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⑩ 양회일
국치 설욕 다짐하며 격고문 띄워
화순 중동마을 의병기지로 변모
유배형 받고 ‘거의’ 정당성 주장
옥중 순국 후 이백래가 뜻 이어
광복 80주년, 의병 유산 재조명

화순군 이양면에는 특별한 사적지가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중리에 위치한 쌍봉사다. 국보57호로 지정된 철감선사탑이 있어 수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쌍봉사 외에 또 다른 가볼 만한 곳은 유명한 보물도, 오래된 건축물도 없는 곳이다. 바로 의병 전적지로는 드물게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쌍산의소'다.
예전부터 현지 주민들은 계당산 일대를 '쌍산'이라 불렀는데 의병장 양회일이 의병부대 주둔지로 머문 곳이 '쌍산의소'다. 양회일 의진을 비롯해 1908년 1월부터는 이백래를 주축으로 한 호남창의소가 설치돼 1909년까지 항일 투쟁을 펼쳤던 장소이다.

◆나라 위해 몸 바친 선비의 결의
양회일(1833∼1908) 의병장의 호는 행사(杏史)로, 화순군 능주 오류촌(현 화순군 이양면 속촌)에서 태어났다. 학문에 뜻이 있어 한양에 올라가 공부를 하던 그는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귀향했다. 그의 본래 성정은 당당하고 기품있는 선비였으나 나라의 위기는 그를 기나긴 무쟁 투쟁으로 이끌었다.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 입구 세워져 있는 양회일 의병장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선생은 10세에 '푸른 솔 높고 곧은 마디 가을인들 어찌하랴. 밝은 달 맑은 혼은 밤에도 훤하네'라고 노래했는데, 일생이 이와 같이 푸르고 높고 곧으며 밝고 맑았다. 계당산을 바라보며 '충의의 백성들이여 원수에게 잡혀 부림을 당하겠는가! 오직 죽음뿐이라' 한 선생의 맹서를 떠올리니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부끄러움에 글을 더할 수 없다.'
양회일의 행적은 행사의 창의 사실을 기리고자 유학자들이 1950년 펴낸 '행사실기'에 잘 드러나 있다.
귀향 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양회일은 산중에 들어가 5년 동안 은둔하며 제자를 키웠다. 이후 을사늑약이 일어나자 가산을 정리하고 친동생 양회룡을 비롯해 양열묵, 이동화, 박기년, 양상길, 정순학, 서필환, 양동진 등과 함께 항일 투쟁을 결의했다.
이 무렵 장성에서 거의를 한 고광순, 기삼연과 힘을 합하기로 한 양회일은 1907년 3월 3일'맹주 양모(梁某)'의 이름으로 '격고문(檄告文)'을 띄워 의병 모집에 나섰다.
격문에는 '군부(君父)가 훼손을 당하고 국모가 화를 입으면 인신(人臣)된 자는 마땅히 원수를 갚아야 하는 데 병자년 통상 이후 갑오년과 을미년의 멸의와 비통을 당했으며, 을사년의 변괴로 5백 년의 사직과 3천 리 강토가 다 무너졌고, 민영환, 조병세, 송병선, 최익현 등의 원로들이 순국했으니, 우리 모두 일어나서 왜적을 물리치고 역신들을 응징하기 위해 3월 상순에 쌍산의소에 참여하라'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양회일은 이광언·이백래·이항선·임창모 등 지사들과 격문을 보고 찾아온 의병 100여 명과 능주 계당산에 의진(쌍산의소)을 설치하고 다음 달인 1907년 4월 21일 거의했다.


◆성벽 쌓으며 철저한 투쟁 준비
쌍산의소 결의는 당시 능주군 도림면 증동 마을 참봉 임노복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임노복은 일찍이 비분강개의 뜻을 품고 계당산에 은거하고 있다가 행사의 거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 증동 마을은 의병 기지로 변모했다. 대장간을 이용해 무기를 제작하거나 훈련에 열중했다. 이때 쌍산의진의 주요 직책은 맹주 양회일을 필두로 총무 양열묵, 참모 임상영·박중일·양수목, 서기 이병화, 도통장 이광언, 부통장 노현재, 선봉장 임창모, 부장 신재의, 중군장 안기환, 후군장 최기표, 호군장 임노복·안찬재, 포군장 유병순 등으로 편성됐다.
