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⑥ 심남일
함평 월야 의병 주축으로 거병
영암 국사봉서 ‘호남의소’ 결성
조직·군율·체계 갖춘 부대 변모
남도 누비며 2년간 26회 전투
거성동 전투 일본군 70명 사살

전남 함평군 월야면에는 전남 제일의 의병장을 자처하며 우리에게 '남일'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남일 심수택 의병장 기념관'이 있다. 사진 속 조부를 빼닮은 손자 심만섭 옹이 기념관 옆에 상주하며 기념관을 관리하며 조부의 빛나는 역사를 후세에 전하려고 애쓰고 있다. 심만섭의 장남 심승남과 차남 심창남 목사는 증조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기념관 입구 벽에는 심남일이 남긴 시들과 함께 '호남의소'라는 깃발이 그려져 있다. '호남의소'는 심남일 의병장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의병대장이 된 함평 월야의 훈장,
심남일은 1871년 함평 월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 월야 출신 의병들을 주축으로 거병했는데, 1919년 함평 문장 만세 시위에서도 월야 출신들이 대거 참여했다. 의병 활동이 왕성한 곳에서 만세 시위도 치열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동학농민전쟁과 이어진 의병전쟁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전남 지역민의 3·1운동 참여가 적었다는 인식도 있으나, 이는 전남 지역 시위 규모를 축소시킨 일제의 의도와 지역의 항쟁 역사를 찾으려는 후대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실제 함평이나 영광 등 3·1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곳은 동학, 의병 전쟁도 왕성히 벌어졌다.
서당 훈장이던 심남일의 본명은 '심수택'이었으나 지역 유생들과 거병하며 '전남 제일의 의병'이 되겠다는 결의를 담아 호를 '남일'로 했다. 이후 호는 그의 이름처럼 굳어진다.
그는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떨쳐 입고, 말을 타고 남도를 바람처럼 달리리. 만약에 왜놈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맹세코 모래밭에 죽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시를 지었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그의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심남일은 거병 후, 김태원 의병부대와 연합해 영광, 장성, 광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1908년 4월에 김태원이 어등산 전투에서 순국하자 심남일은 부대를 이끌고 의병 활동이 가장 왕성한 영암지역으로 이동했다. 당시 영암, 나주 지역에는 소규모 의병부대들이 활발히 활동이고 있었다. 영암으로 이동한 심남일은 영암 금정에 있는 국사봉에서 영암 의병을 주축으로 '호남의소(湖南義所)'를 결성했다. 이때 심남일 의병장의 핵심 참모였던 강무경은 영암 금정 출신 양방매와 혼인했는데 양방매 본인은 물론 그의 오빠도 의병 전쟁에 뛰어들었다.
국사봉에 진지를 구축한 심남일은, '호남의소의 대장'이라는 뜻의 '호남의장(湖南義將)'이라는 직인을 사용했다. 호남의소 총사령관임을 알려준다. '호남의소'라는 부대 명칭이 있음에도 일제는 '남일파'라는 이름으로 그의 의병부대를 따로 불렀다. 이는 '호남의소' 대장이라는 심남일의 지위를 애써 격하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서생이 만든 부대의 놀라운 성과
서당 훈장 출신으로 지략이 뛰어난 심남일은 '모사장', '서기겸 모사', '선봉장', '중군장', '후군장', '탐매' 등 여러 조직체계를 갖추며 '호남의소'를 체계적인 전투부대로 변모시켰다. 호남의소 선봉장 강무경, 중군장 안찬재, 모사 권택 등이 유생들이었다는 점도 부대의 성격을 이해하게 한다.
한편 심남일은 의병부대가 지켜야 할 군율 10가지를 공포했는데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군율을 어긴 자는 목을 쳤다. 반면 전쟁 중 궁핍한 백성을 보았을 때는 부족한 군자금을 과감히 풀어 구휼했다. 곳곳의 의병 부대가 심남일을 중심으로 연합 의병부대를 결성하는 원동력이 됐다.
