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① 프롤로그
20년 넘게 전개된 한말 의병
최소 10만, 규모 파악도 난항
러 격파 일본군과 2년간 분전
남도의병 활약, 독립운동 토대
특정 의병 중심 연구 벗어나야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촉발된 의병 전쟁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으로 사실상 박탈당한 주권을 되찾기 위한 위대한 독립전쟁이었다. 1907년 10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약 380회에 달하는 일본 정규군과 의병부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광주·전남 곳곳에서 전개됐다. 일제의 식민 통치 야욕도 꺾였다. 일제가 1909년 기유각서 체결을 강요하며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박탈한 것은 의병들의 활동을 막고자 함이었다.
전남도는 임진 의병과 한말 의병 등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남도 의병들의 빛나는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널리 알리고자 올해 12월 개관을 목표로 '남도의병역사박물관'을 건립 중에 있다. 또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서훈 신청하는 뜻 깊은 일을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시도해 많은 성과를 냈다. 특히 의병 전쟁에 참여한 전남 출신 의병 1천여명을 새롭게 발굴해 그 가운데 150여명을 국가보훈부에 서훈 신청했다. 남도의병의 규모 및 실체를 밝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한국학호남진흥원과 무등일보는 우리 민족사의 등불이며 '의향, 전남'의 정체성인 한말 남도 의병의 활약상을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기획했다. 2018년 설립된 한국학호남진흥원은 한문학, 독립운동 자료 정리 등 남도의 정체성을 밝히는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지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대표적인 연구기관이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최근 발굴된 우리 지역 의병들의 활약상도 새롭게 소개될 것이다. 편집자주

◆ 민족 자존의 불꽃이 된 무명의 영웅들
우리 남도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강한 애국심을 표출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을미사변·단발령과 을사늑약 후, 전 민족이 목숨을 건 항쟁을 했을 때 분연히 일어난 '의병'은 우리 민족의 자존감이었다.
한말 의병 전쟁은,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15년 대한광복회의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20년 넘게 전개됐다. 한국 무장 독립전쟁사를 찬란히 빛낸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한말 의병장 출신이었다. 대한제국 의병들의 독립전쟁이 향후 1920년 무장 독립전쟁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말 의병의 기원은 을미의병보다 앞선 1894년 가을부터 본격화된 2차 동학농민전쟁 때부터 찾아야 한다. '동학의병'을 자처한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전남 지역에서만 치러진 전투만 얼추 찾아보아도 50차례가 넘는다고 한다. 동학농민군들이 국권 피탈을 막고자 처절한 항전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국회에서도 2차 동학농민전쟁 참여자에 대한 국가유공자 서훈을 해야 한다는 입법 논의가 구체화 되고 있다. 동학군에 가담한 적지 않은 이들이 의병에 합류한 사실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한말 의병에 대한 최초의 저술인 '의병전'을 기술한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뒤바보' 계봉우(桂奉瑀) 선생은 "의병이라 하면 그 명사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들에 대한 평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함평 출신 심남일 의병장은, "의병은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는 것"이라 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이야기인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역사학자 박은식은, "'의병'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군(民軍)'"이라고 정의했다. 한말 의병은, 임진 의병의 전통을 계승해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일어선 사람들인 것이다.
한말 의병의 구체적인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무장한 의병의 피살자가 10만 명이었고, 무고한 촌민으로 학살당한 자는 곧 독립 이후가 아니고서는 그 통계를 구할 수가 없다"고 기술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이토의 죄목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한국 의사들과 그의 가족 10여만 명을 죽인 일"을 들었다.
일제가 작성한 대한제국 의병 토벌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등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가장 활발히 의병 활동이 이루어지던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불과 5년 동안 의병 규모를 약 14만 정도로 추산했다. 일제가 작성한 또 다른 통계에도 1907년 7월부터 11월까지 불과 5개월 동안 피살된 의병 숫자만 1만 5천 명으로 나와 있다. 기록에 잡히지 않은 숫자까지 포함하면 조국의 독립을 지키다 쓰러진 의병 통계를 세는 것은 의미가 없다.

◆ 남도 의병 숨은 활약, 독립운동에 영향
한말 의병의 중심에 남도 의병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호남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이순신 장군은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고 해 남도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박은식은 "대체로 각 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다"고 살핀 바 있다. 1908년 광주·전남·전북 의병이 일본 군경과 치른 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 수는 각각 전국 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6.6%와 59.9%를 차지했다. 한 연구자의 연구에 따르면, 광주·전남지역에서 1907년 12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거의 2년 동안 일본군과 의병 사이에 전개된 전투 횟수만 380회 가까이 된다고 한다. 이는 이틀에 한 차례에 해당한다.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 기세가 주춤하던 1908년 무렵에도 남도 의병은 일본군과 물러서지 않은 대혈전을 전개하고 있던 것이다.
