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⑧ 전해산
여러 의진서 종사·참모로 활약
‘대동창의단’ 의병대장에 추대
전남 서남부서 70여 차례 전투
분진·합진 전술로 일제에 맞서
日 회유 거부하고 대구서 처형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국권 피탈 당일 발행한 조선총독부관보 1호에 이어, 불과 이틀 뒤인 9월 1일 관보 제4호를 통해 의병들의 사형 집행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이는 일제가 남도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의병 전쟁에 대해 얼마나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방증한다.
해당 관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수용은 내란과 모살(謀殺)의 죄로 인해 본년 7월 9일에 대구 공소원에서 사형의 선고를 수(受)하고 동년 8월 23일에 집행한 바가 되니라.'
'김수용'이 누구길래 일제는 관보에 가장 먼저 처형 사실을 수록하면서까지 조선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고 했을까. 김수용은 '전수용(全垂鏞)'의 잘못된 표기이며, 호인 '해산(海山)'에 맞춰 '전해산'으로 불린 의병장이다.
그는 망국의 위기 속에서도 전해산은 '대동창의단'을 결성해 전남 서남부에서 일본군과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조선인들의 민족혼을 일깨웠다.

◆ 갑옷 입고 의진 합류한 서생
전북 임실군 남면 국화촌 호전동에서 태어난 전해산(1879~1910)은 유학자 이한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의 본명은 기홍(基泓), 자는 수용, 호는 해산이었다. 전수용이 호를 해산으로 한 것은 스스로 '바다와 산을 누비며 일본과 싸우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최익현이 무성서원에서 거의한다는 소식을 들은 전해산은 이석용과 함께 최익현을 찾아갔다. 하지만 최익현의 의진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빈약함을 알고 실망을 느껴 동맹록에 서명도 하지 않은 채 귀향했다.
이후 1907년 가을 기삼연 등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할 때 '종사(從事)'로 참여한 데 이어, 임실에서 이석용이 창의동맹단을 조직하자 그 의진의 참모로 활동했다.
창의동맹단의 활동 지역은 주로 전북 임실과 진안 지역이었다. 1908년 3월, 4월 일본군과 전투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의진이 위축되자, 전해산은 광주에서 활동하던 김태원 의진에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는 김태원이 얼마 전에 전사한 상태였다. 전해산은 김태원 의진을 수습하고 있었던 조경환, 오성술 의진에 합류해 부대를 정비했으며 서울 시위대 참위 출신으로 의병 활동하던 정원집도 고종황제의 밀지를 가지고 합류했다.

◆ 연합 의진 결성해 빛나는 전과
1908년 8월 21일(음 7월 25일), 전해산은 정원집, 오성술 등의 강권으로 의병장 직을 수락하고 '대동창의단'을 결성했다. 전해산을 의병대장으로 삼고,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 후군장 윤동수, 호군장 박영근, 도포장 이범진, 최후장 임장택, 참모 김공삼·김돈의·김원국·이성화·이용준으로 군을 편성했다.
이때 전해산은 다음과 같이 부대원들에게 연설하며 거의(擧義) 목적이 국권 회복에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왜노(倭奴)는 우리나라 신민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임진란의 화 또한 그러하거니와 을미 국모 시해는 물론이고, 우리 종사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모두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날에 죽음을 청할 것인가! 만일 하늘이 이 나라를 돕고 조종을 돌보아 적을 소탕한다면 그날 우리들은 마땅히 중흥 제일 공신이 될 것이다. 일절 폭략(暴掠)하지 말고 힘써 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싸우다 죽자."
전해산은 을사늑약과 군대해산을 사실상 국권 상실로 인식하고 있었다. 후기 의병은 사실상 독립전쟁을 치렀던 독립군과 마찬가지였다.
대동창의단은 유생, 농민, 해산군인, 포수 등 다양한 계층으로 지도부가 구성돼 있다. 특히 전해산은 의진의 힘을 키우고자 포수 출신들을 영입했다.
대동창의단은 이듬해 5월 의진이 해산될 때까지 약 10개월 동안 광주, 나주, 담양, 영광, 장성 등 전남 서남부 지방에서 일본군과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단독전투를 치르기도 했지만, 때로는 이웃 의진과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기동성 확보를 위해 '대동창의단' 지휘부를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나누어 소규모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분진'과 '합진'을 병행했다. 일본과의 군사력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만회하기 위한 게릴라 전술의 일종이었다.
1908년 7월 25일 첫 전투였던 영광 불갑사 전투를 비롯해 장성 동화 전투, 담양 한재 전투, 함평 월야 전투 등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반 주민과 연대 및 보호에 앞장서 신망이 매우 높았다.
1908년 겨울 일본 군경의 증강과 탄압이 강화돼 가자 전해산은 심남일 등 전라도 11개 대표적 의진과 함께 '호남동의단'을 결성했다. 전해산을 대장으로 해 제1진 의병장 심남일을 필두로, 제10진 의병장 안덕봉에 이르기까지 전라도 서부와 동부에서 활약하던 의병 총연합 부대였다.

◆ '영산강 못 가리니' 결연한 최후
1909년 4월 전해산 의진은 영광, 부안 오동촌 및 덕흥 전투에서 크게 패배해 재기 불능 처지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고막원 전투에서 선봉장 정원집이 전사하자 의진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1909년 1월 전해산은 의병을 해산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1909년 5월 의진의 지휘권을 박영근에게 이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남원 고래산에 은신해 서당을 열었다. 일본경찰은 전해산의 행방을 몰라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현상금을 걸었으나 전해산 의진에 출입하던 변절자의 밀고로, 1909년 12월 18일 영산포 헌병대에 체포돼 광주 감옥에 수감됐다.
일제의 온갖 회유를 거부하자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이 선고됐고, 그해 7월 9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 기각, 8월 20일 상고 기각됐다. 그리고 사흘 뒤인 23일 박영근·심남일·오성술·강무경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죽기 전 전해산은 옥중에서 시 한수를 남겼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 바다 건너 들어온 적 차마 말도 못하겠소. 대낮에 소리 삼키고 강물이 멀어지고, 푸른 하늘도 오열하며 실버들에 비 뿌리고. 이제는 영산강으로 다시 못가리니 두견새 돼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거나.'
일제에 체포된 호남의병들은 대구로 가기 위해 영산포구에서 배를 타야만 했으나 대부분 처형당해 돌아오지 못했다. 전해산 역시 그가 남긴 시처럼 다시는 살아서 영산강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고향에 시신으로 돌아온 전해산의 장례는 수천 명의 조문객 흐느낌 속에 치러졌다. 해산의 상여가 옛집 앞의 징검다리를 건너자 시부모 상을 홀로 치르며 집을 지켰던 해산의 아내 김씨는 극약을 먹고 자결했다.


전해산 의병장이 기록한 '진중일기'와 작전도로 만든 병풍 등은 현재 순천대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 같은 자료를 통해 전해산이 매우 치밀하게 의진을 결성하고 부대를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묘가 있는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는 기념관과 추모비,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전해산 의병장 동상에는 그가 최후진술에서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남긴 말이 새겨져 있다.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에 걸어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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