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화실 하나였던 지산동 초가
오랜시간 화업 몰두 모습 '생생'
서양화에 한국적 정신 담기 주력
작가 세계관 응축된 작품 '경외심'
오방풍수 이후 무등산서 마침점
일관된 삶과 예술 살피는 계기로

딸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청춘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새벽이면 화실로 향했고, 해 질 녘이면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에 몰두하던 뒷모습이 선연하다. '오방풍수'의 화가 오승윤은 노쇠한 나이에도 청년 작가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 무등산 자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고, 무등산 원효사는 정신적 안식처였다. 딸에게는 할아버지였던 오지호 화백과 함께 무등산 토끼등과 꾀재를 올랐던 기억을 들려주던 아버지이기도 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복합전시6관에서 열리고 있는 '오승윤: 풍수의 색, 생명의 선율'은 한국 구상 회화를 대표하는 오승윤 화백의 예술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동시에 한 예술가의 삶과 작업이 어떻게 한 가족의 기억과 겹쳐지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오는 18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와 관련해 오승윤 화백의 장녀이자 서양화가인 오수경 화가를 만났다.

◆작고 20주기 앞두고 국립기관 첫 회고전
이번 전시는 국립기관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오승윤 화백의 회고전이다. 작고 20주기를 앞둔 시점에서 마련된 이번 전시는 생전에 그가 평생 천착해 온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오승윤 예술 세계의 궤적을 되짚는다. 전시장에는 회화 30점과 판화 7점 등 총 37점의 작품이 소개돼 구상에서 상징, 민속적 조형과 오방색으로 확장돼 온 그의 작업 여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1939년 개성에서 태어나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오승윤 화백은 한국 미술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 오지호 화백의 둘째 아들로, 평생을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주제로 한국적 정서와 색채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그의 대표작 '풍수' 연작은 오방색을 기반으로 한 독창적 색채 구성과 상징적 화면 구성으로 한국 회화의 정신성과 조형미를 세계적 언어로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전시를 누구보다 복합적인 마음으로 마주한 이는 딸 오수경 화가다. 서양화가로 활동 중인 그는 이번 전시를 단순한 회고가 아닌 아버지가 남긴 사유와 작업의 결과물을 다시 마주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오수경 화가는 작고 작가의 회고전이 지닌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광주 원로 작가들과 함께 아버지의 20주기를 기념하는 전시를 준비해오던 중,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전시 제안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준비 기간은 촉박했지만 전당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오랜 시간 마음속에만 있던 회고전이 현실이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말한다.
많은 이들에게 오승윤 화백은 '오방색과 풍수의 화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거창한 수식어 이전에 매일같이 그림 앞에 앉아 있던 한 예술가다.

"아버지는 오방풍수라는 화두로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밤낮없이 작업하셨어요. 새벽에 일어나 화실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오후에는 방에서 소품 작업을 이어가셨죠. 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국적 오방풍수를 공부하고, 지리산과 전남 지역 사찰을 다니며 스케치를 하셨던 기억이 선명해요. 집과 화실이 하나였던 지산동 초가에서 오랜 시간 화업에 몰두하셨어요."
전시의 시작을 여는 초기작 '대한(大寒)'부터, 1996년 모나코 국제현대미술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회상'은 오승윤 화백의 예술 세계가 본격적으로 전환되는 분기점을 보여준다. '회상'은 민속화와 점묘 풍경으로 알려졌던 작가가 오방풍수라는 자신만의 철학적 주제로 나아가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국내 화단에서는 다소 낯설게 받아들여졌던 이 작품이 오히려 유럽 화단에서 먼저 주목받았다는 점은 그의 작업이 지녔던 보편성과 독창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무등산에서 길어 올린 풍수의 세계
프랑스 유학 이후 오승윤 화백은 다시 '한국적인 것'을 찾기 위해 전국을 답사했다. 화순 동복의 고향 풍경에서 시작해 지리산과 신안, 전남의 사찰은 물론 백두산과 금강산, 독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현장에서 느낀 감흥을 스케치와 일기에 기록하며 서양화라는 형식 안에 한국적 정신과 풍경을 담아내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합리성과 비례를 중시하는 서양화 교육을 받았기에 오히려 더 자유로운 작가로서의 길을 모색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전시의 중심에는 자연과 생명이 하나의 질서로 어우러지는 세계관이 담겨있는 '풍수 무등산' 연작과 대작 '바람과 물의 역사'가 있다.
