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⑮ 황준성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의병 참전으로 10년형 유배행
이봉오·추기엽 등도 완도 오자
유배지 이탈 후 함께 항일 투쟁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다는 정미7조약 '부수각서'에 따라 부대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서울 시위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당일 자결했다. 중대장 오의선 정위도 뒤를 따라 자결했다. 남상덕 참위는 부하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했다. 해산군인들이 나아가야 할 목표를 제시한 셈이다.
8월 9일 광주진위대를 비롯해 지방의 진위대들도 해산됐다.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항쟁은 '대규모', '조직적'인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다.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된 해산군인들의 항전은 원주·강화·홍주·진주 진위대로 확대됐다.
장교나 병을 막론하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대부분 의병부대에 합류하거나 새로이 의병부대를 결성했다. 이들이 의병부대에 가담함으로써 의병 전투력은 크게 강화됐다.

완도, 해남 일대를 주름잡던 유명한 황준성 의병장 또한 대한제국 장교 출신이었다. 황준성은 군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의병에 가담한 죄목으로 내란죄로 완도로 유배형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유배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간담을 소스라치게 했다.
해남 대흥사에 속한 심적암이 바로 황준성 의병장이 활동한 항일운동의 성지(聖地)라는 사실을 아는 이 많지 않다. 이번 남도 의병 열전에서는 이곳을 무대로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 전쟁을 살펴본다.

◆유배지서 이어간 항일 투쟁 의지
1897년 전북 진안군 남면 오정리에서 태어난 황준성은, 대한제국 군대의 참령 직급까지 올랐다. 참령 이상으로 의병장이 된 인물은 이동휘와 황준성 뿐이다.
황준성은 1907년 12월 최익현,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 의병에서 윤현보·이봉오·추기엽 등과 함께 참전했다가 유배형 10년을 받고 전남 완도로 이송됐다.
승정원 일기에는 '평리원(1907년 12월 말까지 존속한 대한제국 최고 재판소), 피고 황준성을 정사(政事)를 변경하기 위해 난을 일으킨 자로 사형에 처해야 하나 그 사정을 살펴 감경해 유형(流刑) 10년에 선고한다'고 나와 있으며 순종실록에도 '평리원에서 심리한 순천군 의병 황준성을 유형(流刑) 10년에 처했다'고 나와 있다.
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황준성은, 이봉오·추기엽 등이 전주지방재판소에서 10년 유배형을 받고 완도로 오자 1909년 6월 유배지를 이탈해 의병 투쟁에 나섰다.
이때의 모습을 당시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고(황준성)는 융희 원년(1907년) 12월 25일 내란죄로 인해 유배형 10년에 처해져 전라남도 완도에 유배돼 그 집형(執刑) 중에 전남 각 지역에서 폭도의 봉기가 있음을 기회로 해 그 수괴 강성택과 연락해 1909년 6월 유배지를 탈출해 강성택의 부하 십여 명과 함께 각각 총을 휴대하고 완도군 고금, 청산, 여호의 각 섬 및 해남군 화이면의 각 부락을 휘젓고 다녔다. 다음 7월 7일 해남군 북종면 이진리에 이르러 그 지역에서 폭도 수괴 추기엽 및 황두일과 그 부하 10여 명과 함동해 피고가 추대돼 그 수장이 됐고 강성택, 추기엽 등의 각 부장과 함께 그 부하를 인솔해 각각 흉기 또는 칼과 검을 휴대하고 미황사 및 대둔사 부근을 배회하다가 일본수비대의 공격을 받았다.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 1910,)'
장흥경찰서장 보고 문건에도 '황준성은 완도군 군내면 죽청리에 유배중, 1909년 6월 수괴 이덕삼의 부장이 돼 활동했다'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볼 때, 황준성이 이 무렵 유배지를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보고 문건에 등장하는 이덕삼은 해남반도에서 200~300명의 대규모 의병을 거느렸던 의병장이었다. 그러나 이덕삼의 부대는 곧 해체되고 황준성 등 휘하 의병장들이 부대를 분리해 관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곧 분진(分陳)을 시도한 것이다.
