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⑬ 송석래
넓은 토지 소유한 지주의 아들
전재산 내놓고 의병전쟁 참전
김태원과 합류해 빛나는 전공
전사 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최근 광주 어등산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순항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45년간 군부대 포 사격장으로 사용된 어등산 일원을 관광단지로 조성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어등산이 지닌 역사성이 해당 사업에 어떤 형태로든 포함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적지 않은 남도 의병부대가 어등산을 배경으로 일본군과 셀 수 없는 전투를 치렀다. 위치 역시 어등산은 함평, 영광, 나주, 장성, 광주의 접경에 위치해 있다. 광주와 전남을 따로 구별할 것도 없이 '의병 전쟁의 성지'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어등산을 빛낸 한말 의병들은 셀 수 없는데, 일제가 '거괴(巨魁)'라 칭했던 김태원도 있지만 그를 도와 빛나는 의병 전쟁을 수행하다 어등산에서 김태원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의병장급 의병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나주 출신 송석래 의병장이 있다.

◆의병이 된 지주의 아들
송석래는 1875년 6월 17일(음) 나주군 다시면 송촌리 호장마을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경환, 호(號)는 서호, 본관은 은진이다. 고려 때 판원사를 지낸 송대원의 후손이다. 그는 한학(漢學)뿐만 아니라 병서에 조예가 깊었고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사격 솜씨가 뛰어나 명포수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병서에 조예가 깊고 사냥을 즐기게 된 계기는 당시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의 고향은 동학농민전쟁의 치열한 전장터였던 나주 고막원과 인접해 있다. 이 지역 유생들 가운데 동학을 지지하는 경우도 꽤 있어 관군 토벌군 사령관이 동학과 연계된 유생들 처리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동학이 지향하는 반봉건, 반외세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던 송석래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동학농민군 살육 작전을 보며 조만간 있을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895년 말 을미사변과 단발령 강요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전남에서는 1896년 2월초 나주에서 처음으로 의병이 봉기했다.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채 해산했지만, 짧았던 의병 봉기는 지역의 유생들에게 장차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1905년 11월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 설치를 담은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으며 여기에는 당대의 대표적 유학자인 최익현도 포함돼 있었다. 최익현의 봉기는 전남지역의 의병 지도자들과 연합을 이끌었으나, 최익현이 순창에서 전주 진위대에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고 체포당해 허무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후 전남 곳곳에서 최익현의 거의(擧義)를 따르는 이들이 늘어났다. 송석래도 정미의병 때 처음 거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손자 송인정의 증언에 따르면 이보다 앞서 을사늑약 체결 후인 1906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할 생각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님(송인정의 부친) 말씀에 의하면, 의병 활동 중에 일본 헌병이 눈치를 채고 수시로 집을 찾아와 할아버지(송석래) 행방을 물으면 할머니는 그때마다 작은 각시를 숨겨두고 집을 나갔다고 둘러댔다고 합니다.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옷도 갈아입으시고 음식도 가져가고 그랬다고 합니다."
밖에서 비밀리에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있었기에 집을 1주일에 한번 밖에 올지 못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생가가 있는 곳은 옛 고막원 역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나주 인근에 활동반경이 확대되고 있는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 헌병분파소가 있었다.
1909년 함평 학교면 석정리에서 일본 헌병대 40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최택현, 최병헌, 최윤용 등 수성 최씨 문중들의 빛나는 항전도 고막원 근처에서 이뤄졌다.
고막원 역 일대의 넓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송석래는 의병을 일으키려고 전 재산을 모두 내놓았다. 이 무렵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자 송석래도 은밀하게 조직한 의병부대를 공개해 일본군과 맞선 작전을 수행했다, 그를 따르는 의병 수십 명이 장군으로 추대했다. 사냥을 즐겨한 송석래는 명사수였다고 한다. 임산부가 밭일을 하고 있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쫓아가 잠자고 있는 호랑이를 사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러한 전설은 송석래의 지도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송석래는 나주를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거괴' 김태원의 중군장이 되다
비슷한 시기 송석래와 마찬가지로 나주 출신인 김태원 의병장은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일부가 돼 광주와 나주, 장성, 영광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김태원의 생가와 가깝게 있어 서로 아는 사이인 송석래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김태원 부대에 합류했다. 분진과 합진을 꾀하기 위해 별개의 독립된 진은 그대로 유지했다. 송석래는 김태원 부대의 중군장이 됐다. 송석래 부대의 합류는 김태원 부대의 사기를 크게 향상시켰다. 송석래가 중군장으로 참여한 김태원 의병부대는 영광 굴수산 전투에서 일본군 장교 2명과 수십 명의 병사들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일제는 별도의 토벌부대 10개를 만들어 이들의 뒤를 추적할 정도로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존재였다.
