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지속적 실천이 만든 크고 작은·느리고 급격한 변환 조명
작가 작업의 흐름 보여주기 위해
참여 작가 역대 최소로 꾸려

제16회 광주비엔날레가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You must change your life)’를 주제로 예술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지난 12일 저녁 광주비엔날레는 호추니엔 제16회 광주비엔날레 감독과 큐레토리얼팀 최경화, 박가희, 브라이언 쿠안 우드이 참석한 가운데 주제발표를 가졌다.
이번 광주비엔날레 주제는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You must change your life)’. 호추니엔 감독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의 마지막 구절에서 착안한 것이다. 아름다운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던 릴케가 궁극에는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하는 내면의 깨달음을 얻게 되고 이를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라고 나타낸 시구이다.
그렇다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까. 호추니엔 감독은 이에 주목해 예술이 만들어온 크고 작은, 느리거나 급격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호추니엔 감독은 “변화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에 광주만큼 적절한 곳은 없다. 광주는 변화의 도시로 이곳의 민주화투쟁 역사는 전세계적으로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을 준다”며 “광주에서 ‘변화’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있는 역사이고, 사회의 질서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시민들의 몸 안에는 변화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호추니엔은 변화가 반복적인 실천 속에서 지속된다고 보고,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이 예술을 통해 이어온 다양한 실천의 과정을 조명할 계획이다.
그 실천은 돌봄 등처럼 일상 속에서 지속되기도 하고, 시민미술학교처럼 서로 배우고 질문하며 집단적으로 펼치기도 하며, 에너지를 강도 높게 집중하는 형식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호추니엔 감독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이번 전시의 참여작이기도 한 제주 화산탄을 들었다. 여기에는 수백만 년의 지질 변화와 폭발 순간의 급격한 변화라는 전혀 다른 변화가 담겨있다.
호추니엔 감독은 “화산탄은 변화의 다양한 속도와 규모를 담고 있어 내게 또다른 영감의 원천이 됐다”며 “이번 비엔날레가 탐구하고자 하는 변환을 보여주는 강력한 이미지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번 비엔날레에서 느리고 보이지 않는 것부터 갑작스럽고 폭발적인 것까지 규모를 가로질러 다양한 변화들을 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지속적인 예술적 행동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참여 작가의 수를 역대 최소 인원인 40~45명 선으로 꾸리고 한 작가의 여러 작업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한 작가가 여러 작업을 통해 지속해 온 예술적 행동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호추니엔 감독은 “통상적으로 비엔날레는 많은 작가들의 단일 작품을 모아 보여준다. 마치 많은 점이 모인 것과 같다”며 “하지만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단일 작품 뿐만 아니라 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보여주며 선을 이루고 하나의 흐름을 보여줄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의 예술적 실천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가시화하고, 그 축적된 과정이 만들어낸 지속성의 산물을 보여줄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같은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를 잘 보여주는 커미션 작품으로는 권병준·박찬경, 재클린 키요미 고크, 남화연의 작품이 선보여질 계획이다. 이중 권병준·박찬경 작가는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며 공동체로부터 쇠붙이를 모아 무구를 만들었던 ‘쇠걸립’에서 착안, 시민들로부터 쓰지 않는 쇠붙이를 기부 받아 사운드 설치 작업을 할 계획으로 눈길을 모은다.
한편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오는 9월 5일부터 11월 15일까지 72일 동안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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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육지 오가며 왜군 격파··· 한산·행주대첩의 승부사
삼도수군사령부가 있었던 통제영(경남)통영)의 세병관(국보305호).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1차 진주대첩 등을 ‘3대첩’이라 한다. 이 가운데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등 양 대첩에 참전해 공을 세운 보성 출신 선거이가 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선거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해전과 육전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1598년 10월 울산성 전투에서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선두에서 독전하다 적탄에 쓰러졌다. 최근 보성 선씨 문중에서 주관한 학술대회에서 선거이 공적이 새롭게 조명됐다. 특히 이순신 장군과의 관련성을 집중 살핀 순천대 이욱 교수의 글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본 호 집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선거이 등 5명의 보성 선씨 위패를 모셔놓은 오충사(전남보성).선거이는 명종 즉위년(1545년)에 태어났다. 호는 ‘친친(親親)’이었다. 그의 효성이 남달라 붙여진 이름이다. 본관은 보성이고 보성 조성에서 살았다.선거이는 최근 발굴된 ‘기묘문무과방목(己卯文武科榜目)’에 따르면, 1579년 기묘년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합격 당시 ‘겸사복(兼司僕)’에 있었다. 대통령 경호 부대 곧 최정예 금군(禁軍) 출신이었다. 그가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무과에 합격한 후 그는 북쪽 국경에서 근무했는데, 이곳에서 이순신을 만났다. 선거이는 무과 합격하고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무관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절충장군이 됐다. 