일본군 의병 토벌기록에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수괴 황준성은 부하 9명을 인솔하고 영국제 사냥총 5정, 화승총 6정, 군도를 휴대하고 완도군 고금도 농상리, 조약도 관상리 숙박, 생일도 장도 등을 휘젓고 다녔다. 수괴 유현수는 화승총을 휴대한 부하 10명을 인솔해 황준성과 동행했다.'
각 진의 대장인 황준성, 유현수가 각기 부대를 이끌고 연합작전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진과 합진을 통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러른 한말 의병부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호남의소' 연합작전서도 활약
한편 당시 남도에는 '호남의소(湖南義所)'라는 의병부대도 있다. 심남일이 조직한 이 의병부대는 사령부가 있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나주, 영암, 강진, 장흥, 해남, 무안, 함평, 보성 등 전남 중남부 곳곳까지 활동 반경을 넓히며, 일본군과 일진일퇴의 전쟁을 치렀다.
심남일은 '서기'라는 직책을 두어 전투 상황을 기록했다. '심남일 실기'는 그의 전투 일지인 셈이다. 여기에 해남 지역 전투 상황도 있으며 당시 이덕삼과 황준성의 활동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해남 성내(城內) 접전. (1909년) 10월 9일,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기세 좋게 출발해 해남 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쳤다, 정탐군이 여러 차례 내왕하므로 짐짓 겁내어 위축하는 모양을 보이다가, 밤 10시 무렵 군사를 끌고 성안으로 출동해 들어가서 마구 포를 쏴 왜적 백여 명을 베었다. 이튿날 새벽 전에 대둔사로 퇴진했다.'
해남에서 심남일 의병부대가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고 대둔사로 퇴각했다는 내용이다. 유명한 대둔사 전투를 설명하고 있다. 심남일이 영암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할 때 기군장 직책을 담당한 이덕삼이 있다. 심남일이 해남지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데는 기군장인 이덕삼의 역할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국문판) 1908년 11월 5일자 '의병광장' 난에는 '전라남도에서 온 사람이 말을 들은 즉 해남 등지에 의병이 창궐하는 데 그 의병의 당파는 남일파라 하고 세력이 굉장하다더라'고 적혀있다. 해남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부대가 심남일이 이끄는 의병부대임을 알 수 있다. 역시 같은 신문 1909년 3월 23일 '남일파의 기세' 난에도 '영암과 해남 등 군에는 의병 남일파의 기세가 점점 성해 일인을 보는 대로 죽이는 까닭에 그 지방에는 일본 상인과 거류민이 모두 도망했다더라'고 해 영암, 해남 등지에서 심남일이 이끄는 의병부대 곧 '호남의소'의 기세가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해남이 의병 항전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데는 해남 일대의 의병부대를 이끌며 심남일이 편성한 연합의병 부대의 기군장 직책을 맡은 이덕삼의 역할이 컸다.
이덕삼 부대는 독립 의진을 이끈 황준성, 추기엽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추기엽은 전주 진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군대 해산 이후 익산 출신의 의병장 윤현보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돼 유형 10년 형을 받고 완도로 귀양 왔었다. 추기엽은 우수영 일대에서 약 1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황준성, 추기엽과 함께 해남 의병의 중심 인물이 황두일이 있다. 황두일은 해남군 북평면 고달동 출신이었다. 그의 휘하에 120명의 의병이 있었다.

◆두륜산서 맞이한 쓰디쓴 패배
해남 지역에 있는 의병부대는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와도 연합작전을 전개했다. 심남일의 실기에 나온 해남 성내 전투가 바로 그 대표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실기'에 언급된 대둔사 전투를 살펴보기로 한다.
1909년 7월 7일 일본 수비대와 황준성, 추기엽 등의 해남 의병부대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에서 있었다. 두륜산을 근거지 삼아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이들 의병부대는 미황사로 이동해 전열을 정비한다. 이들은 황준성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곧 연합의진의 사령관이 된 셈이다. 약 70명의 의병부대는 두륜산으로 이동하기에 앞서 일진회원인 박원재와 진태진을 붙잡아 현산면 초평리에서 사살했다. 그리고 7월 8일 대흥사 심적암으로 부대를 이동했다.
