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김태진 광주 서구의원
포고령에도 광장서 자유 발언
광주 1인시위·서울 노숙 농성
"광장 목소리 의회로 옮길 것"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난해 12월3일, 김태진 광주 서구의원은 주저 없이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그러했듯 김 의원을 비롯한 80여명의 시민들이 분수대 앞에 모였다. 계엄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도 집회는 새벽 내내 이어졌다.
현장에서 김 의원은 자연스럽게 발언대에 올랐다. 사전에 준비된 연설문은 없었다. 국회의 계엄 해제가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광장의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의 입을 열게 했다.
김 의원은 "한겨울이었지만, 당시의 추위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며 "'국회가 계엄 무효를 선언하더라도 윤석열이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2016년 우리가 촛불을 들었던 그 마음으로 다시 나서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계엄 포고령에는 의원들의 정치 활동 중단 지시도 포함돼 있었다. 의원실을 비워야 할지 고민도 있었지만, 거리와 광장에서 정치를 배워온 그에겐 두려움을 덜어낼 만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광우병 집회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금남로와 지역 곳곳을 누비며 시민들과 함께했다.

김 의원은 "과거의 집회 경험이 다시 나를 거리로 이끌었다"며"두려움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고 말했다.
계엄 해제 이후에도 그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광장을 지켰다. 때로는 서울로 올라가 광화문에서 목소리를 높였고,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노숙 농성도 벌였다. 3월에는 매일 아침 서구 일대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갔다. 추위와 눈, 비는 그에게 변수가 되지 못했다.
김 의원은 "코와 귀끝이 빨개질 정도로 추웠지만, 날씨는 중요하지 않았다"며 "'윤석열 파면', '즉각 체포' 등의 문구를 담은 피켓으로 시민들의 공감과 응원의 목소리를 끌어내며 광장 밖과 안을 연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계엄 선포부터 탄핵 선고까지 약 4개월 동안 수십 차례 집회에 참여한 김 의원은 그 과정에서 새로운 세대와 마주하고, 오래된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정치에 무관심할 것이라 여겨졌던 젊은 세대는 이미 광장의 중심에 있었다. 문화와 정치가 결합된 현장에서 그 역시 '정치인'이 아닌 '동료 시민'으로 존재했다.

김 의원은 "그동안은 정치인이라는 틀 안에서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달랐다. 집회는 젊은 세대에겐 축제였고, 나도 시민으로서 그 자리를 즐겼다"며 "딸과 함께 갔던 NCT 콘서트에서 느꼈던 젊은 세대의 생생한 에너지가 거리로 흘러들어올 줄은 정말 몰랐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던 날의 긴장감도 또렷이 기억한다. 광장에서 생중계를 보며 결과를 기다리던 순간, 시민들의 얼굴엔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통과 소식이 전해지자 금남로엔 기쁨과 안도, 울컥함이 뒤섞인 표정들이 가득했다. 이어진 행진 도중 울려 퍼진 '다시 만난 세계'는 그에게 '광주 시민'이라는 존재의 감각을 강하게 각인시켰다.
무엇보다도 깊은 인상을 남긴 건 집회의 '나눔' 문화였다. 과거 5월의 주먹밥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장면들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차별 없는 발언 기회, 장애인과 성소수자를 비롯한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풍경은 광장의 성숙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김 의원은 "그 순간들 속에서 시민 공동체의 진짜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김 의원의 다음 목표는 광장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의회로 가져가는 것이다.
김 의원은 "광장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며 "지역 정치는 여전히 폐쇄적이지만 특정 진영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제도 안에서 실현해 나가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강주비기자 rkd9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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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떠올라 앉아 있을 수 없었다"···문인, 4개월간 뚝심 행보 "1980년 5월을 떠올리게 하는 밤이었습니다."문인 북구청장이 되돌아본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 심경이었다. 전국에 울려퍼진 비상계엄과 포고령 선포는 평화롭던 광주에 마치 총성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문 구청장은 "계엄 선포를 바라보면서 번뜩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활동에 대한 금지 명령이 있었지만 곧바로 5·18 단체와 종교단체, 학계 지도자, 정계 관계자 등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의견을 피력했다"고 말했다.비상계엄 해제 이후 문 구청장은 파격적인 행보로 인지도를 높였다.문 구청장은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부터 파면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122일간의 여정 동안 매주 서울 집회에 참여했다.문 구청장은 "매주 서울과 광주를 오가는 길이 힘들 수 있었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끌려가듯 서울로 향했다"며 "현장을 가득 채운 2030 청년들과 곳곳에서 빛나는 응원봉을 바라보며 감동했고,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이들에게 주먹밥을 나눠드리는 순간 나의 작은 행동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문 구청장은 계속해서 뚝심 있는 행보를 이어갔다. 가장 인상적인 행보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청사 현수막 게첨이다.북구청사 외벽에 파면을 요구하는 대형 현수막을 게첨했고, 이에 따른 과태료가 3차례나 부과됐음에도 굴하지 않았다.게첨 기간 국민의힘 관계자들에게서 항의를 받고, 가로세로연구소의 고발을 당하며 수많은 압박을 받았지만 "파면이 될 때까지 흔들리지 않겠다. 극우 보수단체의 고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며 행보를 이어갔다.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 결정이 이뤄진 직후에는 '국민의 승리', '성장과 통합의 길'이라는 현수막으로 교체하면서 기쁨을 함께하기도 했다.박근혜 전 대통령과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바라보면서, 문 구청장은 "정치인 중 한 명으로서 의견 피력의 중요성, 민의 대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말했다.문 구청장은 "지난 2016년 당시보다도 과격하고 대규모로 이뤄진 극우 단체의 행동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며 "박근혜 탄핵 당시에는 공직자의 신분이라 연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지금은 정치인 중 한 명이자 국민 중 한 사람으로서 마땅한 목소리를 내고 국민을 대변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고 강조했다.문 구청장이 생각하는 가장 시급한 목표는 민생 안정이다.문 구청장은 "윤 전 대통령 파면이 이뤄졌고, 일정이 확정된 지금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며 "하지만 당장의 실리를 위해 개헌을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문 구청장은 "계엄부터 4개월간의 암흑기를 겪었고, 대외 정세와 맞물려 민생경제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며 "먼저 생각할 것은 민생 안정과 통합을 이뤄내는 것이다"고 말했다.이어 "수 개월간 연대를 통해 결과를 쟁취한 만큼, 앞으로도 진영 구분 없이 국민들과 함께 올바른 선택을 하고, 다시는 아픈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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