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들도 그런가? 나는 살수록 쉬운 것들을 모르겠다. 사랑만 해도 그렇다. 아이가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남발하는 말인데 가만 생각하면 사랑이 뭔가, 역시 모르겠는 것이다. 다만 사랑이란 것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고만고만한 무수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반짝 하고 빛나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 찰나와도 같은 섬광이 평범한 누군가를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로 변화시킨다는 것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검은 교복이 수의처럼 청춘을 옥죄고 있던 시절, 아마도 시건방 때문이겠지만 인생 만사가 시들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봤자 신문에 이름줄이나 오르내리며 거들먹거리는 인간이 될 것이고 그도 아니면 교복과 다름없는 정장에 한 평생이 묶인 월급쟁이나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허무주의자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나는 어린 패배자에 불과했다. 누구나와 다를 바 없이 꿈도 많고 욕망도 컸지만, 내 부모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이 사회의 이단자들이었고, 그 결과로서 당연히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이다. 그 지울 수 없는 열패감이 나를 어린 허무주의자로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 무렵 나는 저녁밥을 먹고 나면 하숙집 3층 옥상으로 올라가 시간이 흘러가는 모양이나 구경하곤 했다. 손바닥만 한 도시에 불이 켜지고 그 불이 꺼지고, 도시의 불빛에 가렸던 달이나 별이 도시를 감싸 안을 때까지 나는 정물처럼 옥상에 앉아 있었다. 내 청춘도, 내 평생의 시간도 이렇게 흘러갔으면, 그래서 다음날 아침 질마재 신화의 그 아낙처럼 한줌의 재로 변했으면... 싶었다.
어느 날 밤, 옥상 위에서 서성거리던 나는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려앉는 골목길로 들어서는 레미콘 트럭을 보았다. 그 커다란 차에서 내린 것은 왜소한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다른 트럭 기사들처럼 주위를 둘러보는 일도 없이 하숙집 옆으로 오십여 미터 길게 뻗어 있는 창녀촌을 향해 종종 걸음을 옮겼다. 두어 시간 흘렀을까. 도시의 집집마다 환하게 불을 밝힌 시간, 비틀거리며 걸어 나온 사내는 하필 하숙집 바로 앞의 전봇대에 머리를 박았다. 부근의 노란 가로등불에 듬성듬성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사내의 정수리가 훤히 드러났고, 사내는 전봇대에 머리를 박은 채 야윈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아득히 멀어지는 썰물처럼 사내는 여윈 어깨를 들썩거리며 점점 작아져 땅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구월이었는지 시월이었는지, 아무튼 햇살이 찬란하게 밝았다. 등교하던 나는 무심히 텅 빈 창녀촌 골목을 바라보았다. 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까지 햇살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봇대 아래 무언가 햇살을 튕겨내고 있었다. 가만 들여다보니 그것은 엊저녁의 사내이거나 그 사내와 다를 바 없는 누군가 슬픔처럼 토해놓은 토사물이었다. 반쯤 삭은 콩나물 대가리가 아직 덜 삭여진 슬픔인 양 비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는데, 햇살은 어김없이 그 위로도 쏟아져 따스한 손길로 누추하디 누추한 그것들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나는, 울었다. 뚝뚝,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고, 몇 방울 또르르, 맑디맑은 눈물이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나는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햇살 눈부시던 그 날 아침, 토사물 위로 내리쬐던 찬란한 햇빛만은 뇌리에 각인되었다.
쉰 넘어서야 내가 그날 왜 울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무렵의 나는 세상의 토사물과 같은 존재였다. 빨갱이의 딸, 평생 음지에서 살아야 할 버려진 존재, 그런데 햇살은 세상만물, 저 더러운 토사물 위에도 공평하게 내리쬐고 있었던 것이다. 토사물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받은 내 마음으로도 따스히, 참으로 따스히.
오늘도 내 어깨를 부딪고 스쳐가는 낯모르는 사람들 역시 저 전봇대에 머리를 박은 사내와 같으리라. 저마다의 마음속에 담겨 있을 가장 누추하고 더러운 토사물을 저 햇살인 양 어루만지는 것이 곧 사랑이며 소설이며, 내가 살아갈 이유라고, 요즘도 그렇게 위안하며 한순간에 생의 끝을 목전에 둔 노파가 되고 싶은 쓸쓸함을 견디고 있다. 정지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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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평] 왜 호남이어야 하냐구요?
