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의병항쟁 중심지 남도, '민족의 등불'이 되다.

입력 2025.04.16. 16:53 임창균 기자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① 프롤로그
20년 넘게 전개된 한말 의병
최소 10만, 규모 파악도 난항
러 격파 일본군과 2년간 분전
남도의병 활약, 독립운동 토대
특정 의병 중심 연구 벗어나야
한말 의병장 심남일을 모시고 있는 함평 위충사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촉발된 의병 전쟁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으로 사실상 박탈당한 주권을 되찾기 위한 위대한 독립전쟁이었다. 1907년 10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약 380회에 달하는 일본 정규군과 의병부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광주·전남 곳곳에서 전개됐다. 일제의 식민 통치 야욕도 꺾였다. 일제가 1909년 기유각서 체결을 강요하며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박탈한 것은 의병들의 활동을 막고자 함이었다.

전남도는 임진 의병과 한말 의병 등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남도 의병들의 빛나는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널리 알리고자 올해 12월 개관을 목표로 '남도의병역사박물관'을 건립 중에 있다. 또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서훈 신청하는 뜻 깊은 일을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시도해 많은 성과를 냈다. 특히 의병 전쟁에 참여한 전남 출신 의병 1천여명을 새롭게 발굴해 그 가운데 150여명을 국가보훈부에 서훈 신청했다. 남도의병의 규모 및 실체를 밝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한국학호남진흥원과 무등일보는 우리 민족사의 등불이며 '의향, 전남'의 정체성인 한말 남도 의병의 활약상을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기획했다. 2018년 설립된 한국학호남진흥원은 한문학, 독립운동 자료 정리 등 남도의 정체성을 밝히는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지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대표적인 연구기관이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최근 발굴된 우리 지역 의병들의 활약상도 새롭게 소개될 것이다. 편집자주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앞장서 싸워 왔다. 사진은 조선 오란(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인좌의 난)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호남 의병 2천143위를 기리는 담양 충의사 호국충혼탑.

◆ 민족 자존의 불꽃이 된 무명의 영웅들

우리 남도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강한 애국심을 표출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을미사변·단발령과 을사늑약 후, 전 민족이 목숨을 건 항쟁을 했을 때 분연히 일어난 '의병'은 우리 민족의 자존감이었다.

한말 의병 전쟁은,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15년 대한광복회의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20년 넘게 전개됐다. 한국 무장 독립전쟁사를 찬란히 빛낸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한말 의병장 출신이었다. 대한제국 의병들의 독립전쟁이 향후 1920년 무장 독립전쟁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말 의병의 기원은 을미의병보다 앞선 1894년 가을부터 본격화된 2차 동학농민전쟁 때부터 찾아야 한다. '동학의병'을 자처한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전남 지역에서만 치러진 전투만 얼추 찾아보아도 50차례가 넘는다고 한다. 동학농민군들이 국권 피탈을 막고자 처절한 항전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국회에서도 2차 동학농민전쟁 참여자에 대한 국가유공자 서훈을 해야 한다는 입법 논의가 구체화 되고 있다. 동학군에 가담한 적지 않은 이들이 의병에 합류한 사실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한말 의병에 대한 최초의 저술인 '의병전'을 기술한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뒤바보' 계봉우(桂奉瑀) 선생은 "의병이라 하면 그 명사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들에 대한 평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함평 출신 심남일 의병장은, "의병은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는 것"이라 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이야기인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역사학자 박은식은, "'의병'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군(民軍)'"이라고 정의했다. 한말 의병은, 임진 의병의 전통을 계승해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일어선 사람들인 것이다.

한말 의병의 구체적인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무장한 의병의 피살자가 10만 명이었고, 무고한 촌민으로 학살당한 자는 곧 독립 이후가 아니고서는 그 통계를 구할 수가 없다"고 기술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이토의 죄목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한국 의사들과 그의 가족 10여만 명을 죽인 일"을 들었다.

일제가 작성한 대한제국 의병 토벌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등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가장 활발히 의병 활동이 이루어지던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불과 5년 동안 의병 규모를 약 14만 정도로 추산했다. 일제가 작성한 또 다른 통계에도 1907년 7월부터 11월까지 불과 5개월 동안 피살된 의병 숫자만 1만 5천 명으로 나와 있다. 기록에 잡히지 않은 숫자까지 포함하면 조국의 독립을 지키다 쓰러진 의병 통계를 세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전남도가 나주시에 조성 중인 남도의병역사박물관 조감도.전남도 제공

◆ 남도 의병 숨은 활약, 독립운동에 영향

한말 의병의 중심에 남도 의병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호남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이순신 장군은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고 해 남도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박은식은 "대체로 각 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다"고 살핀 바 있다. 1908년 광주·전남·전북 의병이 일본 군경과 치른 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 수는 각각 전국 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6.6%와 59.9%를 차지했다. 한 연구자의 연구에 따르면, 광주·전남지역에서 1907년 12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거의 2년 동안 일본군과 의병 사이에 전개된 전투 횟수만 380회 가까이 된다고 한다. 이는 이틀에 한 차례에 해당한다.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 기세가 주춤하던 1908년 무렵에도 남도 의병은 일본군과 물러서지 않은 대혈전을 전개하고 있던 것이다.

빛나는 남도 의병들의 활약은 일본의 식민지 야욕을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학생운동 등 일제강점기에 끈질기게 전개된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 하지만 우리 지역 의병 활동을 연구한 한 연구자는 "1909년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 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고 밝혔다. 남도 의병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까닭을 '내부의 분열'에서 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남도 의병이 세계 최강 러시아를 격파한 일본 정규군과 무려 2년 넘게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남도 의병은 '분진'과 '합진'이라는 독특하게 운용된 부대 전술을 바탕으로 일본군과의 전투를 지속해왔다.

그동안 남도 의병 연구는, 일제가 '거괴(巨魁)'라고 지목한 특정 의병장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남도 의병의 성격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및 전라남도가 추진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사업을 통해 남도 의병들의 활약상이 추가로 드러났다. 무등일보는 이를 바탕으로 남도 각지에서 활약한 의병장과 의병부대를 지역별로 고루 살펴보고자 한다. 대한제국을 빛낸 남도 의병의 성격이 새롭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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