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④ 성재 기삼연
의병 해산 권고 조칙에 분개해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 출범
법성포와 문수사서 값진 성과
광주천서 재판없이 총살당해
순국 이후도 의병항쟁 이어져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남도 의병 항쟁의 중심에는 기삼연(1851∼1908)과 호남창의회맹소가 있었다. 장성 수연산에서 시작된 이들의 항일 무장투쟁은 일본군과 수 차례 전투를 치르며 남도 전역을 들끓게 했다. 기삼연의 순국은 의병항쟁의 불씨가 됐으며 그의 국권 회복 의지는 3·1운동까지 이어졌다.
◆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정미의병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됐다. 서울 시위대 제1대대 박승환 대대장이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자결한 사건은 이후 해산한 부대들에게 분명한 선택지를 남겼다. 이들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의병부대에 합류해, 대한제국 의병으로 거듭났다.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무장투쟁이 바로 후기 의병, 이른바 '정미의병'이다. 정미의병은 1907년을 기점으로 1908년 무신년, 1909년 기유년까지 지속된 의병 항쟁 전반을 포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을미의병', '을사의병' 등과 마찬가지로 간지(干支) 표기를 통한 명명은 시기 구분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해 '전기', '중기', '후기'라는 시기 구분법이 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구분법도 의병 운동의 흐름을 명확히 보여주진 못한다. 전기와 중기 사이 시간상 단절과 중기와 후기의 연속성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 의병은 갑오왜변 이후 일본의 내정 간섭과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중기 의병은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이라는 국권 침탈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다. 이 두 의병봉기는 비교적 시기와 성격, 봉기 명분이 분명하지만, 후기 의병을 알리는 군대 해산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식민지화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또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의병 전쟁의 지향점이 이전과 달라진 바 없어 성격을 구분 짓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후기 의병의 서막을 알린 사건과 항쟁의 핵심 거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중심에는 '호남창의회맹소'가 있다. 이 조직은 1906년 영광의 김용구와 장성의 기삼연이 주축이 된 영광·장성 지역의 비밀결사 '일심계'에서 출발했다.

◆ 후기 의병의 서막을 알리다
성재(省齋) 기삼연은 장성군 황룡면 하곡리에서 태어났으며, 1896년 장성·나주 연합 의진을 조직한 기우만의 숙부뻘이자 성리학자인 노사 기정진의 종질이기도 하다. 기우만이 거병했을 때 의병을 모으는 실질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기우만이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에 따라 의진을 해산하자 크게 실망하며 장성 수연산에 은거해 후일을 도모했다. 그는 의진 해산을 두고 '유생들과는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 것으로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이 군사를 한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며 개탄했다.
이후 1907년 10월(음력 9월 24일) 김용구는 나주의 김준, 장성의 이철형, 함평의 이남규 등과 함께 기삼연을 맹주로 추대하고 의병을 결성했다. 김용구는 기우만의 문하생으로 두 사람은 이른 시기부터 비밀리에 국사를 논의하며 항일의 뜻을 다진 사이다.
의진의 명칭은 '호남창의회맹소'로 정하고, 본거지는 기삼연이 은거하던 장성 수연산의 석수암이었다.
처음 50명 규모였던 의진은 곧 400명으로 불어나며 조직도 대장, 통령, 참모, 종사, 선봉, 중군, 후군 등으로 체계화됐다. 맹주 기삼연을 중심으로, 통령은 김용구, 선봉은 김준(김태원), 중군은 이철형, 후군은 이남규가 맡았으며, 종사로는 김익중, 서숙구, 전해산, 이석용, 김치곤 등 의병 활동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했다. 특히 기정진의 문하생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기삼연과 마찬가지로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에 반발한 이들이 많았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활동 방식에서도 독특했다. 각국 공사관에 '포고만국문'을 보내는 등 구체적인 투쟁 목표를 세워 의병 지도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주 활동지는 장성, 영광, 담양, 함평, 고창, 무안 등 전남 서부 지역이었으며 평소에는 개별적으로 움직이다 전투 시에는 연합하는 '분진과 합진' 전법을 구사했다.
