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 주먹' 담살이 의병장, 신분 초월한 항일투쟁

입력 2025.07.31. 09:30 임창균 기자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⑨ 안규홍
‘머슴출신’ 후기 의병 대표 사례
재물 탐한 강용언 의병장 처단
부정 관리·토호 제거에도 앞장
분진·합진 등 다양한 전략구사
심남일 의진과 연합작전 벌여
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에 있는 안규홍 의병장 동상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의병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전남 지역에서도 농촌 지식인과 머슴 출신들이 중심이 된 의병 조직이 활발히 전개됐다. 그중 담살이(머슴)에서 의병장이 돼 전남 들녘을 뒤흔든 사내가 있었다. 안규홍은 머슴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돼 보성과 순천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독자 의진을 꾸린 그는 군기를 엄격히 유지하며 친일세력 척결과 농민 보호에 앞장섰다. 수차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그는 심남일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체포 후 순국한 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계급의 벽을 넘어선 안규홍은, 강고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민중의 대표였다.

◆ 양반에서 농민들로 번진 후기 의병

1907년 가을부터 본격화된 후기 의병의 봉기는, 그해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다음 달 기습적으로 행한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외교를 통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자 한 고종은, 퇴위되기 한달 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국제사회에 직접 호소했다. 고종의 신임장을 받고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이준·이위종은 일제의 방해로 회담장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이위종은 7월 9일 신문기자단 앞에서 '한국의 호소'라는 주제의 연설을 했고, 비탄 속에서 식음을 전폐하던 이준은, 닷새 뒤 그곳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으로 강제 퇴임한 고종의 뒤를 이어 7월 20일 즉위한 순종 황제는 이른바 정미7조약으로 알려진 '한일신협약'을 일제와 체결한다. 이 협약의 '부수각서'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8월 1일 전달된 해산 명령을 서울 시위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거부하고 자결했으며 중대장 오의선 정위도 뒤를 따라 자결했다.

남상덕 참위는 부하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했다. 해산군인들의 목표가 정해진 셈이다.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된 해산군인들의 항전은 원주·강화·홍주·진주 진위대로 확대돼 갔다. 이들이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의병 전투력은 크게 강화됐다. 이제 의병 항쟁은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전개된 사실상 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전남 지역에서도 1907년 가을 기삼연, 김용구 등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는 등 곳곳에서 의진 결성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이 무렵 결성된 의진은, 이전에 의진을 이끌었던 전통적 성리학자가 아닌 농민과 다름이 없는 농촌 지식인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사실상 주도 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담살이 곧 머슴 출신이 전남 서부 일대의 대표적 의병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바로 안규홍 의병장이다.

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에 있는 주먹 동상

◆ 무시받던 머슴에서 존경받는 의병장으로

안규홍은 나이 어린 머슴을 뜻하는 '담살이'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보성의 명문 죽산 안씨 문중 출신이기에 단순한 '담살이'로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1879년 4월 10일 그는,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태어났다. 부친 안달환은 정실 선씨 사이에 2남 1녀, 부실(副室) 정씨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안규홍은 부실 소생이었다. 부친이 죽자 모친 정씨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문덕면 법화마을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사는 친척 박제현의 집에서 안규홍은 담살이를 했다.

안규홍은 이 무렵 의병을 가장한 도적이 심해지자 법화마을에서 도적을 방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그는, 좀도둑이 아니라 나라를 도둑질하는 일제와 맞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안규홍이 "비록 우리가 남의 집 머슴살이지만 국민이 되기는 일반인데, 나랏일이 위급할 때를 당해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 것인가"라며 거병했을 때,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대부분 머슴이거나 가난한 농민이었다. 양반, 유생들은 머슴인 안규홍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수치로 여길 정도였다.

다음은 안규홍에 대한 신문 기록인데, 이를 통해 거병 목적, 거병 시기, 활동 지역 등을 알 수 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평화적 수단으로 지도 개발하지 아니하고, 병력으로써 이를 압박함으로써 그 불의를 징계하고자 해 융희 1월 7일 의병을 일으켰는데 최초는, 흥양, 순천 등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국정을 말해 점차 100명 가량의 부하를 모았다.(한국독립운동사)'

의진을 결성하고 있던 안규홍은, 강원도 출신으로 순천 일대에서 활동 중인 강용언 의병부대에 합류해 세력 규합을 꾀했다. 그러다 강용언이 재물을 탐하고 포악해 인심을 잃자 안규홍은, 그를 즉결 총살했다. 1908년 4월 의병장에 추대된 그는 이후 서울에서 내려온 해산군인 오주일 등 수십 명을 포섭했다. 비로소 지역의 지리와 연고, 전술·전략·무기, 풍부한 전투경험의 삼박자가 갖추어진 의병 부대가 탄생하게 됐다. 이때의 사정이 일본군 기록에 자세히 보인다.