호남의소 사령부가 있는 영암 국사봉은, 산 정상에 포대까지 설치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일본군이 국사봉으로 접근하면 정상에서 대포를 쏴 접근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일본군 전투일지인 '진중일지'에 보인다. 일부에서는 심남일 의병장이 거느린 의진은 일정한 근거지가 없다고 하나, 이는 국사봉의 존재를 살피지 못한 데서 나온 오류다.
국사봉에 본부를 둔 호남의소는, 나주, 함평, 영암, 보성, 장흥, 강진, 해남 등지에서 신출귀몰 유격전을 벌였다. 1908년 4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해남 성내,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 1909년 7월 장흥 봉무동 전투에 이르기까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26회 이상의 전투를 치러 일본 군경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쳐나가고, 강현수(강무경)는 풍운 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았다'라는 동요가 어린이들 사이에 불릴 정도였다.
'호남의소'는 직할부대와 다른 지역 의병부대를 엮은 일종의 연합군이었다. 의병부대의 조직을 보면 여러 지역 의병장이 부장(副長)으로 참여하고 있다. 기군장인 이덕삼은 해남 의병장 출신이고, 역시 기군장 김치홍은 영암 의병장, 군량장 이세창은 장흥 의병장, 중군장 안찬재는 보성 의병장이었다. 심남일 부대 의병부대 부하 장수들은 독자적 의병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 의병부대를 조직한 심남일은 다른 지역에서 대규모 연합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안규홍, 전해산, 조경환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해 독립전쟁을 치렀다. 호남의소는, 한말 남도 의병의 주특기인 '분진'과 '합진' 전술을 능란하게 구사했다.
심남일은 현지 사정에 밝은 예하 부대의 판단에 따라 유격전을 전개해 일본군에 타격을 가했다. 유명한 남평 거성동 전투 당시 작전참모인 모사 권택이 "한 부대는 동쪽 대치에 매복해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또 한 부대는 대항봉에 매복해 광주·나주·남평 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서남 간 월임치에 매복해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덕룡산 상봉에 매복하고, 한 부대는 병암치에 매복해 서로 응원하게 하라"고 한 작전 지침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호남의소가 계획을 치밀히 세워 부대를 조직적으로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투에서는 박민홍 의병장의 아우 박여홍도 전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가 있었으나 일본군 70여 명을 사살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게릴라전이 아니라 전개된 사실상 전면전이었다. 호남의소가 세계 최강 러시아를 격퇴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9세 순국 "원수 두고 어찌 눈 감나"
치밀한 계획과 높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2년 가까이 전남 중·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닌 호남의소였으나, 1909년 7월 순종의 의병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눈물을 머금고 전투를 중단한다.
심남일은 평생의 동지였던 강무경과 함께 후일을 기약하면서 능주의 풍치굴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있었으나 밀정의 신고로 1909년 10월 9일에 체포됐다.
감옥에 갇힌 심남일은 "왜적과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한이요, 노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며, 죄 없는 의병들이 갇혔으나 구해주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고, 죽은 후에 순절한 충신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 네 번째 한"이라고 절규했다.
그는 대구 감옥에서 1910년 10월 4일 순국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이날을 기념해 심남일 기념사업회에서는 순국기념 행사를 해마다 하고 있다. 참고로 올해는 행사를 당겨 9월 중에 할 예정이라고 한다.
