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민 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한국춤평론가회 회장

국내에서 규모와 체계를 갖춘 3대 직업발레단이라고 한다면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 그리고 광주시립발레단을 꼽고는 한다. 1976년 창단된 광주시립발레단은 반세기 가까운 역사 동안 지역 발레를 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2010년대 들어 다소 침체기를 보내긴 했으니 했으나 여러 해 전에 드라마틱한 쇄신을 통한 재도약에 성공하였으며 현 박경숙 예술감독 체제에서는 상승의 안정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지역 소재의 발레단으로서 무용 문화가 집약되어있는 서울 소재의 직업발레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을 지닐 수밖에 없다. 특히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인형' 같은 고전 레퍼토리의 리바이벌에 있어서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과 동등한 입지를 구축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광주시립발레단만의 차별화된 창작 레퍼토리 확립이 매우 중요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지난 14~15일 광주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된 'DIVINE'은 광주시립발레단의 역량이 집약되어있는 창작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다. 안무를 맡은 주재만은 광주 출신으로 서울을 거쳐 뉴욕으로 진출하였으며 컨플렉션즈발레단이라는 세계적인 무용단에서 무용수, 안무가, 발레마스터, 부예술감독라는 길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갔다. 현재는 미국 포인트파크대학의 발레교수이자 컨플렉션즈발레단의 전임안무가 겸 발레마스터라는 중책을 맡고 있다. 재작년에 와이즈발레단의 의뢰로 'VITA'라는 작품을 안무하여 발레계와 관객들에게 엄청난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재미있는 점은 작년 6월에 주재만과 작가론을 위한 인터뷰를 할 때 "광주시립발레단과 잘 어울릴 것 같으니 함께 작업하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었는데 곧바로 그것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숭고한'이나 '신성한'과 같은 뜻을 지니는 'DIVINE'은 광주민주화항쟁을 소재로 하여 폭력과 불의에 맞선 인간의 고통과 희생 그리고 치유의 과정을 일련의 춤 이미지로 그려낸다. 무거운 소재를 동시대의 창작 경향인 컨템포러리발레(Contemporary Ballet)로 구현하고 있는데, 이야기 구조의 진득한 설명조보다는 일련의 춤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가장 두드러지게 각인되는 요소는 시각적인 미장센으로 조명, 세트, 소품 등을 때론 미니멀하게 때론 압도적으로 때론 심미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작품의 세련된 감각을 풍부하게 조성한다. 여기에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클래식 음악이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디자인된 의상까지 더해져 있다. 무엇보다도 안무와 실연에 있어서, 발레 테크닉을 바탕으로 하되 현대무용적인 요소까지 유연하게 넘나드는 확장성을 갖춘 움직임 표현으로 동시대적인 감각을 한껏 돋운다.
43명의 대규모 출연진은 침묵을 깨고 탄식과 애도의 몸짓을 펼치기도 하며, 자유를 향한 절규를 닮은 몸부림을 펼치기도 한다. 이때 무대 바닥에 수북이 쌓이고 또 내리는 검정 눈은 '재'를 상징한다. 앞 막을 내린 채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에 맞춰 기도하는 듯한 남성 독무가 깊은 인상을 심어놓은 후에 다시 막이 올랐을 때는 바닥, 세트, 의상, 조명할 것 없이 하얀색의 일색으로 변모되어 있다. 용서와 치유와 희망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숭고함과 신성함을 표현하면서 80분간의 막은 내려진다.
'DIVINE'은 동시대의 새로운 창작을 위한 광주시립발레단의 과감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추진력을 여실히 확인시킨 신작이다. 연출적인 면이나 안무적인 면에서 한국을 넘어 해외무대에서 소통될만한 동시대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으며, 마흔 명이 넘는 무용수들이 컨템포러리발레로의 대단히 빠른 적응력을 보였다는 점 또한 확인되는 바다. 광주시립발레단의 차별화된 창작 레퍼토리 확립에서 이정표가 될만한 작품이다.