'거괴(巨魁) 안규홍.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 31세, 융희 2년 4월 순천 부근을 점거한 강용언의 부장으로 있다가 동년 5월 어떤 일로 해서 강(용언)을 원망, 그를 죽이고 스스로 수괴가 돼 보성군을 중심으로 각 군을 날뛰었다. 그 세력이 한창일 때는 부하가 2백 명이 넘었고, 전해산·심남일과 나란히 폭도 거괴 중 첫째가는 인물이다.'(전남폭도사)

강용언을 죽이고 부대를 새롭게 편성한 안규홍은, 군기를 엄하게 했다. 이러한 모습은, 다음 내용에서 알 수 있다.

'전라남도 통신에 따르면, 보성군에 사는 담살이라고 하는 안 아무개가 의병을 많이 모집해 그 고을 안에 주둔하나, 백성에게는 침범하는 일이 추호도 없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 5.20)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에 세워진 안규홍 의병장 파청승첩비

◆ 순천·보성 등지서 치열한 전투 벌여

안규홍 의진은 크게 세 방향으로 활동했다. 첫째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와 탐학한 토호의 제거에 앞장섰다. 1908년 8월 25일 장흥 유치에서 세금 탈취를 시작으로 부재지주의 소작료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충당하고 가난한 농민에게 배부했다. 둘째는 일진회와 같은 친일 세력의 처단과 제거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의병을 밀고하고 일본에 협력하는 일진회 회원들은 가차 없이 총살했다. 1909년 순천 기습작전에서 초반의 전세가 점차 기울자 원인을 파악하고 일본인 첩보대장을 사살했다. 8월에는 270여 명의 의병을 총동원해 순천군 낙서면 상우리 소재 일진회를 습격해 친일세력을 처단했다.

안규홍은 여러 차례 일본군과 치른 전투에서 승리했다. 1908년 4월 26일, 보성군 득량면 파청 비들 고개에서 매복 기습작전을 시작으로, 1909년 10월 13일 보성군 복내면 묵석산 전투에 이르기까지 일본군과 20여 차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화력과 전투력이 뛰어난 일본 군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분진과 합진 등 다양한 방략을 구사했다. 1909년 5월 이후 심남일과 연합전선을 꾀하고자 여러 차례 모였다. 당시 둘이 인솔하는 의병은 약 200여명이었다.

심남일이 의진을 이끌고 보성까지 진출해 안규홍 의진과 연합 작전을 전개한 것은 남도 의병의 대표적인 특징인, 분진과 합진을 안규홍이 펼쳤음을 보여준다.

안규홍은 독자적인 부대를 이끌고, 때로는 다른 의진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며 활동했다. 안규홍 의진은 양반 유생 중심의 의병운동에서 탈피해 대중적 기반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신분을 초월한 대등한 관계에서 의진이 형성되다 보니 의진 간의 유기적 연대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09년 9월 25일, 안규홍 의병장은 부장 염재보 등과 함께 체포돼 1910년 순국했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일제의 감시로 유해를 모시지 못하다가 1923년에 비로소 보성군 조성면 은곡리에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 지냄)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가 처음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득량면 예당리에는 1947년 '의사안공파청승첩비'가 건립돼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벌교읍 초입부의 선근공원에는 안규홍 의병장 동상과 주먹 모양 동상이 주민과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벌교 100년사'에는 다음과 벌교주민(한만호, 손공현)의 같은 구술이 있다.

보성군 조성면 은곡리에 모셔진 안규홍 의병장 묘소

'일본 헌병들이 조선사람 장사꾼들을 발로 걷어차고, 짐짝들을 막 집어던져 불면서 횡포를 부리고 있었던 모양이여. 이걸 보고 못 참은 안 대장이 지겟짐을 떡 받쳐놓고 쫓아와서, 그대로 주먹으로 대그빡 헐 것 없이 몇 대 쳐분께 그냥 쫙 뻗어불드라여.'

흔히 말하는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마라'는 이야기는 안규홍 의병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머슴에서 출발해 남도 의병의 중심이 된 안규홍은,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어 민중과 함께한 항일 무장 투쟁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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