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 타격대' 창설 주도 이재호씨의 쓸쓸한 투병

입력 2025.05.16. 10:26 이용규 기자
한양공대 졸업하고 잘나가던 사업가
계엄군 만행에 공사 자재 시위물품 지원
기득권 포기하고 무장조직 발대 15시간 항전
형집행정지로 석방될때까지 극심한 고문
뇌경색에 마비·언어장애 겹쳐 세상과 단절
1980년 5월27일 최후까지 전남도청을 지킨 기동타격대 부대장 이재호씨가 병상에서 부인 이혜옥씨와 환하게 웃고 있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기동타격대 조직을 주도한 이재호씨 근황이 언론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승환 기자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최후 15시간 계엄군과 대항한 기동타격대 부대장 이재호씨가 쓸쓸히 투병하고 있다. 한양공대를 졸업하고 잘나가던 사업가로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광주공동체를 지키고자 기동타격대를 창설했던 그다. 그는 몸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고문의 독소로 기억을 잃어가며 오래전부터 언어장애까지 겹쳐 병상에 누워있다. 

1947년 광주에서 태어난 이재호씨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을 다니다 1980년 고향에서 '이림인테리어' 회사를 차렸다. 5월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로 시위가 계속되자 창고에 쌓아놓은 수주한 리모델링 공사 자재를 시위용품 제작에 내놓았다. 날마다 심해지는 공수부대 만행에 자전거를 타고 핸드마이크로 시민군 참여를 독려하고, 역사의 현장 전면에 나섰다.

그는 광주를 지킨다는 목표로 기동타격대 조직에 나섰는데, 계엄군의 광주학살에 분노한 15세 소년에서 30대까지 40여명이 자원했다. 이들은 대부분 초중등 중퇴생이고 노동자와 종업원 등 평범한 시민이었다. 반면 이씨는 33세로 나이가 가장 많고 유일하게 대학과 번듯한 사업체를 가진 사회 지도층이었다. 5·18 45주년을 앞두고 최근 무등일보 취재진과 광주의 한 요양병원과 보성 미력옹기에서 만난 부인 이혜옥씨는 "광주 북중과 서울 경희고를 졸업한 재호씨는 당시 사회당 당수를 지낸 김철씨의 아들인 김한길 전 의원의 형과 아주 친하게 지내 김철씨의 영향으로 5·18에 적극 참여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시민군의 무장조직을 고민한 이재호씨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대위 예편한 친형에게 군대 편제 방식에 대해 문의를 했다. 그러나 형은 동생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았다. 동생이 시국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형의 마음이었다. 시대의 역설이다.

이재호씨를 비롯한 기동타격대는 27일 새벽 도청에서 체포됐다. 부인의 얘기다. "재호씨가 2층에서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이 계엄군의 사격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고 아래층으로 피하다, 계단으로 올라오던 계엄군과 맞닥뜨렸다. 계엄군이 그 자리에서 재호씨에게 총을 쏘았더라면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는 얘길 자주 했었다"고 했다. 계엄군은 이재호씨를 혹독하게 고문했다. 부대장으로 알려진 이씨가 기동타격대를 조직, 발대 선서문을 작성 낭독했기에 계엄 당국은 사실상 대장으로 보고 더욱 심하게 대했다는 것이 부인의 생각이다.

내란중요임무종사 죄목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이재호씨는 광주에서 1급 자동차 정비업체를 운영하던 부친과 주변인들의 탄원으로 1982년 8월15일 특사로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2년여간 광주교도소 독방에 있었다.

부인 이씨는 "계엄 당국은 재호씨에 대해선 이감도 안시켜주고 심한 고문과 구타를 했다. 재호씨가 앉지도 서지도 못한채 엎드려서 음식물을 먹었다는 사연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출옥 후 이재호씨는 치안본부에서 근무하던 이씨와 결혼했다. 그의 서울 신혼집은 당시 5·18 관련자들의 서울출장소 처럼 붐볐고, 시국 수배자들의 도피처 역할을 했다. 폭도의 낙인이 찍힌 이씨의 직장생활은 당국의 감시로 순탄치 못했다. 가정 생계는 부인 이씨가 책임졌고, 빈궁해진 살림살이는 그의 활동을 위축시켰다. 타격대 후배들을 도와줄 수없음에 좌절하고 그의 몸과 정신을 힘들게 했다. 타격대원들의 피가 서린 도청 별관 철거 반대 투쟁 실패도 세상과의 단절에 한몫했다. 타격대 동지들은 이재호씨를 따듯한 형으로 기억하고 있다. 양기남 기동타격대동지회장은 "재호형은 사실상 대장이었다. 카리스마있고 성격 자체가 강했지만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고, 짧은 시간임에도 총기 사용부터 대원들을 다독이는 모든 면에서 리더였다"고 했다.

45년간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이씨에게 트라우마센터에서 '상처'를 내놓고 치유를 받는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결국 2번 다녀온 후 발걸음을 멈췄다.

부인 이 씨는 "재호씨는 얘기를 듣기는 하나 언어장애로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며 "예전엔 5·18 얘기를 하면 화를 냈는데 지금은 말을 못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혼자 생각할 때가 많다"고 속사정을 드러냈다.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는 이씨는 "재호씨를 전남대에서 5·18 강사로 초청했는데 응하지 않았다. 청년들에게 올바로 설명을 해주는 것도 중요한데, 슬펐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아쉬워했다.

한때 이재호씨 5·18보상금 수령은 담당 공무원들의 최대 현안이었다. 광주시 관계공무원들은 보상금 수령을 거부하던 이씨를 대상으로 밤늦게 뿐만 아니라 새벽에도 계속 전화를 해서 제발 받아가 달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다고 부인 이씨는 회상했다. 민주유공자인 이 씨는 병원비 부담은 없으나 간병비는 지원되지 않기에 사양화되고 있는 옹기 판매로 살림을 책임지는 부인의 수입으로선 부담이 크다. 광주공동체와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앞장섰던 남편이 자랑스럽다는 아내는 "재호씨 상태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길 하루하루 기도한다"고 언급했다.

그동안 언론을 기피해왔다는 이재호씨는 부인과 무등일보 취재진과의 대화에 "감사해요, 고마워요"라고 힘겹게 감사를 전했다.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광주공동체를 지키고자 모든 것을 포기했던 평범한 시민이 감당해야 할 고통의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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