고창 문수사 전투가 회맹소가 거둔 대표적인 전과였다. 당시 선봉장 김준은 일본군의 야습에 맞서 치열한 방어전을 벌였고, 새벽이 되자 전장엔 적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이 전투에 대해 광산 출신 유학자 오준선은 '의병장 기삼연전'에서 다음과 같이 다뤘다.
'고창 문수사에 주둔했을 때 적들이 밤을 틈타 뒤를 밟아 와 이르렀다. 포성이 매우 급박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떨었다. 선봉장 김준을 시켜 대응해 포를 쏘게 했다. 서로 치열하게 싸웠는데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 아침에 보니 피가 땅에 가득했고, 시체를 끌어간 흔적이 있었다. 이로 보아 죽은 사람이 많았음을 알았다.'

◆ 끝이 아닌 시작, 길이 남은 의병정신
1907년 12월 7일의 법성포 공격은 회맹소의 기세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등 100여명의 의병이 참여한 이 전투는 연합 작전의 효율성을 보여주며 일본 순사 주재소와 일본인 가옥 7채를 불태웠다. 이후에도 담양, 장성, 함평 등지에서 일본 농장과 시설을 공격하며 전남·북 경계 지역 전역을 회맹소의 영향권으로 만들었다. 세무서, 관공서, 일진회원, 일본 상점, 헌병 분견소 등 회맹소의 공격 대상은 다양해졌고 전투 방법도 시간이 갈수록 발전돼 갔다.
회맹소의 활동이 확대되자 일본군은 위협을 느끼고, 광주수비대를 중심으로 10개 부대를 '폭도토벌대'로 편성해 대응했다. 1908년 1월 30일, 기삼연은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에 입성해 장기전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기습으로 3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부상을 당한 기삼연은 김용구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순창 복흥산에 은신했으나, 2월 2일 설날 일본군의 기습으로 체포됐다.


소식을 들은 김준은 경양역(현 광주 동강대학 부근)까지 추격했지만, 이미 광주 헌병대로 수감된 뒤였다. 김준은 기삼연을 구출하려는 계획을 수립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일본군이 다음 날인 2월 3일 작은 장터가 열리던 광주천 아래 모래사장에서 재판 없이 기삼연을 처형했다. 이곳은 10년 뒤인 1919년 광주 3·1운동의 거점이 되며, 현재도 광주 남구 사동 부동교 인근에는 그를 기리는 작은 표석이 세워져 있다.
기삼연의 순국 이후에도 호남창의회맹소의 항쟁은 멈추지 않았다. 김용구를 중심으로 김태원, 김율 등이 활동을 이어갔고, 이후 심남일, 조경환, 전해산, 오성술, 안규홍, 박도경 등이 새로운 의진을 구성해 투쟁을 계속했다.

기삼연의 항쟁은 단순한 무력 저항이 아닌,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를 향한 길이자 남도 의병의 정신을 상징했다. 그의 정신은 장성 무궁화공원에 세워진 '호남창의영수기삼연선생순국비'와 함께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정부는 1962년 기삼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며 그 뜻을 기렸다.
