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의병 상징된 '호남창의회맹소' 맹주

입력 2025.05.21. 16:46 임창균 기자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④ 성재 기삼연
의병 해산 권고 조칙에 분개해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 출범
법성포와 문수사서 값진 성과
광주천서 재판없이 총살당해
순국 이후도 의병항쟁 이어져
기삼연 의병장 초상화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남도 의병 항쟁의 중심에는 기삼연(1851∼1908)과 호남창의회맹소가 있었다. 장성 수연산에서 시작된 이들의 항일 무장투쟁은 일본군과 수 차례 전투를 치르며 남도 전역을 들끓게 했다. 기삼연의 순국은 의병항쟁의 불씨가 됐으며 그의 국권 회복 의지는 3·1운동까지 이어졌다.

◆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정미의병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됐다. 서울 시위대 제1대대 박승환 대대장이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자결한 사건은 이후 해산한 부대들에게 분명한 선택지를 남겼다. 이들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의병부대에 합류해, 대한제국 의병으로 거듭났다.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무장투쟁이 바로 후기 의병, 이른바 '정미의병'이다. 정미의병은 1907년을 기점으로 1908년 무신년, 1909년 기유년까지 지속된 의병 항쟁 전반을 포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을미의병', '을사의병' 등과 마찬가지로 간지(干支) 표기를 통한 명명은 시기 구분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해 '전기', '중기', '후기'라는 시기 구분법이 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구분법도 의병 운동의 흐름을 명확히 보여주진 못한다. 전기와 중기 사이 시간상 단절과 중기와 후기의 연속성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 의병은 갑오왜변 이후 일본의 내정 간섭과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중기 의병은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이라는 국권 침탈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다. 이 두 의병봉기는 비교적 시기와 성격, 봉기 명분이 분명하지만, 후기 의병을 알리는 군대 해산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식민지화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또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의병 전쟁의 지향점이 이전과 달라진 바 없어 성격을 구분 짓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후기 의병의 서막을 알린 사건과 항쟁의 핵심 거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중심에는 '호남창의회맹소'가 있다. 이 조직은 1906년 영광의 김용구와 장성의 기삼연이 주축이 된 영광·장성 지역의 비밀결사 '일심계'에서 출발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최초 승리 현장인 고창 문수사

◆ 후기 의병의 서막을 알리다

성재(省齋) 기삼연은 장성군 황룡면 하곡리에서 태어났으며, 1896년 장성·나주 연합 의진을 조직한 기우만의 숙부뻘이자 성리학자인 노사 기정진의 종질이기도 하다. 기우만이 거병했을 때 의병을 모으는 실질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기우만이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에 따라 의진을 해산하자 크게 실망하며 장성 수연산에 은거해 후일을 도모했다. 그는 의진 해산을 두고 '유생들과는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 것으로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이 군사를 한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며 개탄했다.

이후 1907년 10월(음력 9월 24일) 김용구는 나주의 김준, 장성의 이철형, 함평의 이남규 등과 함께 기삼연을 맹주로 추대하고 의병을 결성했다. 김용구는 기우만의 문하생으로 두 사람은 이른 시기부터 비밀리에 국사를 논의하며 항일의 뜻을 다진 사이다.

의진의 명칭은 '호남창의회맹소'로 정하고, 본거지는 기삼연이 은거하던 장성 수연산의 석수암이었다.

처음 50명 규모였던 의진은 곧 400명으로 불어나며 조직도 대장, 통령, 참모, 종사, 선봉, 중군, 후군 등으로 체계화됐다. 맹주 기삼연을 중심으로, 통령은 김용구, 선봉은 김준(김태원), 중군은 이철형, 후군은 이남규가 맡았으며, 종사로는 김익중, 서숙구, 전해산, 이석용, 김치곤 등 의병 활동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했다. 특히 기정진의 문하생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기삼연과 마찬가지로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에 반발한 이들이 많았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활동 방식에서도 독특했다. 각국 공사관에 '포고만국문'을 보내는 등 구체적인 투쟁 목표를 세워 의병 지도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주 활동지는 장성, 영광, 담양, 함평, 고창, 무안 등 전남 서부 지역이었으며 평소에는 개별적으로 움직이다 전투 시에는 연합하는 '분진과 합진' 전법을 구사했다.