"아버지가 사셨고 지금도 어머니가 지키고 계신 지산동 초가도 무등산 자락이라는 것을 너무나 자랑스러이 여기셨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등산 자락의 동네라고 하시면서…. 또한 무등산의 원효사는 아버지의 정신적 안식처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왜냐하면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원효사에서 작품의 영감을 꾸준히 받으신 곳이라며 그곳의 약수를 아주 소중히 여기셨거든요. 그런 철학과 경험, 추억이 담긴 무등산을 주제로 대작을 완성하셨죠."
'바람과 물의 역사'는 이러한 사유가 집약된 작품이다. 600호에 이르는 대형 캔버스 안에는 인간과 동식물, 대지와 하늘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얽혀 있다. 딸 오수경 화가는 이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경외심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바람과 물의 역사'를 보면 경외심이 들어요. 시스티나 성당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가 생각나요. 저도 화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작업을 나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인간의 존엄, 자연과 인간의 조화, 한국 정신의 세계, 순수한 인간의 모습, 시공을 알 수 없는 이상적인 풍경을 600호라는 거대한 작품 안에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셨어요. 특히 작품 속 가운데 대례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에서 작가이신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며 제게 다가오는 것 같아 눈물이 나기도 해요."
이번 전시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흑백 판화 연작도 눈길을 끈다. 색채의 화가로 알려진 오승윤 화백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들로 그가 색만큼이나 '선'을 중시했던 작가였음을 증명한다. 유화에서는 볼 수 없는 거친 선묘와 형태는 오히려 그의 관록과 예술적 긴장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아버지를 넘어, 그러나 떠나지 않고
오승윤 화백에게 광주는 단순한 활동 무대가 아닌 정체성 그 자체였다. 충장 김덕령 장군 영정과 고경명 장군 전쟁 기록화, 전봉준 의병 궐기 장면까지 그가 남긴 역사화들은 광주와 전남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현이었다. 오방풍수를 정립한 이후에도 그의 예술은 결국 무등산으로 돌아와 마침표를 찍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 곧 선(禪)'이라는 그의 기록처럼, 오승윤 화백의 삶과 예술은 분리되지 않았다. 문명의 편리함을 멀리한 초가에서의 생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이어간 화업은 그 철학의 실천이었다. 이번 전시는 그가 남긴 작품을 넘어 한국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질문과 한 예술가의 삶의 태도를 함께 들여다보게 한다.
아버지의 예술 세계는 딸의 작업에도 깊게 스며 있다. 오수경 화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직접 데생과 유화 기법을 배웠다. 한동안은 그의 부재를 견디기 위해 아버지가 가르쳐 준 점묘 기법을 붙잡고 작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복제하지 않으면서도 계승하는 길을 택했다. 현재 진행 중인 '필그림' 시리즈는 오방색의 세계화를 꿈꾸는 작업으로, 아버지의 철학을 토대로 자신만의 예술 언어를 모색하는 과정이다.

"혹자는 아버지의 그림을 베끼라고도 하고, 혹자는 아버지와 비교되지 않으려면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해요. 하지만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아버지를 계승하고 그의 정신세계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게 될 거예요. 그래서 저의 과업은 아버지를 복제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계승해 나가는 것입니다. '필그림' 시리즈를 통해 화가로서의 해답을 조금이나마 찾은 것 같아요."
끝으로 오수경 화가는 예술가가 아닌 '아버지' 오승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남겼다.
