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여성가족부 여성폭력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여성들의 여성폭력 경험율은 36.1%로 10명중 4명은 젠더폭력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네덜란드는 41%로 약간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성평등 신고, 응답 문화(적극적이고 솔직한 응답), 성폭력으로 인정 기준이 훨씬 다양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젠더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피해자 지원’ 정책의 일환으로 젠더폭력 지원(상담, 쉼터, 법률, 심리 지원)기관인 ‘쉼터’가 운영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개방형 쉼터로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알크마르의 Blijf Groep라는 비영리 단체가 운영하고 있는 ‘오렌지 하우스(Orange House)’ 였다. Blijf는 네덜란드 말로 ‘머물다, 안전하게 지내다’라는 의미로 현재 위기쉼터 40개, 110개 주거지원 시설을 운영하는 최대 조직이다.
‘오렌지 하우스’는 2008~2011년 공개 쉼터 운영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시작되었으며 핵심구호는 ‘Not secret, yet safe!’, 공개적이되 안전하게 피해자, 자녀, 목격자, 가해자를 포함한 모든 관련자를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이 오렌지 하우스를 비공개 쉼터에서 공개로 전환한 이유는 비밀 쉼터들이 완벽하게 비밀이 되기 어렵고, 비밀 쉼터로 운영하는 것은 ‘폭력’을 가시화 하기 어렵다는 점 등 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동안의 젠더폭력 피해자 대응 중심 정책을 폭력에 대한 구조적 접근과 예방에 대한 관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였다. 이를 위해 단순한 피해자 보호기관을 넘어 젠더폭력을 사회 전체의 문제로 공론화하고, 쉼터의 존재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고, 이를 통해 피해자의 고립이나 정서적 상처를 회복하고 폭력에 대한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으로 맞서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오렌지 하우스’와 한국의 젠더폭력 쉼터와 가장 큰 차이는 한국은 ‘보안 중심의 비공개 방식’ 형태이지만 네덜란드는 ‘지역사회 연계 중심의 공개 방식’이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의 비공개 쉼터(보안 중심 모델)는 피해자의 신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쉼터 위치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방식을 취하고 있고 공동주거 시설을 이용한다. 법률, 의료 등 지원서비스는 이루어지고 있으나 원스톱으로 추진되지는 못한다. 비공개 운영은 피해자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으나 사회와 단절, 심리적 압박감, ‘비밀장소’에 숨어야 한다는 사회적 낙인 등의 어려움, 공동생활의 불편, 팻 동반의 어려움 등을 수반하는 것이 현실이다.
반면 네덜란드의 경우 쉼터 위치를 공개하고 피해자가 일상생활(출근, 등교 등)을 유지하도록 지원한다.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인의 수치가 아닌 사회문제로 가시화하고 ‘오렌지 하우스’를 지역사회에 공개 함으로써 지역이 함께 연계하여 보안 위험을 줄인다. 이러한 경험은 피해자들이 퇴소후 사회복귀나 자립에 보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특히 입소자의 자존감과 회복 지원에 있어서 주거환경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공동주거가 아닌 1가족(1인) 독립형 생활공간, 팻과 공동생활을 허용하고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한국의 경우 주거공간의 독립적 운영 욕구가 크지만 극히 일부만 허용되고 있고 팻 공동공간은 매우 제한적으로 운영됨). 한편 네덜란드에서도 고위험군 피해자의 경우 정교한 보안시스템과 지역경찰과 연계하여 ‘안전가옥’이 관리되고 있다.
오렌지 하우스에서도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한 이슈이다. 이는 단순히 공간의 공개/비공개 의미를 넘어서 가해자, 가족, 피해자, 활동가 모두의 안전한 삶과 존엄의 가치를 누릴 권리의 보장을 고민한다. 공개 쉼터 활동은 가해의 분노조절, 피해자의 자존감·용기 회복 및 정서적 안정,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 등 모든 영역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특히 쉼터 활동가들의 안전을 위한 경찰과 연계, 1년 5주간 휴가, 36시간 근무 등 다양한 근무환경 조성도 시사점이 컸다.
