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③ 녹천 고광순
고경명 후손, 화순·구례서 활약
을미·을사·정미의병 모두 참여
'불원복' 새긴 태극기 군기 삼아
'축예지계' 지리산에 진지 구축
장기전 준비 중 연곡사서 전사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는 조금은 특별한 태극기가 있다. 일반적인 태극기 형태지만 태극무늬 상단에는 붉은색으로 '불원복(不遠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불원복'은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구한말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불원복 태극기'는 당시 의병들의 군기(軍旗)로도 사용됐으며 현재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94호로 지정돼 있다.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 세 차례의 의병에 모두 참여한 고광순은 국권 회복의 꿈을 태극기에 새기고 남도 곳곳을 누빈, 남도 의병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고경명의 후예, 남도 곳곳을 누비다
고광순은 호남의 대표적 명문가인 장흥 고씨 후예로, 호는 녹천(鹿川)이다. 어려서 백부 고경주의 집안으로 입양돼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의 사손(嗣孫)이 됐다. 인근에 있는 상월정에서 유학에 맹진한 그는 과거를 보러 상경했다가 시험관의 부패로 낙방하자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과 김홍집 내각에 의해 시행된 단발령에 항거하던 을미의병의 움직임은 전남에서도 일기 시작했다. 1896년 2월 장성에서 기우만이 전라도 유생들에게 거의(擧義) 격문을 보내자 고광순도 곧장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고 의병에 참여했다.
그는 상소문에서 '신의 선조 충렬(忠烈) 경명과 효열(孝烈) 종후와 의열(毅烈) 인후 3부자는 임진란에 순절을 하여…신은 의열의 사손입니다'라고 밝혀 자신이 고경명의 후예임을 분명히 했다. 이를 통해 고광순 스스로도 임진왜란 의병장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송사 기우만, 성재 기삼연, 녹천 고광순 등 명망이 있는 유림이 포함된 200여명의 장성 의병은 나주로 이동해 그곳 의병부대와 '연합 의진'을 결성했다. 나주와 장성 의병이 결합한 연합 의병부대가 출범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광주로 이동해 북상을 준비하고 있을 때 고종의 의병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졌다. 선유사 신기선의 선유문(宣諭文)에 따라 의진을 해산했지만, 비분강개한 고광순은 호남을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했다.

1905년 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을사의병 봉기가 이어졌다. 1906년 6월, 고광순은 전북 태인에서 거의한 최익현, 임병찬과 합류하기 위해 자신이 규합한 의병을 이끌고 순창으로 향했으나, 최익현과 임병찬이 순창에서 관군에 체포되자 눈물을 머금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광순은 광양에서 은거하던 맹인 의병장 백낙구를 만나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거병하기로 뜻을 모은다. 남원의 양한규, 능주의 양회일 등과도 만나 봉기 추진을 논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연합 의진 구성을 서둘렀다. 마침내 양한규와 남원을 공격하기로 한 고광순은, 1906년 12월, 일가의 족조(族祖)인 고제량과 상의해 고향 창평에서 문중 중심으로 거병했다.
의진의 대장으로는 고광순이 추대됐으며 막내아우 광훈, 집안 동생 광수·광채·광문 그리고 박찬덕·윤영기·박기덕 등 여러 사람이 참여했다. 당초 40명에 불과했던 의병 규모는 인근 지역의 포수 등이 합류해 70여명으로 늘어났다.
다른 지역의 의병과도 합진을 논의한 고광순은, 빠른 유격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군은 보복으로 고광순의 본가에 불을 지르고 아들 재환을 살해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도 고광순은 예정대로 남원을 공격하기로 한다. 고광순보다 앞서 의병장 양한규의 정예 의병 100여명은 남원 진위대가 주둔한 남원성을 공격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추격해 온 남원분견소 소속 일본 헌병의 공격으로 양한규가 전사했고, 고광순이 남원에 도착했을 때 양한규 의진은 모두 흩어지고 무너진 상태였다.