빛나는 남도 의병들의 활약은 일본의 식민지 야욕을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학생운동 등 일제강점기에 끈질기게 전개된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 하지만 우리 지역 의병 활동을 연구한 한 연구자는 "1909년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 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고 밝혔다. 남도 의병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까닭을 '내부의 분열'에서 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남도 의병이 세계 최강 러시아를 격파한 일본 정규군과 무려 2년 넘게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남도 의병은 '분진'과 '합진'이라는 독특하게 운용된 부대 전술을 바탕으로 일본군과의 전투를 지속해왔다.
그동안 남도 의병 연구는, 일제가 '거괴(巨魁)'라고 지목한 특정 의병장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남도 의병의 성격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및 전라남도가 추진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사업을 통해 남도 의병들의 활약상이 추가로 드러났다. 무등일보는 이를 바탕으로 남도 각지에서 활약한 의병장과 의병부대를 지역별로 고루 살펴보고자 한다. 대한제국을 빛낸 남도 의병의 성격이 새롭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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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원복' 깃발 아래, 지리산서 항전 의지 세우다 고광순 의병부대의 '불원복' 태극기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는 조금은 특별한 태극기가 있다. 일반적인 태극기 형태지만 태극무늬 상단에는 붉은색으로 '불원복(不遠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불원복'은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구한말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불원복 태극기'는 당시 의병들의 군기(軍旗)로도 사용됐으며 현재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94호로 지정돼 있다.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 세 차례의 의병에 모두 참여한 고광순은 국권 회복의 꿈을 태극기에 새기고 남도 곳곳을 누빈, 남도 의병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고경명의 후예, 남도 곳곳을 누비다고광순은 호남의 대표적 명문가인 장흥 고씨 후예로, 호는 녹천(鹿川)이다. 어려서 백부 고경주의 집안으로 입양돼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의 사손(嗣孫)이 됐다. 인근에 있는 상월정에서 유학에 맹진한 그는 과거를 보러 상경했다가 시험관의 부패로 낙방하자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1895년 을미사변과 김홍집 내각에 의해 시행된 단발령에 항거하던 을미의병의 움직임은 전남에서도 일기 시작했다. 1896년 2월 장성에서 기우만이 전라도 유생들에게 거의(擧義) 격문을 보내자 고광순도 곧장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고 의병에 참여했다.그는 상소문에서 '신의 선조 충렬(忠烈) 경명과 효열(孝烈) 종후와 의열(毅烈) 인후 3부자는 임진란에 순절을 하여…신은 의열의 사손입니다'라고 밝혀 자신이 고경명의 후예임을 분명히 했다. 이를 통해 고광순 스스로도 임진왜란 의병장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송사 기우만, 성재 기삼연, 녹천 고광순 등 명망이 있는 유림이 포함된 200여명의 장성 의병은 나주로 이동해 그곳 의병부대와 '연합 의진'을 결성했다. 나주와 장성 의병이 결합한 연합 의병부대가 출범한 것이다.하지만 이들이 광주로 이동해 북상을 준비하고 있을 때 고종의 의병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졌다. 선유사 신기선의 선유문(宣諭文)에 따라 의진을 해산했지만, 비분강개한 고광순은 호남을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했다.고광순 의병장 초상화1905년 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을사의병 봉기가 이어졌다. 1906년 6월, 고광순은 전북 태인에서 거의한 최익현, 임병찬과 합류하기 위해 자신이 규합한 의병을 이끌고 순창으로 향했으나, 최익현과 임병찬이 순창에서 관군에 체포되자 눈물을 머금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이후 고광순은 광양에서 은거하던 맹인 의병장 백낙구를 만나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거병하기로 뜻을 모은다. 남원의 양한규, 능주의 양회일 등과도 만나 봉기 추진을 논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연합 의진 구성을 서둘렀다. 마침내 양한규와 남원을 공격하기로 한 고광순은, 1906년 12월, 일가의 족조(族祖)인 고제량과 상의해 고향 창평에서 문중 중심으로 거병했다.의진의 대장으로는 고광순이 추대됐으며 막내아우 광훈, 집안 동생 광수·광채·광문 그리고 박찬덕·윤영기·박기덕 등 여러 사람이 참여했다. 당초 40명에 불과했던 의병 규모는 인근 지역의 포수 등이 합류해 70여명으로 늘어났다.다른 지역의 의병과도 합진을 논의한 고광순은, 빠른 유격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군은 보복으로 고광순의 본가에 불을 지르고 아들 재환을 살해했다.아들을 잃은 슬픔에도 고광순은 예정대로 남원을 공격하기로 한다. 고광순보다 앞서 의병장 양한규의 정예 의병 100여명은 남원 진위대가 주둔한 남원성을 공격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추격해 온 남원분견소 소속 일본 헌병의 공격으로 양한규가 전사했고, 고광순이 남원에 도착했을 때 양한규 의진은 모두 흩어지고 무너진 상태였다.