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⑨ 안규홍
‘머슴출신’ 후기 의병 대표 사례
재물 탐한 강용언 의병장 처단
부정 관리·토호 제거에도 앞장
분진·합진 등 다양한 전략구사
심남일 의진과 연합작전 벌여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의병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전남 지역에서도 농촌 지식인과 머슴 출신들이 중심이 된 의병 조직이 활발히 전개됐다. 그중 담살이(머슴)에서 의병장이 돼 전남 들녘을 뒤흔든 사내가 있었다. 안규홍은 머슴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돼 보성과 순천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독자 의진을 꾸린 그는 군기를 엄격히 유지하며 친일세력 척결과 농민 보호에 앞장섰다. 수차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그는 심남일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체포 후 순국한 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계급의 벽을 넘어선 안규홍은, 강고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민중의 대표였다.
◆ 양반에서 농민들로 번진 후기 의병
1907년 가을부터 본격화된 후기 의병의 봉기는, 그해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다음 달 기습적으로 행한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외교를 통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자 한 고종은, 퇴위되기 한달 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국제사회에 직접 호소했다. 고종의 신임장을 받고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이준·이위종은 일제의 방해로 회담장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이위종은 7월 9일 신문기자단 앞에서 '한국의 호소'라는 주제의 연설을 했고, 비탄 속에서 식음을 전폐하던 이준은, 닷새 뒤 그곳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으로 강제 퇴임한 고종의 뒤를 이어 7월 20일 즉위한 순종 황제는 이른바 정미7조약으로 알려진 '한일신협약'을 일제와 체결한다. 이 협약의 '부수각서'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8월 1일 전달된 해산 명령을 서울 시위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거부하고 자결했으며 중대장 오의선 정위도 뒤를 따라 자결했다.
남상덕 참위는 부하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했다. 해산군인들의 목표가 정해진 셈이다.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된 해산군인들의 항전은 원주·강화·홍주·진주 진위대로 확대돼 갔다. 이들이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의병 전투력은 크게 강화됐다. 이제 의병 항쟁은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전개된 사실상 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전남 지역에서도 1907년 가을 기삼연, 김용구 등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는 등 곳곳에서 의진 결성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이 무렵 결성된 의진은, 이전에 의진을 이끌었던 전통적 성리학자가 아닌 농민과 다름이 없는 농촌 지식인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사실상 주도 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담살이 곧 머슴 출신이 전남 서부 일대의 대표적 의병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바로 안규홍 의병장이다.

◆ 무시받던 머슴에서 존경받는 의병장으로
안규홍은 나이 어린 머슴을 뜻하는 '담살이'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보성의 명문 죽산 안씨 문중 출신이기에 단순한 '담살이'로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1879년 4월 10일 그는,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태어났다. 부친 안달환은 정실 선씨 사이에 2남 1녀, 부실(副室) 정씨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안규홍은 부실 소생이었다. 부친이 죽자 모친 정씨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문덕면 법화마을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사는 친척 박제현의 집에서 안규홍은 담살이를 했다.
안규홍은 이 무렵 의병을 가장한 도적이 심해지자 법화마을에서 도적을 방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그는, 좀도둑이 아니라 나라를 도둑질하는 일제와 맞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안규홍이 "비록 우리가 남의 집 머슴살이지만 국민이 되기는 일반인데, 나랏일이 위급할 때를 당해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 것인가"라며 거병했을 때,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대부분 머슴이거나 가난한 농민이었다. 양반, 유생들은 머슴인 안규홍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수치로 여길 정도였다.
다음은 안규홍에 대한 신문 기록인데, 이를 통해 거병 목적, 거병 시기, 활동 지역 등을 알 수 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평화적 수단으로 지도 개발하지 아니하고, 병력으로써 이를 압박함으로써 그 불의를 징계하고자 해 융희 1월 7일 의병을 일으켰는데 최초는, 흥양, 순천 등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국정을 말해 점차 100명 가량의 부하를 모았다.(한국독립운동사)'
의진을 결성하고 있던 안규홍은, 강원도 출신으로 순천 일대에서 활동 중인 강용언 의병부대에 합류해 세력 규합을 꾀했다. 그러다 강용언이 재물을 탐하고 포악해 인심을 잃자 안규홍은, 그를 즉결 총살했다. 1908년 4월 의병장에 추대된 그는 이후 서울에서 내려온 해산군인 오주일 등 수십 명을 포섭했다. 비로소 지역의 지리와 연고, 전술·전략·무기, 풍부한 전투경험의 삼박자가 갖추어진 의병 부대가 탄생하게 됐다. 이때의 사정이 일본군 기록에 자세히 보인다.
'거괴(巨魁) 안규홍.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 31세, 융희 2년 4월 순천 부근을 점거한 강용언의 부장으로 있다가 동년 5월 어떤 일로 해서 강(용언)을 원망, 그를 죽이고 스스로 수괴가 돼 보성군을 중심으로 각 군을 날뛰었다. 그 세력이 한창일 때는 부하가 2백 명이 넘었고, 전해산·심남일과 나란히 폭도 거괴 중 첫째가는 인물이다.'(전남폭도사)
강용언을 죽이고 부대를 새롭게 편성한 안규홍은, 군기를 엄하게 했다. 이러한 모습은, 다음 내용에서 알 수 있다.
