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최고 지략가, 연합의진 지휘하며 승리 이끌다

입력 2025.09.10. 15:28 임창균 기자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⑫ 권영회
‘호남의소’만의 ‘모사장’ 직책
효율적 의진 구성·매복전 강점
남평 거성동 전투 빛나는 전과
함평·광주·나주서 작전 지휘
나주 봉황면에 충절비 세워져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 마을 전경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한 어느 연구자는,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이들도 독립전쟁에 참여한 인물로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의 내정 간섭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이들의 활동을 독립전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동학농민군 스스로도 '동학의병'을 자처했으며 2차동학농민전쟁은 이후 한말 의병으로도 이어졌다. 특히 '정미의병'은 2차 동학농민전쟁의 연장선에 있다. 그 중심에 '남도의병'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계 최강 러시아를 격파한 일본 정예병과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벌였던 '대한제국 의병들' 대부분은 조국의 산하에 피를 뿌렸다. 이들의 빛나는 역사를 우리 세대가 정리해야 할 책무가 있다. 무등일보보가 남도의병열전을 기획한 이유다.

오는 12일에는 '호남의소' 사령관 '남일 심수택 의병장' 순국 115주년 기념식이 함평 월야면 소재의 기념관에서 열린다. 원래 행사는 의병장이 순국한 10월 4일 열렸는데, 올해는 추석연휴 관계로 일정이 당겨졌다.

이번 호는 앞서 다룬 심남일 의병장의 곁에서 연합의진을 지휘한 작전참모 권영회 의병장을 살피려 한다.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 마을 입구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에 있는 '애국지사 권영회 충절비'

◆호남의소의 두뇌 권영회 모사장

권영회 의병장은 대한제국 의병 가운데 작전 분야 최고 전문가로 손꼽힌다.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에는 '애국지사 권영회 충절비'가 있다. '의병장'이라는 빛나는 명칭을 두고 '애국지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가 활동한 '호남의소(湖南義所)'는 함평 출신인 심남일 의병장이 영암에서 활동했던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1908년 새롭게 의진을 편성한 것이다.

이 부대의 편제는 대장, 모사장, 서기 겸 모사, 도집사, 선봉장, 중군장, 후군장, 도통장, 군량장 등 기존의 정규군 부대 편제를 따랐다. 이러한 편성은 이 무렵 결성된 다른 의병부대와 비슷하나 '모사장'의 존재는 호남의소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모사장(謀事長)'은 요즘으로 말하면 군대의 '작전참모'에 해당한다. '호남의소'에서는 대장 바로 직책인 만큼 그 역할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심남일을 보필한 모사장이 바로 권영회다. 안동 권씨들 집성촌이었던 남평군 봉황면 욱곡리 구례동 출신인 그의 호는 월산, 자(字)는 택(澤)이었다.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에 있는 '애국지사 권영회 충절비'

그는 1907년 6월 기삼연(奇參衍) 의병진에서 활동하다가 기삼연이 순국하자 심남일(沈南一) 의병진에 다시 들어가 구국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빛나는 전투 일지는 판결문 및 심남일 실기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1909년 3월 8일의 남평 거성동에서 호남의소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벌인 전투는 남도 의병이 치른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심남일의 부장 강현수(무경), 박봉주, 박채홍 등이 이끄는 연합 의진과 일본군 사이에 전개된 치열한 전투였으며 여기에는 전투를 앞두고 권영회가 점을 치는 장면이 묘사된다.

'권영회가 점을 치니 점괘에 "두 호랑이가 다투어 싸우는데 서쪽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했기로, 즉시 군중에 영을 아래와 같이 내렸다. "한 부대는 동쪽 대치에 매복해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또 한 부대는 대항봉에 매복해 광주·나주·남평 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서남 간 월임치에 매복해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덕룡산(德龍山) 상봉에 매복하고, 한 부대는 병암치(屛巖峙)에 매복해 서로 응원하게 하라."'

권영회의 작전에 따라 연합 의진이 매복해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작전에는 박민홍·여홍 형제가 이끄는 의병부대도 참전했는데 다음과 같은 결과를 이끌었다.