7월 8일 심적암에 도착한 의병부대는 현산면 덕흥리 김인옥이 의병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내놓은 소를 잡아 약주를 한 잔씩 하며 새로운 전략을 논의했다. 황준성은 잠이 들면서 부대의 절반이 되는 30명을 보초로 세워 일본군의 야습에 대비했다. 이날 밤 해남수비대장 요시하라 대위가 이끄는 수비대 22명, 경찰 3명, 헌병 4명 등 30여 명의 일본군이 의병의 뒤를 추격해 대흥사로 출동했다. 경계 근무를 하던 의병들은 새벽에까지 특별한 징후가 보이지 않자 심적암으로 돌아왔다. 이들 뒤를 밟은 일본군 수비대는 새벽 4시 무렵 심적암을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가했다.
기습을 당한 해남 의병부대는 전사자 24명, 포로 8명, 화승종 47정, 군도 5개를 빼앗기는 피해를 입었다. 이때 일본군 공격으로 심적암의 침허당 스님 등 5명의 승려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탈출에 성공한 황준성은 보성, 순천 등지로 피해 다니다 12월 7일 해남 경찰서에 자수했다. 그가 자수한 것은 부대원들의 희생을 막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1910년 4월 2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형이 교수형이 확정돼 죽임을 당했다. 추기엽도 다행히 탈출에는 성공했으나 7월 29일 부하들에게 피살됐다. 심적암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부하들이 물은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황두일은 8월 30일 부하 8명과 함께 해남 수비대에 자수했다. 황준성과 마찬가지로 후일을 기약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해남군은 지난 2019년 발굴 조사와 사료 연구를 통해 심적암지의 건물지 3동, 우물지 1동, 문지 1곳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심적암지가 수행도량에서 항일 의병 전적지로 변화한 과정을 밝혀냈다. 지난 8월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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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물들인 남도 의병의 희생···항일 투쟁 밑거름으로
전해산 의병장 동상에 새겨진 최후진술.호남호국기념관 제공
동학 동민 전쟁부터 백성들은 스스로 나라의 위기를 인식하고 '의병'이라 칭했으며 이러한 정신은 한말 의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의병 운동이 조직상의 결함을 드러냈다고 폄하하지만, 남도 의병이 수년간 일본군과 대등한 교전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평소에는 소규모 부대로 유격투쟁을 벌이다가도 필요시에는 대규모 연합 의진을 구성해 전면전을 펼친 유연성에 있었다. 또 항전을 장기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의병부대들이 해체된 이후로도 3·1운동과 항일운동단체 조직, 무장독립 전쟁으로도 이어졌다.무등일보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공동기획한 '남도 의병 열전'을 마무리 하며 한말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광주 서구 농성광장에 조성된 김태원 의병장 동상◆ 동학농민전쟁의 활발한 재평가최근 순천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들을 어떻게 성격지을 것인가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해 우리의 주권을 짓밟는 것을 본 백성들은 이를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로 인식했다. 이에 신분을 떠나 하나가 돼 대일 항전에 나서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스스로를 '의려(義旅)' 곧 '의병'이라 칭했으며 '동학의병'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전남은 일본군과 처절한 항전을 한 지역 중 하나다. 발표에 따르면 전남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러진 전투만 50여 회가 넘는다고 한다. 장흥 석대들에는 며칠 동안 일본군과 밀리지 않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의 항전이 한말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부터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다. 최근 정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고 나선 것은 다행이다. 때마침 문을 여는 남도 의병박물관에 '2차 동학'을 별도의 공간에 넣어 그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자 한 것은 긍정적이다.◆의진 간 활발한 연합전선 펼쳐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은 한말 의병의 활동을 '운동'에서 '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 투쟁을 하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서울 진공작전에 나선 13도 창의군의 결성이 그것이다.한말 의병은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 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새로운 활동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후기 의병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 '창의회맹소'는 의진 간의 연합작전도 전개했다.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이 연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1907년 12월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중요 전투에서는 서로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의진의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별로 유격투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호남창의회맹소'는 여러 차례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돼 순국한 이후에는 김용구와 김태원, 김율을 중심으로 분화됐다. 1908년 4월 김태원과 김율이 순국한 이후에는 심남일·조경환·전해산·오성술·안규홍·박도경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됐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분화 모습을 통해 회맹소가 합진보다 연합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호남창의회맹소와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진 담양 금성산성◆일본 정규군과 대등한 교전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3회나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등 전남 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전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심남일·이대극·안규홍 의병 등 11개 의병부대 약 2천명이 참여했다. 