'전라남도 통신에 따르면, 보성군에 사는 담살이라고 하는 안 아무개가 의병을 많이 모집해 그 고을 안에 주둔하나, 백성에게는 침범하는 일이 추호도 없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 5.20)

◆ 순천·보성 등지서 치열한 전투 벌여
안규홍 의진은 크게 세 방향으로 활동했다. 첫째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와 탐학한 토호의 제거에 앞장섰다. 1908년 8월 25일 장흥 유치에서 세금 탈취를 시작으로 부재지주의 소작료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충당하고 가난한 농민에게 배부했다. 둘째는 일진회와 같은 친일 세력의 처단과 제거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의병을 밀고하고 일본에 협력하는 일진회 회원들은 가차 없이 총살했다. 1909년 순천 기습작전에서 초반의 전세가 점차 기울자 원인을 파악하고 일본인 첩보대장을 사살했다. 8월에는 270여 명의 의병을 총동원해 순천군 낙서면 상우리 소재 일진회를 습격해 친일세력을 처단했다.
안규홍은 여러 차례 일본군과 치른 전투에서 승리했다. 1908년 4월 26일, 보성군 득량면 파청 비들 고개에서 매복 기습작전을 시작으로, 1909년 10월 13일 보성군 복내면 묵석산 전투에 이르기까지 일본군과 20여 차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화력과 전투력이 뛰어난 일본 군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분진과 합진 등 다양한 방략을 구사했다. 1909년 5월 이후 심남일과 연합전선을 꾀하고자 여러 차례 모였다. 당시 둘이 인솔하는 의병은 약 200여명이었다.
심남일이 의진을 이끌고 보성까지 진출해 안규홍 의진과 연합 작전을 전개한 것은 남도 의병의 대표적인 특징인, 분진과 합진을 안규홍이 펼쳤음을 보여준다.
안규홍은 독자적인 부대를 이끌고, 때로는 다른 의진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며 활동했다. 안규홍 의진은 양반 유생 중심의 의병운동에서 탈피해 대중적 기반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신분을 초월한 대등한 관계에서 의진이 형성되다 보니 의진 간의 유기적 연대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09년 9월 25일, 안규홍 의병장은 부장 염재보 등과 함께 체포돼 1910년 순국했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일제의 감시로 유해를 모시지 못하다가 1923년에 비로소 보성군 조성면 은곡리에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 지냄)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가 처음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득량면 예당리에는 1947년 '의사안공파청승첩비'가 건립돼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벌교읍 초입부의 선근공원에는 안규홍 의병장 동상과 주먹 모양 동상이 주민과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벌교 100년사'에는 다음과 벌교주민(한만호, 손공현)의 같은 구술이 있다.

'일본 헌병들이 조선사람 장사꾼들을 발로 걷어차고, 짐짝들을 막 집어던져 불면서 횡포를 부리고 있었던 모양이여. 이걸 보고 못 참은 안 대장이 지겟짐을 떡 받쳐놓고 쫓아와서, 그대로 주먹으로 대그빡 헐 것 없이 몇 대 쳐분께 그냥 쫙 뻗어불드라여.'
흔히 말하는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마라'는 이야기는 안규홍 의병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머슴에서 출발해 남도 의병의 중심이 된 안규홍은,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어 민중과 함께한 항일 무장 투쟁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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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물들인 남도 의병의 희생···항일 투쟁 밑거름으로
전해산 의병장 동상에 새겨진 최후진술.호남호국기념관 제공
동학 동민 전쟁부터 백성들은 스스로 나라의 위기를 인식하고 '의병'이라 칭했으며 이러한 정신은 한말 의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의병 운동이 조직상의 결함을 드러냈다고 폄하하지만, 남도 의병이 수년간 일본군과 대등한 교전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평소에는 소규모 부대로 유격투쟁을 벌이다가도 필요시에는 대규모 연합 의진을 구성해 전면전을 펼친 유연성에 있었다. 또 항전을 장기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의병부대들이 해체된 이후로도 3·1운동과 항일운동단체 조직, 무장독립 전쟁으로도 이어졌다.무등일보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공동기획한 '남도 의병 열전'을 마무리 하며 한말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광주 서구 농성광장에 조성된 김태원 의병장 동상◆ 동학농민전쟁의 활발한 재평가최근 순천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들을 어떻게 성격지을 것인가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해 우리의 주권을 짓밟는 것을 본 백성들은 이를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로 인식했다. 이에 신분을 떠나 하나가 돼 대일 항전에 나서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스스로를 '의려(義旅)' 곧 '의병'이라 칭했으며 '동학의병'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전남은 일본군과 처절한 항전을 한 지역 중 하나다. 발표에 따르면 전남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러진 전투만 50여 회가 넘는다고 한다. 장흥 석대들에는 며칠 동안 일본군과 밀리지 않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의 항전이 한말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부터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다. 최근 정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고 나선 것은 다행이다. 때마침 문을 여는 남도 의병박물관에 '2차 동학'을 별도의 공간에 넣어 그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자 한 것은 긍정적이다.◆의진 간 활발한 연합전선 펼쳐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은 한말 의병의 활동을 '운동'에서 '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 투쟁을 하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서울 진공작전에 나선 13도 창의군의 결성이 그것이다.한말 의병은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 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새로운 활동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후기 의병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 '창의회맹소'는 의진 간의 연합작전도 전개했다.