그러던 1908년 2월 2일 설날을 맞아 담양 무동촌에서 의병부대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설날 아침 '의병 잡는 귀신' 요시다가 이끄는 일본군 광주수비대가 이곳을 포위 공격했다. 일본 군경의 기습 공격에도 김태원과 송석래 등은 당황하지 않고 병사들을 독전해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 2명 사살, 2명 중상이라는 쾌거를 거두었다.
김태원 의병부대는, 장성 토천(토물) 전투에서도 일본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일제는 김태원 의병부대를 잡기 위해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고, 광주수비대와 헌병까지 출동시켰다.

◆혈전 끝에 어등산서 숨 거두다
1908년 3월 29일 김태원의 동생 김율이 송정리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광주 감옥에 수감됐다. 김태원은 박산 마을 뒤 어등산에서 전투 중 입은 상처를 치료하며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곳에 김태원 의병부대의 주둔 사실을 눈치를 챈 일본군이 4월 25일 포위망을 구축해 공격해 왔다. 김태원 의병부대는 일본군과 3시간 넘는 대전투를 치렀다. 한말 의병사를 빛낸 유명한 어등산 전투였다.
안타깝게도 전투에서 김태원을 포함한 의병 23명 전원이 전사했다. 김태원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활약한 송석래 의병장도 포함돼 있다.
전 재산을 내어 수십 명의 의병부대를 결성한 후, 김태원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합류해 빛나는 전과를 올렸던 송석래는 어등산을 환하게 비추는 별이 됐다.


송석래 의병장은 1996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고향 선산에는 조부의 애국심을 한없이 그리는 손자 송인정이 그날의 역사를 증언하기 위해 1998년 '순국선열 송석래 장군'의 묘비를 세웠다.
송석래는 의병 전쟁을 준비하는데 가산을 쏟아 남은 재산이 없었다. 그가 전사 순국하면서 그의 어린 3남매는 고아나 다름없이 궁핍한 생활을 했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고 강조한 이재명 대통령의 다짐이 꼭 이뤄지길 바란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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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물들인 남도 의병의 희생···항일 투쟁 밑거름으로
전해산 의병장 동상에 새겨진 최후진술.호남호국기념관 제공
동학 동민 전쟁부터 백성들은 스스로 나라의 위기를 인식하고 '의병'이라 칭했으며 이러한 정신은 한말 의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의병 운동이 조직상의 결함을 드러냈다고 폄하하지만, 남도 의병이 수년간 일본군과 대등한 교전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평소에는 소규모 부대로 유격투쟁을 벌이다가도 필요시에는 대규모 연합 의진을 구성해 전면전을 펼친 유연성에 있었다. 또 항전을 장기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의병부대들이 해체된 이후로도 3·1운동과 항일운동단체 조직, 무장독립 전쟁으로도 이어졌다.무등일보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공동기획한 '남도 의병 열전'을 마무리 하며 한말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광주 서구 농성광장에 조성된 김태원 의병장 동상◆ 동학농민전쟁의 활발한 재평가최근 순천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들을 어떻게 성격지을 것인가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해 우리의 주권을 짓밟는 것을 본 백성들은 이를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로 인식했다. 이에 신분을 떠나 하나가 돼 대일 항전에 나서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스스로를 '의려(義旅)' 곧 '의병'이라 칭했으며 '동학의병'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전남은 일본군과 처절한 항전을 한 지역 중 하나다. 발표에 따르면 전남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러진 전투만 50여 회가 넘는다고 한다. 장흥 석대들에는 며칠 동안 일본군과 밀리지 않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의 항전이 한말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부터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다. 최근 정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고 나선 것은 다행이다. 때마침 문을 여는 남도 의병박물관에 '2차 동학'을 별도의 공간에 넣어 그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자 한 것은 긍정적이다.◆의진 간 활발한 연합전선 펼쳐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은 한말 의병의 활동을 '운동'에서 '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 투쟁을 하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서울 진공작전에 나선 13도 창의군의 결성이 그것이다.한말 의병은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 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새로운 활동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후기 의병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 '창의회맹소'는 의진 간의 연합작전도 전개했다.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이 연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1907년 12월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중요 전투에서는 서로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의진의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별로 유격투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호남창의회맹소'는 여러 차례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돼 순국한 이후에는 김용구와 김태원, 김율을 중심으로 분화됐다. 1908년 4월 김태원과 김율이 순국한 이후에는 심남일·조경환·전해산·오성술·안규홍·박도경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됐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분화 모습을 통해 회맹소가 합진보다 연합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호남창의회맹소와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진 담양 금성산성◆일본 정규군과 대등한 교전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3회나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등 전남 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전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심남일·이대극·안규홍 의병 등 11개 의병부대 약 2천명이 참여했다. 