지면상 모두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한국의 비공개 쉼터가 공개 쉼터라는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많은 요소가 필요할 것이다. 우선 공동주거 시설의 독립적 주거공간 제공, 원스톱 지원의 강화, 피해자들의 용기 회복을 위한 정서지원, 활동가의 ‘안전’ 보장, 지역사회가 젠더폭력을 공공의 문제로 인식하도록 하는 시민참여형 대안 창출 등 우리가 가야할 길은 멀다. 새롭게 도약하는 통합특별시 민주인권도시 광주야 말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젠더폭력 지원 모델을 구축하는데 최적의 도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네덜란드의 오렌지 하우스가 광주형 오렌지 하우스로 탄생 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오미란(광주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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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경 건넌 진혼, 1회 비엔날레의 ‘경계’를 넘다
중외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와라비좌의 제1회 광주비엔날레 기념 특별공연1995년 9월 20일, ‘경계를 넘어’를 주제로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막을 올렸다. 광주가 세계의 미술과 본격적으로 만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세계 각국의 작가와 작품들이 광주에 모였고, 전시뿐 아니라 각종 공연과 문화 행사가 함께 마련되었다. 광주비엔날레 창설 소식은 새해 벽두 바다를 건너가 재일한국인 미술 애호가 하정웅의 심장을 뛰게 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을 가로지르는 문화의 다리를 만드는 일”이었다.하정웅은 ‘두 조국’을 잇는 가교를 만들 단짝으로 일본의 민족가무단 와라비좌(わらび座)를 택했다. 와라비좌는 아키타현 다자와 호수 인근에 예술촌을 두고 일본 각지의 민속예능을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재구성해 온 공연단체다. 다자와 호수가 하정웅의 어린 시절이 깃든 장소라는 사실만으로도 하정웅과 와라비좌의 접점은 깊다. 그러나 그 접점은 장소적 친밀성 이상으로 각별하다. 그 인연은 다자와 호수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다자와 호수에는 ‘히메관음(ひめ觀音)’이라 불리는 관음상이 있다. 오랫동안 이 관음상은 수질 악화로 사라져간 물고기와 호수 수호신의 혼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정웅은 석연찮은 이 건립 배경 뒤에 은폐된 또 하나의 기억을 밝혀냈다. 발전소와 다자와 호수를 잇는 도수로 공사에서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희생되었으며, 히메관음상은 이들을 추모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인근 사찰에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고, 매년 가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 추모행사를 이어오고 있다.와라비좌는 해마다 열리는 ‘조선인 무주고혼(無主孤魂) 추모 위령제’에 함께했다. 1993년 8월에는 아시아 국제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된 한국의 무용가와 함께 진혼무를 선보였다. 한국의 현대무용가 이정희는 한국에서 가져온 흙을 뿌리고 살풀이춤을, 와라비좌의 아다치 마리(安達眞理)는 반주에 맞춰 진혼무를 추며 희생자의 혼을 달랬다. ‘한국에서 가져온 흙’은 상징적이었다. 일본 땅에서 죽은 조선인들의 혼 앞에 고향의 흙을 놓고, 그 위에서 한국과 일본의 예술가들이 춤을 추었다. 그것은 단순한 친선행사만은 아니었다. 잊힌 죽음을 함께 기억하고 예술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는 공동의 진혼이었다.망월동 5·18묘역 을 방문한 하정웅과 와라비좌 극단 단원들.2년 뒤 광주비엔날레 창설 소식을 들은 하정웅은 와라비좌를 한국에 소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개방되기 전이었고, 일본 문화에 대한 사회적 경계심도 여전히 강했다. 광주비엔날레 측도 처음에는 초청에 난색을 보였다고 하정웅은 회고한다. 그는 오히려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를 설득의 근거로 삼아 초청을 거듭 요청했다. 국경과 역사적 갈등을 넘어 서로의 문화가 만나는 일이야말로 비엔날레의 주제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하정웅이 보관해온 당시의 문서들은 이 과정이 말 몇 마디로 정리되지 않는 엄청난 에너지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참가 검토 문서와 협약서에는 그의 제안이 협의와 설득을 거쳐 공식적인 국제교류 사업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결국 와라비좌 광주 공연이 성사되었고, 하정웅은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이자 와라비좌 기념공연단 명예단장으로 양측을 연결했다.1995년 9월 28일 열린 와라비좌의 기념공연은 ‘조류를 타고(潮の流れにのって)’라는 주제 아래 일본 각지의 춤과 북, 민속예능을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특히 ‘바다의 통곡’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추모하는 진혼의 무대였다. 한국과 일본을 갈라놓으면서 동시에 이어온 바다는 이 공연에서 죽음과 애도의 기억을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었다.와라비좌의 광주 방문은 공연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월간 와라비’에 실린 광주비엔날레 방문기(하정웅)에는 공연단이 하정웅과 함께 ‘95광주통일미술제가 열린 망월동 오월묘역을 찾아 5·18 희생자들을 참배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공연 후 와라비좌가 하정웅에게 보낸 팩스에는 더욱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 “망월동에서 불렀던 노래의 가사”를 보낸다는 문구와 함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일본어로 번역(부분 개사)한 노랫말이 적혀 있다.1995년 광주를 1993년 다자와 호수와 나란히 놓으면 두 장소 사이에 흥미로운 교차가 나타난다. 다자와 호수에서는 한국의 예술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혼을 일본 예술가들과 함께 위로했다. 2년 뒤에는 일본의 예술가들이 광주로 건너와 중외공원 야외무대에서 진혼의 춤사위를 추고, 5·18 희생자들이 묻힌 망월동 만장 깃발 아래 서서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다.물론 두 죽음의 역사적 원인과 성격은 다르다. 하나는 식민지와 전쟁기의 노동에 얽힌 역사고, 다른 하나는 1980년 5월 국가폭력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다. 이를 하나의 비극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두 장소에서 이루어진 행위에는 공통점이 있다. 상처가 남아 있는 장소를 찾아가 죽은 이들 앞에 몸을 세우고, 흙과 꽃을 바치며 춤과 노래로 기억하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하정웅은 단순한 공연 후원자나 문화교류의 중재자 이상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다자와 호수에서 잊혀가던 죽음의 기억을 찾아내고, 한국과 일본의 예술가들을 히메관음상 앞에 세웠으며, 다시 와라비좌를 광주로 연결해 중외공원과 망월동이라는 또 다른 기억의 장소로 이끌었다. 이 가교에서 중심에 놓인 것은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과 기억, 죽음의 장소,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정웅은 ‘문화교류의 중개자’ 이상으로 서로 다른 기억의 장소를 이은 ‘기억의 문화예술 기획자’ 역할을 했다.1995년 와라비좌의 광주비엔날레 참가를 단순히 일본 민속공연단의 한국 초청으로만 기록한다면 이 사건의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그것은 문화가 국경을 건넌 사건인 동시에, 한 장소의 기억이 다른 장소의 기억을 만난 사건으로 봐야 한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는 그렇게 전시장 밖에서도 실현되고 있었다. 다자와 호수에서 광주로, 히메관음상에서 중외공원과 망월동으로, 흙과 춤에서 꽃과 노래로. 사람들이 경계를 넘었고, 그들과 함께 기억도 경계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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