심정민 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한국춤평론가회 회장
-
[문화칼럼] 손안의 화면이 아이의 세계를 빼앗는다
■김용근의 잡학카페상상력과 창의성은 각성이 아니라 느슨한 여백 속에서 자란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뇌과학을 통해 입증되고 있으며 교육에도 반영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여백조차 메워 버리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빈 공간의 철학은 더욱 절실하다. 최근 서구 여러 나라가 어린이의 스마트폰과 SNS 사용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서구 사회는 이제야 노자의 여백 철학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기술을 거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각의 여백을 지키려는 노력이다.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여백에 있다. “수레가 움직이는 것은 바퀴살 때문이 아니라 가운데 축의 빈 공간 덕분이며, 집이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 되는 것도 벽이 아니라 그 안에 빈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는 기원전 수백 년 전 노자가 쓴 5천 자의 ‘도덕경’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비어 있음이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며,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생명이 자라는 토대임을 말한다. 그는 더 많이 소유하고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과 달리 ‘비움’의 가치를 강조한다. 이는 오늘날 과잉 욕망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극을 해결하는 진리의 글이 되었다.짧은 공백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며, 새로운 가치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하지만 과잉 욕망과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모든 사이와 틈을 채워 버린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스스로 시간과 공간의 여백을 지우고 채우며 살아간다. 하루의 모든 사이와 틈을 스마트폰이라는 접속의 도구로 채운다. 아침부터 잠들기 전의 침묵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간의 틈을 스마트폰이 메운다.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느끼거나 창밖을 바라보고, 낙서장에 무언가를 상상하던 시간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 자리에는 지루함이 시작되기도 전에 영상이 재생되고, 질문이 생기기도 전에 검색 결과가 제시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삶이 일상이 되었다.노자가 말한 무위(無爲)는 게으름이 아니라 억지로 개입하지 않을 때 자연스러운 질서가 살아난다는 능동적인 철학이다. 성장에는 기다림과 실패를 견디는 시간, 혼자 고민하는 시간 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장기 어린이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질문보다 답을 먼저 보여 주고, 상상보다 이미지를 먼저 제공하며, 탐색보다 추천을 앞세운다.어린이는 스스로 길(道)을 찾지 못하고, 곧게 나아가는 마음의 작용인 덕(德)을 기르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길과 타인의 생각을 소비하는 데 익숙해진다.이러한 변화는 어린이에게 더욱 큰 영향을 미친다. 성인은 사고 체계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어 자기 결정권을 바탕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아이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사고방식을 형성한다. 짧은 영상은 긴 글을 읽는 집중력을 약화시키고, 즉각적인 자극은 순간적인 즐거움을 주지만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없앤다. 검색은 질문을 대신하고, 추천 알고리즘은 호기심을 약화시킨다.아이들은 더 빠르게 반응하지만 깊이 사고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이는 홀로 사유하는 인간 정신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킨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이 깊어질 시간과 공간을 잃어 가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각의 여백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자유란 원하는 것을 무한히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힘이다. 아직 자기 통제력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무제한의 디지털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임이다.서구 사회는 디지털 시대의 인간다움에 대한 답을 2천500년을 이어 온 노자의 여백 철학에서 찾고 있다. 노자는 행복이 과잉 욕망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 비울 줄 아는 데 있다고 말한다.침묵 속에서 생각이 자라고, 기다림 속에서 인내가 생기며, 여백 속에서 창의성이 피어난다. 스마트폰이 끝없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기술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혼자 하늘을 바라보며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다.노자의 ‘도덕경’은 과거의 철학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삶의 원리이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채워서는 안 되는 인간 내면의 마지막 빈 공간을 지키는 일이다.김용근 학림학당 학장, 창의융합공간 SUM 대표
- · [문화칼럼] 불안의 시대, 취향은 어디로 가는가
- · [문화칼럼]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나주가 이어가는 175년의 한-불 우정
- · [문화칼럼] 타인이 만든 제2의 이름은 찬사인가 감옥인가
- · [문화칼럼] 기억을 지우는 야만의 전쟁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전남광주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