이는 무예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승진이 빨랐음을 말해준다.선거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 3월10일 진도군수에 부임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휘 능력이 검증된 실전 경험이 뛰어난 인물들을 경상, 전라 등 남해안의 지휘관으로 보임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591년 2월 이순신이 진도군수에 임명됐다가 가리포 첨사로, 다시 전라좌수사로 보임됐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도군수에 이순신, 선거이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연이어 보임된 것은 진도가 왜구의 주된 공격 루트였던 것과 관계 깊다. 이순신과 선거이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유성룡이 무과 급제 후 인사차 들른 선거이에게 “전날 이순신을 보고, 또 오늘 그대를 보니 범장(范張)이 다시 나타난 것과 같다”고 했다.범장은 범식(范式)과 장소(張邵)을 가리키는 말로 깊은 우정을 빗댈 때 하는 고사이다. 서애가 이들의 관계를 범장에 비유할 정도로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려준다.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던 이순신이 여진족의 공격으로 그 지역이 커다란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이순신이 책임을 지고 투옥됐을 때 같이 근무하던 선거이가 옥을 방문해 위로한 적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진도군수로 전라우수영의 관할에 속했던 선거이는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수군과 함께 경상우수영을 지원하는 합동작전에 참전했다. 선거이가 한산도 해전에 참전했던 기록이 선조실록에 있다.김응남이 말했다.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 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했다. …”정곤수는 말했다. “정운이 ‘장수가 만일 가지 않는다면 전라도는 필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가서 격파했다 한다.”전쟁 발발 초기 경상도 수군의 요청을 받아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대다수 전라도 장수들은 머뭇거렸다. 앞서 진무성 장군을 다룰 때 언급했지만, 이순신의 휘했던 송희립, 정운 등이 참전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선거이도 전쟁 초기부터 적극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선거이는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음에서 알 수 있다.호남·영암 수군이 견내량에 모여 왜적의 큰 배 중 10척, 중·소선 70여 척을 발견하고 접전했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을 쏘았으나 전혀 깨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 큰 바다로 퇴진해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군수 선거이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난중잡록1, 임진년 7월한산도 해전에 참여한 선거이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로 선거이가 한산대첩 승리의 주역임을 알려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한산도 해전에서 선거이 역할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은 당시 수군 편제상 선거이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전라도 수군과 공동작전을 펼치고 있던 선거이는 전라감사 이광의 지원 명령을 받고 수원으로 이동했다. 전라병사 최원과 의병장 김천일이 수원에서 인천으로 진을 옮기면서 이광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광은 진도군수 선거이에게 김천일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후 전라병사로 승진한 선거이는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직접 참전하지는 않고 외곽에 포진해 있었다. 행주대첩에는 간접적으로 참여한 셈이다. 하지만 선거이 부대가 요로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이 행주산성을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산도 해전, 행주산성 전투에서의 조선군 승리는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전투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선거이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1595년 충청수사에 임명된 선거이는, 그해 5월에서 9월까지 약 115일 동안 한산도의 통제영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작전을 논의했다. 이 시기에 무려 31일 이상 만났음이 난중일기에 기록되고 있다. 1595년 9월 14일 선거이와 이별할 때 이순신은 다음의 시를 지어 석별을 아쉬워했다.북쪽에 갔을 때 함께 고생했고남쪽으로 와서는 생사를 같이 했네.오늘 달 밝은 밤에 술 한 잔 같이 하면내일은 이별의 감정을 느끼겠구려.한산도 이순신 장군 집무실에 해당하는 제승당.이순신은 선거이와 북의 여진족, 남의 일본과의 전투에서 생사를 함께 한 정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1596년 9월 24일 이순신이 공무로 보성에 갈 일이 있자 선거이의 집을 방문했다. 거기서 이순신은 선거이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안타까워했다.한편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선거이는 성을 비우라는 명군과 권율 등 조선군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진주성을 나와 외곽 방어를 했다. 김천일 등은 진주성이 함락되면 호남이 위태롭다는 판단에 따라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했다. 유성룡은 진주성 함락은 공성 작전을 따르지 않았던 김천일의 실책이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성룡이 남인, 김천일이 서인으로 당색이 다른 것도 이러한 평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조정의 명령에 따라 공성 작전을 수행한 선거이에게 진주성 함락 책임을 물었다. 임진왜란 공신 책록에서 선무공신 아래 등급인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됐다. 이순신과 3차례나 연합해전을 전개하고 육전에서는 일본군과 끈질긴 전투를 하고 마침내 전투의 선봉에서 지휘하다 장렬한 전사를 한 영웅에 대한 온당한 처사는 아니었다. 고향인 보성에 선거이 등 보성 선씨 5인의 영정을 봉안한 ‘오충사’가 있다. 한경국기자 hkk4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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