심남일이 연합의진 형성에 가장 적극적이었기에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됐다. 이것은 전기·중기 의병 때 분산적으로 활동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호남동의단'의 구성은 앞뒤에서 동시에 몰아치는 '기각지세'의 형성에서 의진 간 연합전선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들은 연합작전을 수행해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구체적으로 1909년 2월 치러진 남평 덕룡산 전투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이 인솔하는 250명의 의병이 덕룡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 군경과 3시간에 걸쳐 총격전을 벌였다. 박사화 의병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강무경을 비롯해 또 다른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는 박민홍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호남의소'의 특징은 의병부대들이 강력한 의진을 구성해 일본군 정규군과 2년 가까운 독립전쟁을 치른 원동력이었다.일부 연구자들은 1909년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하지만 앞서 살펴본 여러 의병 부대의 특성을 살펴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실상을 모르고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구례 연곡사에 위치한 녹천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장기항전으로의 전환 시도앞서 1908년 13도 창의군이 결성돼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할 때 유인석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로 호응해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국내에서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당시 의병의 역량으로는 일본 군사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인석은 지구전 전략이 실패하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내륙 깊숙한 산중에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의병계열의 백두산 근거지론은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 기지론과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이러한 국외 항일투쟁 근거지론과 함께 국내 근거지론이 대두됐다. 고광순이 주창한 지리산 근거지론이 그것이다. 앞장에서 간단히 살폈지만 그는 당장의 무장 투쟁보다는 장기 항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의 수립에 고심했다. 즉, 화력에서 압도적인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해 '축예지계' 즉, 장기항전에 대비해 일정기간 예기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국내에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한 그는 지리산을 주목했다. 유인석의 중부 이북 의병들이 추진한 '북계책'과 비교된다.고광순의 항전기지 건설 구상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이 본격화될 때 이미 시작됐다.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1907.음) 8월 11일 행군해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지로 삼아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해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를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불원복' 석자를 썼다.(행장, 녹천유고, 하)'이러한 지리산 근거지론은 1908년 초 "하동군 북쪽 골짜기의 지리산은 의병의 소굴이 됐다"하고 하는 데서 살필 수 있다.영암 국사봉을 의병 지휘본부로 삼아 치열한 의병 전쟁을 치른 심남일의 '호남의소'도 이러한 장기적인 항전 기지 건설과 연결돼 있다 하겠다. 국사봉에 근거를 둔 의병부대는 산상에 설치된 포대에서 포까지 발사함으로써 일본군의 접근을 차단했다.이러한 의병부대의 장기적인 항쟁 전략이 이어지면서 의병 전쟁은 일본 정규군의 엄청난 진압 작전에도 밀리지 않은 독립전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에 있는 주먹 동상◆값진 희생, 3·1운동으로 이어져한편 의병들은 3·1운동 때 적극 참여했다. 심남일 의병부대 도통장으로 활동하다 3·1운동을 주도한 남평 출신 김도숙은 의병 수뇌부가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고 독립의군부에서 호남유사를 맡았던 김종주는 낙안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의 칼에 찔렸음에도 저항해 호남 의병의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영암 구림 3·1운동에 앞장섰던 군서 출신 정상조는 '영암 의병' 출신이었다. 역시 '영암 의병'이었던 금정 출신 민치도는 3·1운동 후 화순에서 '독립국민당'이라는 항일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이러한 의병들의 참여는 더욱 격렬하게 이 지역의 3·1운동이 전개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남 의병들이 흘린 피로 전남의 온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이들의 빛나는 독립전쟁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를 늦추게 했다. 항쟁의 에너지는 응축돼 3·1운동, 그리고 무장독립 전쟁의 토대가 됐다. 특히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농민 항일운동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현장에 전남 지역민이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전남 의병의 값진 희생이 밑거름된 것이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 국난 극복 향한 의지에 지역도 계급도 구별 없었다
- · 백운산 호랑이의 기개, 대를 이어 전해지다
- · 총상에도 투지 꺾지 않은 부대 조직의 귀재
- · 대한제국 장교, 남도 누비는 의병장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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