심남일은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초야에서 십년 동안 글 읽던 몸이/ 한 번 전쟁에 나서니 죽음이 가벼웠네/ 나라의 원수를 버려두고 천지가 어두워지니/ 내 죽는 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에도 충분한 그의 공적 재평가할 때가 됐다. 박해현 교수가 집필한 '영암의병사 연구'(2019)에는 호남의소를 중심으로 그의 공적이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함평군 월야면에는 '남일 심수택의병장기념관'이, 의병을 일으켰던 함평군 신광면 덕동고개에는 남일공원이 조성돼 있다. 광주공원에는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후손들은 그의 기록을 정리하며 역사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심남일 의병장의 삶은 항일 정신의 상징이자, 전남 의병사의 중심축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바다와 산 누비며 싸우리" 국권 회복 선봉에 서다 전북 장수군에 위치한 전해산 의병장 동상.호남호국기념관 제공일제는 1910년 8월 29일 국권 피탈 당일 발행한 조선총독부관보 1호에 이어, 불과 이틀 뒤인 9월 1일 관보 제4호를 통해 의병들의 사형 집행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이는 일제가 남도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의병 전쟁에 대해 얼마나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방증한다.해당 관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김수용은 내란과 모살(謀殺)의 죄로 인해 본년 7월 9일에 대구 공소원에서 사형의 선고를 수(受)하고 동년 8월 23일에 집행한 바가 되니라.''김수용'이 누구길래 일제는 관보에 가장 먼저 처형 사실을 수록하면서까지 조선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고 했을까. 김수용은 '전수용(全垂鏞)'의 잘못된 표기이며, 호인 '해산(海山)'에 맞춰 '전해산'으로 불린 의병장이다.그는 망국의 위기 속에서도 전해산은 '대동창의단'을 결성해 전남 서남부에서 일본군과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조선인들의 민족혼을 일깨웠다.전해산 의병장을 모시 제당인 해산재.호남호국기념관 제공◆ 갑옷 입고 의진 합류한 서생전북 임실군 남면 국화촌 호전동에서 태어난 전해산(1879~1910)은 유학자 이한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의 본명은 기홍(基泓), 자는 수용, 호는 해산이었다. 전수용이 호를 해산으로 한 것은 스스로 '바다와 산을 누비며 일본과 싸우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었다.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최익현이 무성서원에서 거의한다는 소식을 들은 전해산은 이석용과 함께 최익현을 찾아갔다. 하지만 최익현의 의진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빈약함을 알고 실망을 느껴 동맹록에 서명도 하지 않은 채 귀향했다.이후 1907년 가을 기삼연 등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할 때 '종사(從事)'로 참여한 데 이어, 임실에서 이석용이 창의동맹단을 조직하자 그 의진의 참모로 활동했다.창의동맹단의 활동 지역은 주로 전북 임실과 진안 지역이었다. 1908년 3월, 4월 일본군과 전투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의진이 위축되자, 전해산은 광주에서 활동하던 김태원 의진에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는 김태원이 얼마 전에 전사한 상태였다. 전해산은 김태원 의진을 수습하고 있었던 조경환, 오성술 의진에 합류해 부대를 정비했으며 서울 시위대 참위 출신으로 의병 활동하던 정원집도 고종황제의 밀지를 가지고 합류했다.전해산 기념관에 전시된 전해산 의병장 흉상.호남호국기념관 제공◆ 연합 의진 결성해 빛나는 전과1908년 8월 21일(음 7월 25일), 전해산은 정원집, 오성술 등의 강권으로 의병장 직을 수락하고 '대동창의단'을 결성했다. 전해산을 의병대장으로 삼고,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 후군장 윤동수, 호군장 박영근, 도포장 이범진, 최후장 임장택, 참모 김공삼·김돈의·김원국·이성화·이용준으로 군을 편성했다.이때 전해산은 다음과 같이 부대원들에게 연설하며 거의(擧義) 목적이 국권 회복에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왜노(倭奴)는 우리나라 신민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임진란의 화 또한 그러하거니와 을미 국모 시해는 물론이고, 우리 종사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모두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날에 죽음을 청할 것인가! 만일 하늘이 이 나라를 돕고 조종을 돌보아 적을 소탕한다면 그날 우리들은 마땅히 중흥 제일 공신이 될 것이다. 일절 폭략(暴掠)하지 말고 힘써 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싸우다 죽자."