쌍산의소의 의병들은 막사를 짓고 그 주변에 둘레 1㎞의 의병성을 건설했다. 주변에 무기 제작을 위한 대장간을 마련하고, 탄약의 재료인 유황을 생산해 굴을 파고 이를 저장했다.
양회일은, 을사오적을 섬멸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국가의 수치를 설욕할 것과 엄정하게 행동할 것을 맹서하는 '서고군중문(誓告軍中文)'을 발표했다.
의병들에게 밝히는 맹서문의 전문(前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무릇 맹세를 같이한 사람들은 모두 나의 말을 들어라. 국가의 대세가 위험하도다! 이에 이르러 당당하고 충성스러우며 의로운 백성으로서 차마 원수들이 부리는 대로 살육이 되는 비참한 꼴을 당해야만 하겠는가! 이렇게 됨은 죽음만 있을 뿐이니 사로잡혀 우리 백성이 멸망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해 대란을 토평하지 않으리오. 이에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니, 원컨대 각자 마음을 가다듬고 임을 합해 임금님께 나아가 명을 청해 오적(五賊)을 섬멸하고, 이등박문을 죽여 국치를 설욕하고 천하의 대의를 밝힌다면 매우 다행할 것이다.'
이밖에도 군자금은 양회일이 준비했으므로 이를 빙자해 백성들에게 침탈하지 말 것, 의병은 대의명분이 중요하므로 평민들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 선봉, 중군, 후군의 지휘관은 각자의 임무를 유념할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양회일은 거병할 때 명분을 매우 중시했고, 부대원들의 일사분란한 지휘체계 확립을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항전 불씨 이어간 기개와 희생
양회일이 조직한 의진에는 이미 명망이 있던 하동 출신 이광언이 도통장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 광양 출신 유병우가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합류하자 부대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4월 22일에는 양회일이 의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능주군아와 일본 헌병분파소를 습격해 총기 6정, 군도 3자루, 실탄 500여발을 노획했다. 이 같은 전과는 '행사실기'뿐만 아니라 일본측 기록인 '전남폭도사'에도 기록돼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 전투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얻었으나 양회일 의진은 추격해 오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아끼는 의병 정세현이 전사하고, 양회일·임창모·이백래·안찬재·유태경·신태환 등 6명의 의병 지도자가 체포됐다. 이 전투지가 화순과 광주 경계를 이룬 너릿재로 추정되고 있다.
6명의 지도자는 재판에 회부됐는데, 양회일과 임창모는 유형 15년, 이백래·안찬재·유태경·신태환은 유형 10년이 선고됐다. 유배지는 신안 지도였다. 유배된 지 5개월 만인 1907년 12월 3일 순종황제의 즉위 기념 사면 조칙에 따라 석방됐다.
석방된 후에도 양회일은 거의의 정당성을 주장하다 1908년 5월 강진분견소, 6월 장흥분견소에 압송돼 기혹한 조사를 받았다. 장흥 분견소에서 있었던 고문에 항의하는 단식을 하다 단식 7일 만에 6월 24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양회일은 마지막 순간 일본 헌병에게 "내가 비록 죽는다 해도 천하의 의사들을 너희가 모조리 죽일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
6의사 가운데 한명인 이백래는 유배지에서 돌아오자 다시 거의를 위해 노력했다. 1908년 1월 21일 기존 쌍산의진 의병과 전남 동북부 지역 의병을 규합해 호남창의소를 구성했으며 같은 보성 출신 안규홍이 결성한 의진과 연합작전을 펼쳤다. 1908년 2월 21일 장흥경찰서를 습격했고, 9월 20일에는 보성 복내의 헌병 분파소를 습격했다. 하지만 그는 장흥 배산 헌병분파소의 습격을 받아 1909년 5월 17일 피체됐다. 5월 20일 피살, 순국했다.