남원에서 퇴각한 고광순은 부대 편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전남 동북부 산악 지역을 거점으로 삼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정미년인 1907년 4월 25일 능주 양회일, 담양 이항선, 장성 기삼연 등의 의병부대와 함께 화순 읍내를 습격해 관공서와 일본인 점포를 불태우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다음날 광주에서 출동한 관군과 일본군은 고광순 부대의 이동로인 도마치 고개(圖馬峙, 화순군 남면 유마리 소재)에 매복해 공격을 가했으며, 격전에도 불구하고 고광순 부대는 패배하고 후퇴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력 손실이 크지 않았고 대부분의 병력이 매복과 포위 공격을 뚫고 산중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고광순 부대의 잇따른 활약에 자극받아 참여하는 의병이 늘어나자, 고광순은 8월 담양 창평에서 부대를 재편성했다. 고광순을 도독으로 삼고, 박성덕과 고제량이 각각 도총과 선봉, 신덕균과 윤영기 등을 참모로 삼았다. 이후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동복읍을 공격하고, 남원·곡성 등지를 지나며 격문을 뿌렸다. 또 순창분파소와 더불어 민중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일본군 헌병대 동복분파소를 습격했는데 이는 호남에서 본격적인 의병 전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이 시기에 고광순은 이미 일제가 '수괴'로 지목한 호남의 주요 의병장 중 하나였다.구례 연곡사에 위치한 녹천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호남호국기념관 제공◆의병 전쟁의 밑거름 된 '축예지계'다른 의병부대와 합진을 통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고광순은, 의병 전쟁 전략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이런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축예지계(蓄銳之計)' 전략이다. 이는 '일정 기간 훈련을 통해 병사들의 예기를 기른 뒤 전쟁에 임한다'는 뜻으로 이를 위해서는 특정 지역에 진지를 구축해 장기 항전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지리산 화개동(피아골)을 의병 항전기지로 생각한 고광순은 전북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이끌던 김동신과 만나 이를 함께 추진하기로 하고 지리산 연곡사를 근거지 삼아 병사들을 훈련 시켰다.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행군하여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 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 기지로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하여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銳氣)를 기르는 계책을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불원복(不遠復) 3자를 썼다.'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자는 고광순의 방략은, 당시 의병장 유인석이 백두산 근처에 의병부대 기지를 구축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자는 것과 구분됐다. 고광순의 이러한 방략에 따라 1907년 9월 무렵, 많은 의병이 순천·곡성·광양·구례 등지에서 모였다. 지리산을 근거로 무장 전쟁을 준비한 고광순은 화개동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급습해 상당량의 무기를 노획하기도 했다.일본 수비대는 고광순이 지리산에서 장기 항전을 위한 진지를 구축하는 것을 막고자 광주 주둔군 기노 중대와 오카사키 경찰대, 진해 주둔 도코로 소대 등을 동원했다. 그리고 10월 17일 쌍계사에 본부를 둔 일본군 부대는, 연곡사에 주둔한 의병부대를 포위 공략했다.진주·하동수비대, 진해만 중포병대대의 진주 파견대까지 동원된 대규모의 일본군의 공격은 고광순 입장에서도 갑작스러웠다. 그는 훗날을 위해 상당수 부대는 후퇴시켜 놓고, 본인을 따르는 결사 의병부대 50명과 함께 전투에 나섰다.고광순은 "의를 위하여 목숨을 내던진 것은, 큰 종기에 침질 한 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결사 항전에 나섰다.부장인 고제량도 "처음에 의로서 함께 일어났고 마지막에도 의로서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는가"라고 외치며 물러서지 않았다.담양군 창평면에 위치한 녹천고광순의사기념관(포의사)고광순, 고제량 등 30명의 대한제국 의병은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비록 고광순은 전사했으나, 그가 양병한 의진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흩어졌다가 다시 규합해 일본군을 공격하기를 반복했다. 고광순이 의도한 '축예지계' 및 '분진', '합진'의 의병 전술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대한제국 의병들의 집요한 공격에 당황한 일본군은, 1908년 2월 6일부터 3월 5일까지 일본군 14연대장이 직접 지휘한 이른바 '의병토벌대'를 편성했다. 진주, 함양, 거창, 심지어 광주 주둔 수비대, 그리고 조치원 주둔 기병까지 총동원된 대규모 진압부대였다. 이때 의병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치러진 전투만도 150여 회에 달한다. 확인된 전사 의병 숫자만 756명에 달하는 대혈전이었다. 남도에서 전개된 의병 전쟁의 대서막이었으며 의병장 고광순이 남긴 '불원복' 정신과 '축예지계' 전략이 그 중심에 있었다.현재 의병장 고광순의 흔적은 구례 연곡사와 고향인 담양 창평면에 남아있다. 1958년 연곡사에는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세워졌으며 정부는 1962년 고광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일본 군경의 보복으로 불탄 고향 집터에는 1969년 '포의사(褒義祠)'가 세워졌으며 현판 글씨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현재는 녹천고광순의사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 흩어지고 뭉치고···일본군과 대등한 전투력 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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