전해산은 을사늑약과 군대해산을 사실상 국권 상실로 인식하고 있었다. 후기 의병은 사실상 독립전쟁을 치렀던 독립군과 마찬가지였다.대동창의단은 유생, 농민, 해산군인, 포수 등 다양한 계층으로 지도부가 구성돼 있다. 특히 전해산은 의진의 힘을 키우고자 포수 출신들을 영입했다.대동창의단은 이듬해 5월 의진이 해산될 때까지 약 10개월 동안 광주, 나주, 담양, 영광, 장성 등 전남 서남부 지방에서 일본군과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단독전투를 치르기도 했지만, 때로는 이웃 의진과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했다.기동성 확보를 위해 '대동창의단' 지휘부를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나누어 소규모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분진'과 '합진'을 병행했다. 일본과의 군사력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만회하기 위한 게릴라 전술의 일종이었다.1908년 7월 25일 첫 전투였던 영광 불갑사 전투를 비롯해 장성 동화 전투, 담양 한재 전투, 함평 월야 전투 등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반 주민과 연대 및 보호에 앞장서 신망이 매우 높았다.1908년 겨울 일본 군경의 증강과 탄압이 강화돼 가자 전해산은 심남일 등 전라도 11개 대표적 의진과 함께 '호남동의단'을 결성했다. 전해산을 대장으로 해 제1진 의병장 심남일을 필두로, 제10진 의병장 안덕봉에 이르기까지 전라도 서부와 동부에서 활약하던 의병 총연합 부대였다.전투 상황을 상세하게 적은 '전해산 진중일기' 일부.호남호국기념관 제공◆ '영산강 못 가리니' 결연한 최후1909년 4월 전해산 의진은 영광, 부안 오동촌 및 덕흥 전투에서 크게 패배해 재기 불능 처지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고막원 전투에서 선봉장 정원집이 전사하자 의진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1909년 1월 전해산은 의병을 해산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1909년 5월 의진의 지휘권을 박영근에게 이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남원 고래산에 은신해 서당을 열었다. 일본경찰은 전해산의 행방을 몰라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현상금을 걸었으나 전해산 의진에 출입하던 변절자의 밀고로, 1909년 12월 18일 영산포 헌병대에 체포돼 광주 감옥에 수감됐다.일제의 온갖 회유를 거부하자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이 선고됐고, 그해 7월 9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 기각, 8월 20일 상고 기각됐다. 그리고 사흘 뒤인 23일 박영근·심남일·오성술·강무경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죽기 전 전해산은 옥중에서 시 한수를 남겼다.'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 바다 건너 들어온 적 차마 말도 못하겠소. 대낮에 소리 삼키고 강물이 멀어지고, 푸른 하늘도 오열하며 실버들에 비 뿌리고. 이제는 영산강으로 다시 못가리니 두견새 돼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거나.'일제에 체포된 호남의병들은 대구로 가기 위해 영산포구에서 배를 타야만 했으나 대부분 처형당해 돌아오지 못했다. 전해산 역시 그가 남긴 시처럼 다시는 살아서 영산강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향에 시신으로 돌아온 전해산의 장례는 수천 명의 조문객 흐느낌 속에 치러졌다. 해산의 상여가 옛집 앞의 징검다리를 건너자 시부모 상을 홀로 치르며 집을 지켰던 해산의 아내 김씨는 극약을 먹고 자결했다.전해산 기념관에 전시된 작전지도 병풍전해산 의병장 동상에 새겨진 최후진술.호남호국기념관 제공전해산 의병장이 기록한 '진중일기'와 작전도로 만든 병풍 등은 현재 순천대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 같은 자료를 통해 전해산이 매우 치밀하게 의진을 결성하고 부대를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묘가 있는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는 기념관과 추모비,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전해산 의병장 동상에는 그가 최후진술에서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남긴 말이 새겨져 있다.'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에 걸어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 바다에는 충무공, 육지는 용장 김태원이 있었다
- · 모진 아픔 견디고··· "한 명의 원수라도 쓰러트리고 죽으리"
- · 후기 의병 상징된 '호남창의회맹소' 맹주
- · '불원복' 깃발 아래, 지리산서 항전 의지 세우다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