본 군사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인석은 지구전 전략이 실패하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내륙 깊숙한 산중에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의병계열의 백두산 근거지론은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 기지론과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이러한 국외 항일투쟁 근거지론과 함께 국내 근거지론이 대두됐다. 고광순이 주창한 지리산 근거지론이 그것이다. 앞장에서 간단히 살폈지만 그는 당장의 무장 투쟁보다는 장기 항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의 수립에 고심했다. 즉, 화력에서 압도적인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해 '축예지계' 즉, 장기항전에 대비해 일정기간 예기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국내에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한 그는 지리산을 주목했다. 유인석의 중부 이북 의병들이 추진한 '북계책'과 비교된다.고광순의 항전기지 건설 구상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이 본격화될 때 이미 시작됐다.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1907.음) 8월 11일 행군해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지로 삼아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해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를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불원복' 석자를 썼다.(행장, 녹천유고, 하)'이러한 지리산 근거지론은 1908년 초 "하동군 북쪽 골짜기의 지리산은 의병의 소굴이 됐다"하고 하는 데서 살필 수 있다.영암 국사봉을 의병 지휘본부로 삼아 치열한 의병 전쟁을 치른 심남일의 '호남의소'도 이러한 장기적인 항전 기지 건설과 연결돼 있다 하겠다. 국사봉에 근거를 둔 의병부대는 산상에 설치된 포대에서 포까지 발사함으로써 일본군의 접근을 차단했다.이러한 의병부대의 장기적인 항쟁 전략이 이어지면서 의병 전쟁은 일본 정규군의 엄청난 진압 작전에도 밀리지 않은 독립전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에 있는 주먹 동상◆값진 희생, 3·1운동으로 이어져한편 의병들은 3·1운동 때 적극 참여했다. 심남일 의병부대 도통장으로 활동하다 3·1운동을 주도한 남평 출신 김도숙은 의병 수뇌부가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고 독립의군부에서 호남유사를 맡았던 김종주는 낙안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의 칼에 찔렸음에도 저항해 호남 의병의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영암 구림 3·1운동에 앞장섰던 군서 출신 정상조는 '영암 의병' 출신이었다. 역시 '영암 의병'이었던 금정 출신 민치도는 3·1운동 후 화순에서 '독립국민당'이라는 항일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이러한 의병들의 참여는 더욱 격렬하게 이 지역의 3·1운동이 전개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남 의병들이 흘린 피로 전남의 온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이들의 빛나는 독립전쟁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를 늦추게 했다. 항쟁의 에너지는 응축돼 3·1운동, 그리고 무장독립 전쟁의 토대가 됐다. 특히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농민 항일운동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현장에 전남 지역민이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전남 의병의 값진 희생이 밑거름된 것이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 국난 극복 향한 의지에 지역도 계급도 구별 없었다
- · 총상에도 투지 꺾지 않은 부대 조직의 귀재
- · 대한제국 장교, 남도 누비는 의병장 되다
- · 호랑이 잡던 지주의 아들 어등산의 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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