남원에서 퇴각한 고광순은 부대 편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전남 동북부 산악 지역을 거점으로 삼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정미년인 1907년 4월 25일 능주 양회일, 담양 이항선, 장성 기삼연 등의 의병부대와 함께 화순 읍내를 습격해 관공서와 일본인 점포를 불태우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다음날 광주에서 출동한 관군과 일본군은 고광순 부대의 이동로인 도마치 고개(圖馬峙, 화순군 남면 유마리 소재)에 매복해 공격을 가했으며, 격전에도 불구하고 고광순 부대는 패배하고 후퇴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력 손실이 크지 않았고 대부분의 병력이 매복과 포위 공격을 뚫고 산중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고광순 부대의 잇따른 활약에 자극받아 참여하는 의병이 늘어나자, 고광순은 8월 담양 창평에서 부대를 재편성했다. 고광순을 도독으로 삼고, 박성덕과 고제량이 각각 도총과 선봉, 신덕균과 윤영기 등을 참모로 삼았다. 이후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동복읍을 공격하고, 남원·곡성 등지를 지나며 격문을 뿌렸다. 또 순창분파소와 더불어 민중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일본군 헌병대 동복분파소를 습격했는데 이는 호남에서 본격적인 의병 전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이 시기에 고광순은 이미 일제가 '수괴'로 지목한 호남의 주요 의병장 중 하나였다.

◆의병 전쟁의 밑거름 된 '축예지계'
다른 의병부대와 합진을 통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고광순은, 의병 전쟁 전략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축예지계(蓄銳之計)' 전략이다. 이는 '일정 기간 훈련을 통해 병사들의 예기를 기른 뒤 전쟁에 임한다'는 뜻으로 이를 위해서는 특정 지역에 진지를 구축해 장기 항전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지리산 화개동(피아골)을 의병 항전기지로 생각한 고광순은 전북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이끌던 김동신과 만나 이를 함께 추진하기로 하고 지리산 연곡사를 근거지 삼아 병사들을 훈련 시켰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행군하여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 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 기지로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하여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銳氣)를 기르는 계책을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불원복(不遠復) 3자를 썼다.'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자는 고광순의 방략은, 당시 의병장 유인석이 백두산 근처에 의병부대 기지를 구축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자는 것과 구분됐다. 고광순의 이러한 방략에 따라 1907년 9월 무렵, 많은 의병이 순천·곡성·광양·구례 등지에서 모였다. 지리산을 근거로 무장 전쟁을 준비한 고광순은 화개동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급습해 상당량의 무기를 노획하기도 했다.
일본 수비대는 고광순이 지리산에서 장기 항전을 위한 진지를 구축하는 것을 막고자 광주 주둔군 기노 중대와 오카사키 경찰대, 진해 주둔 도코로 소대 등을 동원했다. 그리고 10월 17일 쌍계사에 본부를 둔 일본군 부대는, 연곡사에 주둔한 의병부대를 포위 공략했다.
진주·하동수비대, 진해만 중포병대대의 진주 파견대까지 동원된 대규모의 일본군의 공격은 고광순 입장에서도 갑작스러웠다. 그는 훗날을 위해 상당수 부대는 후퇴시켜 놓고, 본인을 따르는 결사 의병부대 50명과 함께 전투에 나섰다.
고광순은 "의를 위하여 목숨을 내던진 것은, 큰 종기에 침질 한 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결사 항전에 나섰다.
부장인 고제량도 "처음에 의로서 함께 일어났고 마지막에도 의로서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는가"라고 외치며 물러서지 않았다.