호남창의회맹소는 남도의병의 구심점이었다. 그 중심에는 의병장 기삼연이 있었다. 그는 싸우다 잡혔고, 싸우다 죽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호남을 누비다 광주에서 순국한 그의 의지는 3·1운동의 함성으로 이어졌고, 해방된 조국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 있었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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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충무공, 육지는 용장 김태원이 있었다 광주 서구 농성광장에 조성된 김태원 의병장 동상 "그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대장부 남아가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해서는 안 된다. 또 적이 사방에서 총을 쏘는데 어찌 도망할 길이 있겠는가."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의병들이 당황하자 김태원 의병장이 주변을 독려하며 한 말이다.1908년 2월 2일 설날 아침, '의병 잡는 귀신'으로 소문난 요시다(吉田)가 이끄는 일본군 광주수비대가 담양 무동촌 마을에 주둔한 김태원 의병부대를 습격했다.그러나 김태원은 당황하지 않고 의병들을 매복시킨 다음 일본군을 유인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지휘관 요시다 등 2명 전사, 2명 중상이라는 참패를 기록한 채 퇴각하였다. 무동촌 전투는 김태원 의병부대가 일본 정규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로 일제가 '거괴(巨魁, 거물 괴수)'로 지목한 김태원의 대표적인 성과다.나주 남산공원에서 조성된 아우 율에게 보낸 시비(왼쪽) 김태원기적비◆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으로의병장 김태원(1870~1908)은 나주시 문평면 갈마지 마을 출신이다. 태원은 어렸을 때 이름이고 본명은 준, 호는 죽봉이다. 경주 김노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단종 복위 과정에서 사육신과 함께 순절한 백촌 김문기의 후손이다. 24살이던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해 수원까지 올라갔던 태원은 항상 나라를 걱정했다.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아우 율(1880-1908)과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운 김준은 1907년 10월 고창 문수사에서 기삼연을 만났다. 기삼연은 김용구의 도움으로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고 의진 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다. 김태원과 기삼연이 만나던 날 일본군의 기습으로 문수사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김태원이 선봉에 서서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문수사 전투는 호남창의회맹소 의진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첫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김태원의 용맹함을 확인한 기삼연은, 그를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에 임명했다. 고창읍성 전투에서도 선두에서 의병을 지휘했던 김태원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법성포를 습격했다. 일본인 가게를 불태우고 창고에 쌓여 있던 곡식들을 주민들에게 나눠줬다.당시 남도의병들은 독자적으로 의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김태원도 별도의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부대 편성의 귀재였던 유병기 의병장의 도움으로 김태원 자신이 상장(上將), 아우 김율을 중군장, 백낙구를 후군장, 조기채를 기포장으로 삼는 부대를 편성했다. 이때 병력이 700명에 달했다. 김태원을 구성하는 부대 또한 여러 분진으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동생 김율도 별도로 의병부대를 이끌게 했다. 김율은 형이 의병에 투신할 것을 권유했을 때, "대장부가 이런 세상을 당해 의병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라며 형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선비였던 김태원이 인솔하던 의병을 '참봉진', 박사로 불리던 김율의 의병을 '박사진'이라고 불렀다.김태원 의병장이 최후까지 항전했던 어등산 토굴호남대학교 잔디축구장 입구에 시워진 어등산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석비◆어등산 중턱서 최후의 항쟁고창 문수사 전투, 영광 법성포 전투 등에서 승리하는 등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여러 차례 승리한 김태원 의병부대는, 1908년 2월 2일 설을 쇠러 담양 무동촌으로 왔다가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김태원은 포수인 강길환과 조덕관 등 매복시켰다 집중 사격을 가해 큰 승리를 거뒀다.하지만 같은 날 호남창의회맹소 맹주인 기삼연이 일본군에 체포됐다. 김태원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30여 의병을 이끌고 광주 경양역(현 광주 동강대학교 부근)까지 추격했으나 이미 광주 헌병대로 압송된 뒤였다. 