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잡던 지주의 아들 어등산의 별이 되다

입력 2025.09.24. 14:05 임창균 기자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⑬ 송석래
넓은 토지 소유한 지주의 아들
전재산 내놓고 의병전쟁 참전
김태원과 합류해 빛나는 전공
전사 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호남대학교 잔디축구장 입구에 세워진 어등산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석비

최근 광주 어등산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순항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45년간 군부대 포 사격장으로 사용된 어등산 일원을 관광단지로 조성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어등산이 지닌 역사성이 해당 사업에 어떤 형태로든 포함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적지 않은 남도 의병부대가 어등산을 배경으로 일본군과 셀 수 없는 전투를 치렀다. 위치 역시 어등산은 함평, 영광, 나주, 장성, 광주의 접경에 위치해 있다. 광주와 전남을 따로 구별할 것도 없이 '의병 전쟁의 성지'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어등산을 빛낸 한말 의병들은 셀 수 없는데, 일제가 '거괴(巨魁)'라 칭했던 김태원도 있지만 그를 도와 빛나는 의병 전쟁을 수행하다 어등산에서 김태원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의병장급 의병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나주 출신 송석래 의병장이 있다.

나주 고막원 역 인근에 위치한 송석래 의병장 묘

◆의병이 된 지주의 아들

송석래는 1875년 6월 17일(음) 나주군 다시면 송촌리 호장마을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경환, 호(號)는 서호, 본관은 은진이다. 고려 때 판원사를 지낸 송대원의 후손이다. 그는 한학(漢學)뿐만 아니라 병서에 조예가 깊었고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사격 솜씨가 뛰어나 명포수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병서에 조예가 깊고 사냥을 즐기게 된 계기는 당시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의 고향은 동학농민전쟁의 치열한 전장터였던 나주 고막원과 인접해 있다. 이 지역 유생들 가운데 동학을 지지하는 경우도 꽤 있어 관군 토벌군 사령관이 동학과 연계된 유생들 처리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동학이 지향하는 반봉건, 반외세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던 송석래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동학농민군 살육 작전을 보며 조만간 있을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895년 말 을미사변과 단발령 강요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전남에서는 1896년 2월초 나주에서 처음으로 의병이 봉기했다.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채 해산했지만, 짧았던 의병 봉기는 지역의 유생들에게 장차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1905년 11월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 설치를 담은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으며 여기에는 당대의 대표적 유학자인 최익현도 포함돼 있었다. 최익현의 봉기는 전남지역의 의병 지도자들과 연합을 이끌었으나, 최익현이 순창에서 전주 진위대에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고 체포당해 허무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후 전남 곳곳에서 최익현의 거의(擧義)를 따르는 이들이 늘어났다. 송석래도 정미의병 때 처음 거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손자 송인정의 증언에 따르면 이보다 앞서 을사늑약 체결 후인 1906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할 생각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님(송인정의 부친) 말씀에 의하면, 의병 활동 중에 일본 헌병이 눈치를 채고 수시로 집을 찾아와 할아버지(송석래) 행방을 물으면 할머니는 그때마다 작은 각시를 숨겨두고 집을 나갔다고 둘러댔다고 합니다.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옷도 갈아입으시고 음식도 가져가고 그랬다고 합니다."

밖에서 비밀리에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있었기에 집을 1주일에 한번 밖에 올지 못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생가가 있는 곳은 옛 고막원 역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나주 인근에 활동반경이 확대되고 있는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 헌병분파소가 있었다.

1909년 함평 학교면 석정리에서 일본 헌병대 40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최택현, 최병헌, 최윤용 등 수성 최씨 문중들의 빛나는 항전도 고막원 근처에서 이뤄졌다.

고막원 역 일대의 넓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송석래는 의병을 일으키려고 전 재산을 모두 내놓았다. 이 무렵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자 송석래도 은밀하게 조직한 의병부대를 공개해 일본군과 맞선 작전을 수행했다, 그를 따르는 의병 수십 명이 장군으로 추대했다. 사냥을 즐겨한 송석래는 명사수였다고 한다. 임산부가 밭일을 하고 있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쫓아가 잠자고 있는 호랑이를 사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러한 전설은 송석래의 지도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송석래는 나주를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송석래 의병장이 허리에 차고 다니며 다른 의병부대에 서신을 쓸때 사용한 먹물통

◆'거괴' 김태원의 중군장이 되다

비슷한 시기 송석래와 마찬가지로 나주 출신인 김태원 의병장은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일부가 돼 광주와 나주, 장성, 영광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김태원의 생가와 가깝게 있어 서로 아는 사이인 송석래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김태원 부대에 합류했다. 분진과 합진을 꾀하기 위해 별개의 독립된 진은 그대로 유지했다. 송석래는 김태원 부대의 중군장이 됐다. 송석래 부대의 합류는 김태원 부대의 사기를 크게 향상시켰다. 송석래가 중군장으로 참여한 김태원 의병부대는 영광 굴수산 전투에서 일본군 장교 2명과 수십 명의 병사들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일제는 별도의 토벌부대 10개를 만들어 이들의 뒤를 추적할 정도로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존재였다.

그러던 1908년 2월 2일 설날을 맞아 담양 무동촌에서 의병부대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설날 아침 '의병 잡는 귀신' 요시다가 이끄는 일본군 광주수비대가 이곳을 포위 공격했다. 일본 군경의 기습 공격에도 김태원과 송석래 등은 당황하지 않고 병사들을 독전해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 2명 사살, 2명 중상이라는 쾌거를 거두었다.

김태원 의병부대는, 장성 토천(토물) 전투에서도 일본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일제는 김태원 의병부대를 잡기 위해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고, 광주수비대와 헌병까지 출동시켰다.

김태원과 송석래 의병장이 최후까지 항전했던 어등산 토굴

◆혈전 끝에 어등산서 숨 거두다

1908년 3월 29일 김태원의 동생 김율이 송정리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광주 감옥에 수감됐다. 김태원은 박산 마을 뒤 어등산에서 전투 중 입은 상처를 치료하며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곳에 김태원 의병부대의 주둔 사실을 눈치를 챈 일본군이 4월 25일 포위망을 구축해 공격해 왔다. 김태원 의병부대는 일본군과 3시간 넘는 대전투를 치렀다. 한말 의병사를 빛낸 유명한 어등산 전투였다.

안타깝게도 전투에서 김태원을 포함한 의병 23명 전원이 전사했다. 김태원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활약한 송석래 의병장도 포함돼 있다.

전 재산을 내어 수십 명의 의병부대를 결성한 후, 김태원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합류해 빛나는 전과를 올렸던 송석래는 어등산을 환하게 비추는 별이 됐다.

나주 고막원 역 인근에 위치한 송석래 의병장 묘
순국선열 송성래 장군 묘비

송석래 의병장은 1996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고향 선산에는 조부의 애국심을 한없이 그리는 손자 송인정이 그날의 역사를 증언하기 위해 1998년 '순국선열 송석래 장군'의 묘비를 세웠다.

송석래는 의병 전쟁을 준비하는데 가산을 쏟아 남은 재산이 없었다. 그가 전사 순국하면서 그의 어린 3남매는 고아나 다름없이 궁핍한 생활을 했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고 강조한 이재명 대통령의 다짐이 꼭 이뤄지길 바란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연관뉴스
슬퍼요
1
후속기사 원해요
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