심남일이 연합의진 형성에 가장 적극적이었기에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됐다. 이것은 전기·중기 의병 때 분산적으로 활동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호남동의단'의 구성은 앞뒤에서 동시에 몰아치는 '기각지세'의 형성에서 의진 간 연합전선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들은 연합작전을 수행해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구체적으로 1909년 2월 치러진 남평 덕룡산 전투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이 인솔하는 250명의 의병이 덕룡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 군경과 3시간에 걸쳐 총격전을 벌였다. 박사화 의병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강무경을 비롯해 또 다른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는 박민홍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호남의소'의 특징은 의병부대들이 강력한 의진을 구성해 일본군 정규군과 2년 가까운 독립전쟁을 치른 원동력이었다.일부 연구자들은 1909년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하지만 앞서 살펴본 여러 의병 부대의 특성을 살펴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실상을 모르고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구례 연곡사에 위치한 녹천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장기항전으로의 전환 시도앞서 1908년 13도 창의군이 결성돼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할 때 유인석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로 호응해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국내에서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당시 의병의 역량으로는 일본 군사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인석은 지구전 전략이 실패하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내륙 깊숙한 산중에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의병계열의 백두산 근거지론은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 기지론과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이러한 국외 항일투쟁 근거지론과 함께 국내 근거지론이 대두됐다. 고광순이 주창한 지리산 근거지론이 그것이다. 앞장에서 간단히 살폈지만 그는 당장의 무장 투쟁보다는 장기 항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의 수립에 고심했다. 즉, 화력에서 압도적인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해 '축예지계' 즉, 장기항전에 대비해 일정기간 예기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국내에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한 그는 지리산을 주목했다. 유인석의 중부 이북 의병들이 추진한 '북계책'과 비교된다.고광순의 항전기지 건설 구상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이 본격화될 때 이미 시작됐다.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1907.음) 8월 11일 행군해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지로 삼아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해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를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불원복' 석자를 썼다.(행장, 녹천유고, 하)'이러한 지리산 근거지론은 1908년 초 "하동군 북쪽 골짜기의 지리산은 의병의 소굴이 됐다"하고 하는 데서 살필 수 있다.영암 국사봉을 의병 지휘본부로 삼아 치열한 의병 전쟁을 치른 심남일의 '호남의소'도 이러한 장기적인 항전 기지 건설과 연결돼 있다 하겠다. 국사봉에 근거를 둔 의병부대는 산상에 설치된 포대에서 포까지 발사함으로써 일본군의 접근을 차단했다.이러한 의병부대의 장기적인 항쟁 전략이 이어지면서 의병 전쟁은 일본 정규군의 엄청난 진압 작전에도 밀리지 않은 독립전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에 있는 주먹 동상◆값진 희생, 3·1운동으로 이어져한편 의병들은 3·1운동 때 적극 참여했다. 심남일 의병부대 도통장으로 활동하다 3·1운동을 주도한 남평 출신 김도숙은 의병 수뇌부가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고 독립의군부에서 호남유사를 맡았던 김종주는 낙안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의 칼에 찔렸음에도 저항해 호남 의병의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영암 구림 3·1운동에 앞장섰던 군서 출신 정상조는 '영암 의병' 출신이었다. 역시 '영암 의병'이었던 금정 출신 민치도는 3·1운동 후 화순에서 '독립국민당'이라는 항일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이러한 의병들의 참여는 더욱 격렬하게 이 지역의 3·1운동이 전개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남 의병들이 흘린 피로 전남의 온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이들의 빛나는 독립전쟁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를 늦추게 했다. 항쟁의 에너지는 응축돼 3·1운동, 그리고 무장독립 전쟁의 토대가 됐다. 특히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농민 항일운동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현장에 전남 지역민이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전남 의병의 값진 희생이 밑거름된 것이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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