고광순, 고제량 등 30명의 대한제국 의병은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비록 고광순은 전사했으나, 그가 양병한 의진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흩어졌다가 다시 규합해 일본군을 공격하기를 반복했다. 고광순이 의도한 '축예지계' 및 '분진', '합진'의 의병 전술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대한제국 의병들의 집요한 공격에 당황한 일본군은, 1908년 2월 6일부터 3월 5일까지 일본군 14연대장이 직접 지휘한 이른바 '의병토벌대'를 편성했다. 진주, 함양, 거창, 심지어 광주 주둔 수비대, 그리고 조치원 주둔 기병까지 총동원된 대규모 진압부대였다. 이때 의병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치러진 전투만도 150여 회에 달한다. 확인된 전사 의병 숫자만 756명에 달하는 대혈전이었다. 남도에서 전개된 의병 전쟁의 대서막이었으며 의병장 고광순이 남긴 '불원복' 정신과 '축예지계' 전략이 그 중심에 있었다.
현재 의병장 고광순의 흔적은 구례 연곡사와 고향인 담양 창평면에 남아있다. 1958년 연곡사에는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세워졌으며 정부는 1962년 고광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일본 군경의 보복으로 불탄 고향 집터에는 1969년 '포의사(褒義祠)'가 세워졌으며 현판 글씨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현재는 녹천고광순의사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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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물들인 남도 의병의 희생···항일 투쟁 밑거름으로
전해산 의병장 동상에 새겨진 최후진술.호남호국기념관 제공
동학 동민 전쟁부터 백성들은 스스로 나라의 위기를 인식하고 '의병'이라 칭했으며 이러한 정신은 한말 의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의병 운동이 조직상의 결함을 드러냈다고 폄하하지만, 남도 의병이 수년간 일본군과 대등한 교전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평소에는 소규모 부대로 유격투쟁을 벌이다가도 필요시에는 대규모 연합 의진을 구성해 전면전을 펼친 유연성에 있었다. 또 항전을 장기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의병부대들이 해체된 이후로도 3·1운동과 항일운동단체 조직, 무장독립 전쟁으로도 이어졌다.무등일보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공동기획한 '남도 의병 열전'을 마무리 하며 한말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광주 서구 농성광장에 조성된 김태원 의병장 동상◆ 동학농민전쟁의 활발한 재평가최근 순천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들을 어떻게 성격지을 것인가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해 우리의 주권을 짓밟는 것을 본 백성들은 이를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로 인식했다. 이에 신분을 떠나 하나가 돼 대일 항전에 나서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스스로를 '의려(義旅)' 곧 '의병'이라 칭했으며 '동학의병'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전남은 일본군과 처절한 항전을 한 지역 중 하나다. 발표에 따르면 전남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러진 전투만 50여 회가 넘는다고 한다. 장흥 석대들에는 며칠 동안 일본군과 밀리지 않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의 항전이 한말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부터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다. 최근 정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고 나선 것은 다행이다. 때마침 문을 여는 남도 의병박물관에 '2차 동학'을 별도의 공간에 넣어 그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자 한 것은 긍정적이다.◆의진 간 활발한 연합전선 펼쳐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은 한말 의병의 활동을 '운동'에서 '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 투쟁을 하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서울 진공작전에 나선 13도 창의군의 결성이 그것이다.한말 의병은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 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새로운 활동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후기 의병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 '창의회맹소'는 의진 간의 연합작전도 전개했다.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이 연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1907년 12월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중요 전투에서는 서로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의진의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별로 유격투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호남창의회맹소'는 여러 차례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돼 순국한 이후에는 김용구와 김태원, 김율을 중심으로 분화됐다. 1908년 4월 김태원과 김율이 순국한 이후에는 심남일·조경환·전해산·오성술·안규홍·박도경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됐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분화 모습을 통해 회맹소가 합진보다 연합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호남창의회맹소와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진 담양 금성산성◆일본 정규군과 대등한 교전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3회나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등 전남 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전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심남일·이대극·안규홍 의병 등 11개 의병부대 약 2천명이 참여했다. 