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이 연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1907년 12월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중요 전투에서는 서로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의진의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별로 유격투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호남창의회맹소'는 여러 차례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돼 순국한 이후에는 김용구와 김태원, 김율을 중심으로 분화됐다. 1908년 4월 김태원과 김율이 순국한 이후에는 심남일·조경환·전해산·오성술·안규홍·박도경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됐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분화 모습을 통해 회맹소가 합진보다 연합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호남창의회맹소와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진 담양 금성산성◆일본 정규군과 대등한 교전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3회나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등 전남 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전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심남일·이대극·안규홍 의병 등 11개 의병부대 약 2천명이 참여했다. 심남일이 연합의진 형성에 가장 적극적이었기에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됐다. 이것은 전기·중기 의병 때 분산적으로 활동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호남동의단'의 구성은 앞뒤에서 동시에 몰아치는 '기각지세'의 형성에서 의진 간 연합전선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들은 연합작전을 수행해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구체적으로 1909년 2월 치러진 남평 덕룡산 전투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이 인솔하는 250명의 의병이 덕룡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 군경과 3시간에 걸쳐 총격전을 벌였다. 박사화 의병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강무경을 비롯해 또 다른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는 박민홍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호남의소'의 특징은 의병부대들이 강력한 의진을 구성해 일본군 정규군과 2년 가까운 독립전쟁을 치른 원동력이었다.일부 연구자들은 1909년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하지만 앞서 살펴본 여러 의병 부대의 특성을 살펴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실상을 모르고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구례 연곡사에 위치한 녹천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장기항전으로의 전환 시도앞서 1908년 13도 창의군이 결성돼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할 때 유인석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로 호응해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국내에서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당시 의병의 역량으로는 일본 군사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인석은 지구전 전략이 실패하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내륙 깊숙한 산중에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의병계열의 백두산 근거지론은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 기지론과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이러한 국외 항일투쟁 근거지론과 함께 국내 근거지론이 대두됐다. 고광순이 주창한 지리산 근거지론이 그것이다. 앞장에서 간단히 살폈지만 그는 당장의 무장 투쟁보다는 장기 항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의 수립에 고심했다. 즉, 화력에서 압도적인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해 '축예지계' 즉, 장기항전에 대비해 일정기간 예기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국내에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한 그는 지리산을 주목했다. 유인석의 중부 이북 의병들이 추진한 '북계책'과 비교된다.고광순의 항전기지 건설 구상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이 본격화될 때 이미 시작됐다.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1907.음) 8월 11일 행군해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지로 삼아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해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를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불원복' 석자를 썼다.(행장, 녹천유고, 하)'이러한 지리산 근거지론은 1908년 초 "하동군 북쪽 골짜기의 지리산은 의병의 소굴이 됐다"하고 하는 데서 살필 수 있다.영암 국사봉을 의병 지휘본부로 삼아 치열한 의병 전쟁을 치른 심남일의 '호남의소'도 이러한 장기적인 항전 기지 건설과 연결돼 있다 하겠다. 국사봉에 근거를 둔 의병부대는 산상에 설치된 포대에서 포까지 발사함으로써 일본군의 접근을 차단했다.이러한 의병부대의 장기적인 항쟁 전략이 이어지면서 의병 전쟁은 일본 정규군의 엄청난 진압 작전에도 밀리지 않은 독립전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에 있는 주먹 동상◆값진 희생, 3·1운동으로 이어져한편 의병들은 3·1운동 때 적극 참여했다. 심남일 의병부대 도통장으로 활동하다 3·1운동을 주도한 남평 출신 김도숙은 의병 수뇌부가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고 독립의군부에서 호남유사를 맡았던 김종주는 낙안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의 칼에 찔렸음에도 저항해 호남 의병의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영암 구림 3·1운동에 앞장섰던 군서 출신 정상조는 '영암 의병' 출신이었다. 역시 '영암 의병'이었던 금정 출신 민치도는 3·1운동 후 화순에서 '독립국민당'이라는 항일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이러한 의병들의 참여는 더욱 격렬하게 이 지역의 3·1운동이 전개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남 의병들이 흘린 피로 전남의 온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이들의 빛나는 독립전쟁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를 늦추게 했다. 항쟁의 에너지는 응축돼 3·1운동, 그리고 무장독립 전쟁의 토대가 됐다. 특히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농민 항일운동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현장에 전남 지역민이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전남 의병의 값진 희생이 밑거름된 것이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 국난 극복 향한 의지에 지역도 계급도 구별 없었다
- · 백운산 호랑이의 기개, 대를 이어 전해지다
- · 총상에도 투지 꺾지 않은 부대 조직의 귀재
- · 대한제국 장교, 남도 누비는 의병장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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