고창 문수사 전투가 회맹소가 거둔 대표적인 전과였다. 당시 선봉장 김준은 일본군의 야습에 맞서 치열한 방어전을 벌였고, 새벽이 되자 전장엔 적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이 전투에 대해 광산 출신 유학자 오준선은 '의병장 기삼연전'에서 다음과 같이 다뤘다.

'고창 문수사에 주둔했을 때 적들이 밤을 틈타 뒤를 밟아 와 이르렀다. 포성이 매우 급박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떨었다. 선봉장 김준을 시켜 대응해 포를 쏘게 했다. 서로 치열하게 싸웠는데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 아침에 보니 피가 땅에 가득했고, 시체를 끌어간 흔적이 있었다. 이로 보아 죽은 사람이 많았음을 알았다.'

호남창의회맹소와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진 담양 금성산성

◆ 끝이 아닌 시작, 길이 남은 의병정신

1907년 12월 7일의 법성포 공격은 회맹소의 기세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등 100여명의 의병이 참여한 이 전투는 연합 작전의 효율성을 보여주며 일본 순사 주재소와 일본인 가옥 7채를 불태웠다. 이후에도 담양, 장성, 함평 등지에서 일본 농장과 시설을 공격하며 전남·북 경계 지역 전역을 회맹소의 영향권으로 만들었다. 세무서, 관공서, 일진회원, 일본 상점, 헌병 분견소 등 회맹소의 공격 대상은 다양해졌고 전투 방법도 시간이 갈수록 발전돼 갔다.

회맹소의 활동이 확대되자 일본군은 위협을 느끼고, 광주수비대를 중심으로 10개 부대를 '폭도토벌대'로 편성해 대응했다. 1908년 1월 30일, 기삼연은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에 입성해 장기전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기습으로 3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부상을 당한 기삼연은 김용구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순창 복흥산에 은신했으나, 2월 2일 설날 일본군의 기습으로 체포됐다.

부동교에서 바라본 광주천의 모습. 기삼연 의병장은 1908년 이곳에서 재판없이 총살됐다.
광주 남구 사동에 위치한 기삼연 의병장 순국지 표석

소식을 들은 김준은 경양역(현 광주 동강대학 부근)까지 추격했지만, 이미 광주 헌병대로 수감된 뒤였다. 김준은 기삼연을 구출하려는 계획을 수립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일본군이 다음 날인 2월 3일 작은 장터가 열리던 광주천 아래 모래사장에서 재판 없이 기삼연을 처형했다. 이곳은 10년 뒤인 1919년 광주 3·1운동의 거점이 되며, 현재도 광주 남구 사동 부동교 인근에는 그를 기리는 작은 표석이 세워져 있다.

기삼연의 순국 이후에도 호남창의회맹소의 항쟁은 멈추지 않았다. 김용구를 중심으로 김태원, 김율 등이 활동을 이어갔고, 이후 심남일, 조경환, 전해산, 오성술, 안규홍, 박도경 등이 새로운 의진을 구성해 투쟁을 계속했다.

장성 무궁화공원에 위치한 기삼연 의병장 순국비.호남호국기념관 제공

기삼연의 항쟁은 단순한 무력 저항이 아닌,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를 향한 길이자 남도 의병의 정신을 상징했다. 그의 정신은 장성 무궁화공원에 세워진 '호남창의영수기삼연선생순국비'와 함께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정부는 1962년 기삼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며 그 뜻을 기렸다.

호남창의회맹소는 남도의병의 구심점이었다. 그 중심에는 의병장 기삼연이 있었다. 그는 싸우다 잡혔고, 싸우다 죽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호남을 누비다 광주에서 순국한 그의 의지는 3·1운동의 함성으로 이어졌고, 해방된 조국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 있었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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