구길용 뉴시스 광주전남대표
입에 담지 못할 혐오와 비하의 언어들이 우리를 절망케 한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앞서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뇌리를 휘감는다.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보다 못한, 일부 함량 미달의 국회의원들을 지켜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왜 호남이어서는 안 되고, 전남광주라서 도대체 어떻다는 것인가. 저주의 언어를 토해내는 그들을 마주할 때면 한 하늘 아래 살아간다는 게 부끄럽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풍요가 무엇 때문에 가능했는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오랜 빈곤과 소외의 땅, 호남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실은 애써 눈감으려 해도 변하지 않는 역사의 엄중한 가르침이다.지금 전남광주는 단군 이래 가장 역동적인 격변의 시기를 맞고 있다. 헌정 사상 첫 광역자치단체 통합이자, 40년 만에 한 뿌리 복원이라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출범, 여기에 800조원대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까지 더해져 격동의 대전환기를 마주하고 있다. 수도권 일극체제에 대응하는 대한민국 국토 균형발전의 상징이며 지역의 산업생태계를 확 바꿀 대역사임에 분명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최종 입지도 광주 군공항 이전부지로 정해져 청와대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모두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오랜 소외의 땅에 단비 같은 소식이다. 가슴 벅찬 일이지만 기회와 우려가 맞물려가는 대형 프로젝트라 하루하루 긴장감도 감돈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각급 기관.단체는 물론이고 장삼이사, 일반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가득하다.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게 야당과 보수진영의 딴지 걸기다. 4년 간 20조원에 달하는 행정통합 재정 인센티브를 한동안 문제 삼더니 이제는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놓고 어깃장을 놓고 있다. 반도체 공장이 호남에 지어지면 나라 어디가 결딴날 것처럼 부정적인 여론을 쏟아낸다. 덩달아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를 흔들어대는 조롱의 글들이 난무하고 있다. 보수진영의 발목 잡기식 문제 제기가 온라인상 혐오 세태와 뒤섞여 지역 갈라치기로 확대 재생산되는 형국이다.하지만 제기되는 문제들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왜 호남이어야 하는지가 보다 더 선명해진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반도체 클러스터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전력과 용수, 인력이다. 이른바 ‘인수전(人水電)’이라 불리는 반도체 성패의 핵심 인프라인데 전남광주는 간헐적인 전력공급과 만성적인 용수 부족, 그리고 인력 남방한계선에 걸려 성공할 수 없는 불모지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나름의 데이터까지 제시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주장은 전혀 맞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이재명 대통령도 언급했듯이 전남광주는 전력과 용수 분야에서 ‘아껴놓은 땅’이다. 한 때 전남도가 투자유치를 위해 내걸었던 이 궁핍한(?) 구호가 다시 소환되는 것도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생산거점으로 제격이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전력과 대규모 산업용수, 재생에너지(RE100) 기반까지 갖춘 천혜의 땅이라는 얘기다.전력 분야에서는 한빛원전과 함께 국내 최대 규모의 해상풍력과 태양광 발전 등 재생에너지원을 갖추고 있다. 글로벌 핀테크 기업들이 탄소경쟁력을 위해 요구하는 RE100에 대응하기 유리한 여건이다. 이에 맞춰 정부도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 6.3GW 공급계획과 함께 345㎸ 송전망 구축, 2개 변전소, 재생에너지 확대 등을 추진할 방침이다.용수 공급 여건도 국내 어느 곳보다 뛰어난 경쟁력을 갖고 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광역상수도를 통해 호남권 시·군과 국가산업단지에 연간 5억8천만t 규모의 생활·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여기에 반도체 산단 조성에 대비한 추가 공급 물량으로 동복댐 증고를 통한 하루 30만t, 주암댐·장흥댐 여유량 15만t, 보성강댐 10만t, 나주댐 10만t 등 하루 총 65만t 규모를 준비하고 있다.전문인재 양성이나 연구개발도 전남광주가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분야다. 국가AI데이터센터와 AI산업융합집적단지, 광주과학기술원(GIST)을 중심으로 AI 연구개발 인프라가 구축돼 있다. 한국에너지공대, 전남대, 조선대, 호남대 등 지역 대학들은 반도체 분야 전문인력을 지속적으로 양성하고 있다. 목포공고와 해남공고 등이 마이스터고로 지정되면서 전남광주 10개 고등학교에서도 연간 1000명 규모의 AI·반도체 전문인력 공급이 가능해졌다.삼성과 SK 그룹 총수들이 풍부한 인프라를 고려해 전남광주를 선택했다고 언급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마치 기업의 팔을 비틀어 호남 투자를 이끌어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또 하나의 사실 왜곡이다.모든 것을 떠나 호남은 역사적으로 많은 부분을 양보해 왔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경부축을 중심으로 대규모 개발전략이 펼쳐질 때 호남은 말 그대로 소외의 땅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을 좀 먹는 수도권 일극체제도 그 때 만들어진 산물로, 호남은 늘 낙후와 빈곤의 상징이었다. 그러면서도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분연히 일어나 많은 것을 희생했다. 5.18의 아픔을 부등켜안고 살아가는 민주.인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특별한 희생에는 특별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이제는 정당한 대우가 주어져야 한다. 반도체 클러스터의 핵심 인프라가 가장 뛰어나고 국토 개발전략 차원에서도 호남이 우선돼야 한다면 더 이상의 지역 갈라지기는 중단돼야 한다.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호남도 명분에만 급급해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스타벅스 탱크데이나 배재고 야구부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명분으로야 백 번 천 번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논란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호남이 고립되는 역설, 이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제의 배재고 선수들에게 “당당히 고개를 들라”며 품 넓게 보듬어주는 아량이 훨씬 더 격 있어 보인다. 나아가 호남이 결코 비하의 땅이 아니라 기회의 땅임을 스스로 보여줘야 한다. 호남을 뭉개려는 그들에게 보란듯이 전남광주통합특별시와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대역사를 성공시키는 게 급선무다. 호남을 넘어 대한민국 국토 균형발전의 핵심축으로 우뚝 서는 미래, 이젠 호남의 시간이다. 자격 없는 자들이 흔들어대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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