일본군은 김태원 부대가 기삼연을 탈출시키려 하는 것을 눈치채고 이튿날인 2월 3일 광주천 작은 장터에서 총살했다.기삼연이 순국하자, 의병부대 '호남의소'를 이끈 김태원 형제는 장성 토천(토물)에서 일본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토물 뒷산에 보루와 방어진지를 쌓은 다음 일본군을 유인해 큰 패배를 안겼다. 무동촌 전투와 더불어 한말 의병 최대의 전과였다.일제는 김태원·김율 의병부대를 잡기 위해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고, 광주수비대와 헌병을 총출동시켰다. 1908년 3월 29일 동생 김율이 송정리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광주 감옥에 수감됐다. 이보다 앞서 김태원은, 2월 21일 장성 전투에서 오른팔과 오른쪽 배에 총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했다. 박산 마을 뒤 어등산에서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은신하고 있던 김태원은, 밀정의 제보로 4월 25일 일본군 토벌대에 포위됐다. 김태원은 의병들에게 피신할 것을 명했으나, 나주 출신 송석래 의병장 등 김태원 의진을 구성한 의병들은 물러서지 않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3시간의 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김태원, 송석래 의병장을 비롯한 의병 23명 모두 전사, 순국했다.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인 어등산 중턱에 있는 전적지가 그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김태원 의병장의 얼굴을 알지 못했던 일제는, 이튿날 감옥에 있는 동생 김율을 통해 형의 시신을 확인하게 하고, 김율도 그 자리에서 총살 시켰다. 형은 4월 25일, 동생은 26일, 하루를 사이에 두고 순국했다.◆항일 투쟁 정신 후세에 이어져김태원·김율 형제가 이끄는 의병은, 조경환·오성술·전해산 등이 이끄는 의진으로 새롭게 재편돼 항전을 계속했다. 분진으로 구성된 남도의병의 특징이 확인된다.김태원이 전사, 순국하자 일본군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 얼굴과 가슴을 인두로 지졌던 아내 낙안 오씨는,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장을 앞두고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며 음독 자결했다.무동촌 전투 당시 김태원은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권총, 장검, 망원경, 시계 등을 집에 가져다 두었는데, 어린 아들 경천이 밖에 들고 나갔다가 일본군에 끌려가기도 했다. 일본군은 당시 9살가량 되는 경천을 무려 24시간 동안 고문을 하며 태원의 행방을 알려고 했으며 이로 인해 경천은 불구가 됐다.백범 김구 선생이 김태원의 아들 김경천에게 보낸 서신.후손 김갑제 제공한학에 조예가 깊어 이후 서당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던 경천은 부친의 죽음과 모친의 순절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해방이 되자 경천은, 백범 김구, 이승만, 안재홍 등 당시 지도자들에게 서신을 보내 부친을 비롯한 많은 남도 의병의 공적을 밝히려고 노력했다.민세 안재홍이 김태원의 아들 김경천에게 남긴 '의중태산' 휘호.후손 김갑제 제공민세 안재홍은 '의중태산(義重泰山)'이라는 휘호를 보내 격려했고, 김구 선생은, 곧 정부가 수립되면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선양할 것이므로 조금만 참아달라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김경천과 당시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오간, 수십 통의 서신들을 경천의 아들 김갑제는 목숨처럼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서신을 정리한 바 있는, 초당대 박해현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한 독립운동가 박열은 태원을 "바다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계심과 같이 육지의 용장 김준 선생이 계신다"라고 칭송했다.광주 서구 농성광장에 조성된 김태원 의병장 동상정부는 김태원(1962)·김율(1995) 의병장에게 각각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태원의 충절을 기려 농성광장에서 동운 고가도로까지를 '죽봉대로'라고 명명했다. 또 광주 농성광장과 담양 남면 남초등학교 인남분교(폐교)에는 김태원 의병장의 동상이, 나주 시민공원과 함평공원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농성광장과 나주 시민공원에는 동생 김율에게 쓴 글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아우 율에게(與舍第心書)/ 나라의 위태로움이 한순간에 달렸거늘/ 뜻이 굳은 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온 힘을 다해 충성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거늘/ 백성을 구하려는 마음뿐, 이름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라네./ 싸운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죽음의 땅에 들어서리라./ 무신년(1908년) 2월 19일 형 준이 쓰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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