정부는 양회일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백래에게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지난 12일 전남도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도민공모를 통해 '항일독립유산' 8건을 도 지정 문화유산으로 짖어했는데 여기에는 '화순 양회일 항일 의병 유산'도 포함됐다. 화순 양회일 항일 의병 유산은 순의비, 옥중 간찰, 문집 등으로 구성돼 의병사와 문학사에서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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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 철도, 기숙사까지 허허벌판에 들어선 도시
1934년 경성일보가 8월 10일자로 보도한 종연방적 광주공장 설계 개요와 관련한 기사 내용은 조선 제일의 대공장으로서 기대감을 드러냈다.당시 임동공장 설계 보도에 따르면 철근 철골콘트리트 벽돌 구조물(일부 지하층) 총 연건평 칠천팔백삼십팔평, 굴뚝은 철근콘크리트, 건물 이십구평, 창고는 철근콘크리트 벽돌 건물 구백구십일평, 창고 블라트폼 철골조 일백십팔평, 부속건물 목조 팔백팔평이다. 시멘트, 목재, 벽돌 등 재료는 회사 지급을 활용, 총공사비는 100만엔이다. 임동공장 공사비 100만엔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300억원에서 900억원 사이로 추산된다. 당시 은행원이나 관원의 일반적 월급에 대입할 경우 1엔은 약 4만원에서 6만원에 해당된다.임동공장 보존건물 선정 TF를 이끈 천득염 전남대 명예교수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건물이 미적으로 뛰어난 것보다 한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상징하는 양면적 평가가 엇갈리는 곳이다”며 “공장안에는 발전소, 변전소, 자재창고, 철도 등 복합시설이 갖춰진 또 하나의 도시였다”고 평가했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연간 1천800만근(1만1천t)의 목화량이 필요한 것으로 설계됐다.1934년에서 1935년 당시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 따르면 임동공장은 조선 제일의 면화산지인 전남지역 연간 목화 수확량을 모두 투입해도 240일 가동량에 그쳤다. 공장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웅장한 건물에는 수 천명의 인력을 운영할 방직시설이 갖춰져 있었다.부산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 다음으로 전국 섬유업체 중 규모나 인력구성에 있어 큰 회사였다. 전통적 농업중심의 판을 깨는 산업시설이었다.러시아 건축사가 설계한 톱니모양 지붕을 얹은 형태의 직물 생산 공장 면적은 축구장 5개가 들어설 만큼 넓었다. 지붕은 한쪽 직각을 이루고, 반대쪽은 40% 기울기를 보였다. 북향 채광창을 둔 톱니형 지붕은 직사광선을 피하면서 작업장에 일정한 자연광을 들이기 위한 방직공장 특유의 설계였다. 온도 변화를 줄여 방적 과정에서 실이 끊어지는 것을 막는데도 유리했다.생산구역에서 작업실은 원활한 방적 방직공정에 맞춰 배치됐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건물은 1층이었다. 원자재, 반제품, 완제품을 반입하고, 이동하는데 인력이 적게 들게 하기 위한 설계였다. 목화묶음이 공장안으로 들어오면 여러 단계의 방적공정을 거쳐 실이 되고 다시 직조공정을 거쳐 무명베로 만들어졌다.그러면 수천명이 24시간 기계를 돌리는 공장은 어떻게 움직였을까.임동공장에서는 기계를 돌리는 전기는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200평의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발전소는 무연탄을 원료로 2천500㎾급 전력을 생산했다. 화력과 불을 사용해 증기를 발생시키는 기력발전소는 방적공장의 전기공급을 위한 산업용 민간 자가 발전시설이었다. 연료인 무연탄은 화순탄광에서 철도를 통해 공장 내부까지 들여왔다. 공업용수는 영산강 물을 사용했다. 화재에 대비해 고가수조까지 뒀다.보일러실의 고가 수조는 당초 2개였다. 화재발생시 진압하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였다. 물은 광주천이 아닌 영산강에 취수시설을 설치, 끌여왔다. 조선총독부는 거대한 임동공장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물을 영산강 수계에서 대규모 취수토록 했다.