'8시경, 능주에 있는 적 20여 명이 동쪽에서 쳐들어오므로 우리 의병부대가 일제히 사격해 적 15명을 죽였다. 10시경 광주·나주·남평에 있는 적 60명이 북쪽에서 들어와 싸움을 걸기로, 우리는 승세를 타고 추격해 적의 장수인 경무사(警武師)와 졸병 수십 명을 죽였다. 그리고 영암에서 들어온 적 10여 명은 이미 서남 간에 매복한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번 싸움에서 적을 잡은 것이 70여 명에 달했고, 우리 군사도 약간 명이 죽었는데, 특히 의병장 박민홍의 아우인 박여홍·박태환·박기춘 등이 전사했다. 여홍·태환은 박민홍의 좌·우익장이었고, 기춘은 본진 총독이었다.'

의병이 거성동 전투에서 승리한 데는 효율적인 연합 의진을 구성한 데다 적을 유인해 기습 공격하도록 작전을 세운 권영회 공이 크다.

권영회 판결문

◆의병부대 옮기며 만들어낸 승리

권영회의 공적은 그가 체포된 이후 남아 있는 판결문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피고(권영회)는 융희 2년(1908년) 7월 26일에 폭도 수괴 심남일(沈南一)이가 총 약 60정을 휴대한 도당 약 60~70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해 모사(謀士)라는 명목의 책임을 맡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년 10월(음력 9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해 전라남도 영광·강진·장흥·남평 등 각 군내에서 군대·헌병대·순사대의 진무(鎭撫)에 대해 5회에 걸쳐서 반항해 위 수괴 심남일의 폭동 행위를 방조했다."

이에 따르면 1908년 7월 영암으로 이동한 심남일이 부대를 결성할 때 권영회가 '모사', 곧 작전참모의 역할을 맡아 10월까지 4개월간 영광, 강진, 장흥, 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음을 알려준다.

권영회가 '모사'로서 역할을 수행한 곳으 심남일 부대에만 그치지 않는다. 다음 판결문에서는 권영회가 그해 10월 무렵 조경환의 부대로 옮겨 12월까지 '모사'를 맡았음을 말하고 있다.

'피고는 동년 10월경(음력 9월경)에 폭도 수괴 조경환이 총 약 1백여 정을 휴대한 도당 약 1백여 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해 모사(謀事)라는 명목의 책임을 맡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년 12월경(음력 11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해 동도 함평·광주 등 각 군내에서 헌병의 진무에 대해서 4회에 걸쳐서 반항해 위 수괴 조경환의 폭동행위를 방조했다.'

이어 같은해 12월에는 조경환의 부대를 떠나 박민홍의 참모장이 돼 이듬해 3월까지 부대를 이끌었다.

'피고는 동년 12월경에 폭도 수괴 박민홍(朴珉洪)이가 총 약 40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50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해 참모장이라는 명목의 책임을 지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 3년 3월경(음력 2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해 동도 나주·남평 등 각 군내에서 일본군대의 진무에 대항해 2회에 걸친 위 수괴 박민홍의 폭동 행위를 방조했다.'

위의 판결문을 통해 권영회는 심남일, 조경환, 박민홍 등 주요 의병부대를 옮겨 다니며 작전계획을 수립한 전문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여러 의병부대가 각기 독립된 부대를 바탕으로 연합의진을 구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마다 권영회가 이들 의진을 옮겨 다니며 연합작전을 지휘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권영회가 의병부대를 오가며 연합작전으로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모사장 직을 신설한 심남일 의병장의 탁월한 지휘력이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동요 속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무경)는 풍운 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라는 가사는 변화무쌍한 작전을 구사한 호남의소 의병들의 활약상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처럼 빛나는 공적을 쌓은 권영회는 1909년 장흥군 눌양리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체포됐다. 1910년 4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은 그는 이에 불복해 공소했으나 기각됐으며 그해 7월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권영회는 단순한 의병이 아니라, 당시 의병전쟁의 전술적 두뇌로서 연합의진을 이끌었던 작전참모였다. 그의 삶은 남도 의병의 전투가 결코 무모한 희생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오늘날 우리가 그를 다시 기억하는 이유는, 그 지략과 희생이 지금도 독립과 자유의 의미를 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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