"아버지가 더 우리 곁에 계셨다면 어떻게 예술가로서 작품 세계를 키워나가셨을지, 또 어떤 기억을 함께 쌓았을지 더욱 상상해보고 그리워하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비망록에 써두고 가신 많은 이야기들이 비로소 조금씩 실현되고 또한 작품의 세계가 널리 펼쳐져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광주에 대한 사랑, 또 민족에 대한 사랑을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 느끼고 함께 사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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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 들던 작가들, 민주주의 위한 ‘생카’ 열다
강수지·이하영 작가의 ‘민주주의 덕질하기’
지난 2024년 겨울,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각양각색의 응원봉들은 2030 여성들이 광장으로 들고 나온 새로운 ‘저항의 도구’였다. ‘덕질’의 아이콘이었던 콘서트용 응원봉의 등장은 ‘비폭력’과 ‘연대’를 상징하는 강력한 메신저로서 빠르게 자리매김됐다.누군가를 뜨겁게 좋아하는 마음, 즉 ‘덕질’의 에너지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키는 연대의 동력으로 변모했는지를 주목한 전시가 광주에서 열린다.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전당장 김상욱)이 내달 29일까지 복합전시5관에서 선보이는 ‘ACC NEXT 아시아 신진 작가전’은 아시아 예술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작가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실험적인 감각을 한데 모았다.강수지·이하영 작가의 ‘민주주의 덕질하기’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광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강수지·이하영 작가의 ‘민주주의 덕질하기’다. 이들은 12·3 불법계엄 당시 광장에서 목격한 독특한 풍경에 주목해 흔히 ‘팬덤 문화’로 치부되던 덕질의 행위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 참여의 에너지로 전환되었는지를 역설적으로 풀어낸다.작가는 전시장 내부에 가상의 아이돌 그룹 ‘키세스’의 멤버 ‘민주’와 ‘주의’를 위한 ‘생일 카페(생카)’를 차렸다.민주주의를 주제로 꾸려진 이 ‘생카’ 현장에는 팬덤 활동에서 빠질 수 없는 창작 소설(팬픽)과 컵홀더, 포카홀더 등 다양한 굿즈들이 관객을 맞이한다. 특히 아이돌 그룹명인 ‘키세스’는 실제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집회를 열었던 이른바 ‘키세스 시위대’의 명칭을 가져와 의미를 더했다.이하영 작가는 “광장에 응원봉을 들고 나온 또래 여성들을 보며, 이들이 어떻게 연대의 감각을 익혔을까 고민했다”며 “덕질은 흔히 평가절하 당하는 행위지만, 사실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기 위한 일념으로 광장으로 향했던 응원봉 세대의 마음이 이 가상의 공간을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치환되는 셈이다.강수지·이하영 작가의 ‘독버섯’ 전시 일부이들의 또 다른 작품 ‘독버섯’은 저항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작가들은 제주 4·3, 여순 10·19, 5·18 민주화운동의 기억을 사회 위협 요소인 ‘독버섯’으로 규정하며 침묵을 강요해온 지배 이데올로기에 주목했다. 오히려 독버섯을 망각에 맞서는 저항의 도구로 재정의하고, 이를 배양하는 공간으로 패스트푸드점을 설정했다. 과거 민주화 운동가들의 책장에 꽂혀 있던 ‘불온 서적’을 매개로 버섯을 키워내고, 현대 사회의 가장 빠른 확산 매체인 ‘배달’ 시스템을 통해 저항의 메시지를 사회 곳곳으로 유통하겠다는 의도다.이주연 작가는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노동과 신체의 흔적을 추적한다. 비디오 작품 ‘언더 그라운드’는 실제 터널 현장에서 지질 기사로 일하는 작가의 아버지를 통해 난청이라는 감각의 상실을 탐구한다. 관람객은 오디오 믹싱을 통해 보청기를 꼈을 때의 불편함이나 난청인의 청각 환경을 직접 경험하며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또한 ‘헤비 웨더’에서는 한강 변의 낚시꾼들과 사라진 반도체 공장 여공들의 흔적을 공포 영화적 문법으로 엮어내며 기록되지 못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가시화한다.중국의 유얀 왕 작가 ‘웨더’ 전시 전경중국 출신의 유얀 왕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디지털 환경을 날씨에 비유한다. SNS에서 무작위로 수집한 이미지들을 수직으로 분절하고 재조립한 영상 작품 ‘웨더’는 더 이상 우리가 정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의 감각을 지배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몰입감을 주는 주황빛 공간은 데이터가 개인의 감정과 인식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이시마 작가의 ‘dir’ 스틸컷. ACC 제공이시마 작가는 전통 서사와 무속적 상상력을 빌려 퀴어 담론과 소외된 개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작품 중 한강 위에 떠 있는 부표에 올라타려 애쓰는 퍼포먼스 영상 ‘dir’은 사회적 ‘정상성’이라는 기준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소수자들의 처절한 생존 노력을 상징한다. 특히 실제 정신과 처방을 받은 약봉지들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해 생존의 무게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대만의 치우 즈 옌 작가 ‘더 레일카’ 이전 전시 설치 전경. ACC 제공마지막으로 대만의 치우 즈 옌은 국가적 트라우마인 2·28 사건의 기억을 다룬다. 작품 ‘만델라 메모리’는 집단적 기억의 오류를 뜻하는 ‘만델라 효과’에서 착안해 공식 기록이 부재한 역사적 공백을 개인의 증언과 허구적 서사로 재구성한다. 관람객이 거울로 된 건물을 통해 좌우가 반전된 자막을 읽어야 하는 구조는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개인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하는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김상욱 ACC 전당장은 “이번 전시는 새로운 세대의 미학적 실천이 아시아를 넘어 어떤 궤적을 그릴지 가늠하는 출발점”이라며 “신진 작가들의 실험과 교류를 통해 아시아 예술의 미래를 함께 상상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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