심남일이 연합의진 형성에 가장 적극적이었기에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됐다. 이것은 전기·중기 의병 때 분산적으로 활동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호남동의단'의 구성은 앞뒤에서 동시에 몰아치는 '기각지세'의 형성에서 의진 간 연합전선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들은 연합작전을 수행해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구체적으로 1909년 2월 치러진 남평 덕룡산 전투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이 인솔하는 250명의 의병이 덕룡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 군경과 3시간에 걸쳐 총격전을 벌였다. 박사화 의병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강무경을 비롯해 또 다른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는 박민홍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호남의소'의 특징은 의병부대들이 강력한 의진을 구성해 일본군 정규군과 2년 가까운 독립전쟁을 치른 원동력이었다.일부 연구자들은 1909년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하지만 앞서 살펴본 여러 의병 부대의 특성을 살펴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실상을 모르고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구례 연곡사에 위치한 녹천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장기항전으로의 전환 시도앞서 1908년 13도 창의군이 결성돼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할 때 유인석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로 호응해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국내에서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당시 의병의 역량으로는 일본 군사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인석은 지구전 전략이 실패하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내륙 깊숙한 산중에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의병계열의 백두산 근거지론은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 기지론과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이러한 국외 항일투쟁 근거지론과 함께 국내 근거지론이 대두됐다. 고광순이 주창한 지리산 근거지론이 그것이다. 앞장에서 간단히 살폈지만 그는 당장의 무장 투쟁보다는 장기 항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의 수립에 고심했다. 즉, 화력에서 압도적인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해 '축예지계' 즉, 장기항전에 대비해 일정기간 예기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국내에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한 그는 지리산을 주목했다. 유인석의 중부 이북 의병들이 추진한 '북계책'과 비교된다.고광순의 항전기지 건설 구상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이 본격화될 때 이미 시작됐다.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1907.음) 8월 11일 행군해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지로 삼아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해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를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불원복' 석자를 썼다.(행장, 녹천유고, 하)'이러한 지리산 근거지론은 1908년 초 "하동군 북쪽 골짜기의 지리산은 의병의 소굴이 됐다"하고 하는 데서 살필 수 있다.영암 국사봉을 의병 지휘본부로 삼아 치열한 의병 전쟁을 치른 심남일의 '호남의소'도 이러한 장기적인 항전 기지 건설과 연결돼 있다 하겠다. 국사봉에 근거를 둔 의병부대는 산상에 설치된 포대에서 포까지 발사함으로써 일본군의 접근을 차단했다.이러한 의병부대의 장기적인 항쟁 전략이 이어지면서 의병 전쟁은 일본 정규군의 엄청난 진압 작전에도 밀리지 않은 독립전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에 있는 주먹 동상◆값진 희생, 3·1운동으로 이어져한편 의병들은 3·1운동 때 적극 참여했다. 심남일 의병부대 도통장으로 활동하다 3·1운동을 주도한 남평 출신 김도숙은 의병 수뇌부가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고 독립의군부에서 호남유사를 맡았던 김종주는 낙안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의 칼에 찔렸음에도 저항해 호남 의병의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영암 구림 3·1운동에 앞장섰던 군서 출신 정상조는 '영암 의병' 출신이었다. 역시 '영암 의병'이었던 금정 출신 민치도는 3·1운동 후 화순에서 '독립국민당'이라는 항일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이러한 의병들의 참여는 더욱 격렬하게 이 지역의 3·1운동이 전개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남 의병들이 흘린 피로 전남의 온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이들의 빛나는 독립전쟁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를 늦추게 했다. 항쟁의 에너지는 응축돼 3·1운동, 그리고 무장독립 전쟁의 토대가 됐다. 특히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농민 항일운동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현장에 전남 지역민이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전남 의병의 값진 희생이 밑거름된 것이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 국난 극복 향한 의지에 지역도 계급도 구별 없었다
- · 백운산 호랑이의 기개, 대를 이어 전해지다
- · 총상에도 투지 꺾지 않은 부대 조직의 귀재
- · 대한제국 장교, 남도 누비는 의병장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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