조선총독부와 전남도가 당시 지역 농민들의 농업용수나 자연생태계보다 일본 독점자본의 공장 가동을 최우선으로 막대한 인프라 특혜를 제공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국가기록원에는 전남도가 종연방적 임동공장으로 영산강의 물을 끌어들이는 공작물 설치 및 허가를 한 문서가 남아있다. 고가수조는 방직물의 특성상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않으면 공장 전체가 타버릴 우려가 있어 이에 대비한 중요한 시설이었다.1935년 공장 준공때부터 운행된 철도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의 주요한 운송 인프라였다. 화순탄광 석탄과 원료와 면제품 수송을 위해 개설됐다. 화순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은 트럭에 실려 화순역까지만 수송됐고, 이후 열차에 실려 광주역을 거쳐 공장 내부 발전소까지 운반됐다.광주역은 현재 전남광주특별시 동구 대인동에 자리잡은 동부소방서 자리이다. 철도는 또한 면화와 제품을 외부로 실어날랐다. 1960년대 광천동 공단까지 연장돼 산업물자 수송에 활용되다가 1990년 폐쇄됐다.그러나 발전소도 철도도 스스로 공장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거대한 생산도시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수천명의 노동자였다. 그 대부분은 젊은 여성들이었다.이들의 주거시설은 기숙사였다. 임동공장은 적게는 2천명, 많게는 4천명의 노동자가 근무했다. 대다수 여성이었다. 노동자들의 숙소용으로 쓰인 기숙사는 여성용 목조단층건물 8동, 남자용 1동 사택 50호가 있었다. 1개동마다 16개의 방이 있었고, 각 방에는 14~15명이 수용됐다. 단순 계산하면 여성 노동자 약 1천800~1천900명을 동시에 수용할수 있는 규모다.여성 기숙사는 건물의 중심부에 위치, 수많은 건물과 담에 포위된 양상을 띠었다. 이 기숙사들은 종연방적이 1961년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두 개 회사로 분리 당시에 남측 기숙사는 전남방직, 북측 시설과 공간은 일신방직으로 넘어갔다. 1980년 발행된 광주시사에는 ‘1961년 전방과 일신방직으로 분리된 두 회사는 남측에 전방, 북측에 일신방직이 자리잡았다’고 기록돼 있다,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 기숙사는 1970년 철거됐다. 이후 기숙사는 철근콘트리트로 지어졌고,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규모는 아니었다.공장은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공장 내부와 주변에는 기숙사뿐만 아니라 수영장, 종교시설, 학교까지 들어섰다. 생산시설로 출발한 종연방적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확장된 것이다. 1938년 공장내에 수영장이 건설됐다.광주에서 받은 혜택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명목이었다. 1945년 11월에는 전방교회가 김형남에 의해 설립됐다. 전방교회는 기숙사 2층에서 예배를 시작으로 유치원으로 장소를 옮겼고, 1948년 예배당을 신축했다.2002년까지 방직공장 서쪽에는 전남중·고가 있었다. 전남중·고는 1951년 문을 연 광주공과기술학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공과기술학교는 방직공장이 세운 사립학교였다. 공과기술학교는 1958년 전남중학교로 변경했다.1935년 일본 자본이 세운 공장에 해방 이듬해 노동자 1천700명이 15m 태극기게양대를 세웠다. 노동자들이 뜻과 돈을 모아 일본 자본이 세운 회사에 국권회복의 상징을 세운 것이다. 건물 대부분은 이제 사라졌고 태극기 게양대도 개발을 위해 철거돼 보관중이다.1930년대 이후 280여채에 달했던 건물은 이제 5개 시설만 남았다. 발전소도 철도도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목조 기숙사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건물만으로 종연방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거대한 공장을 하루 24시간 움직인 중심에는 기계앞에 섰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있었다.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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