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서 시로 피어난 '불꽃'···민주주의를 잇다

입력 2025.01.13. 17:25 최소원 기자
['예향' 남도 문학의 원류를 찾아서 ② 해남]
최부·윤선도부터 시작된 지역 문학사
김남주시인 옥중 시 사회변혁 물꼬
황지우·김준태·윤금초·이지엽 등
근현대사 상처 보듬은 시인 잇따라
문학관·문학의 집·박물관 조성도
김남주 시인
공재 윤두서 고택

지난해 12월3일 선포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전 국민을 일순간 혼란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45년 전 5월을 떠올린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다 함께 '민주주의'를 노래하며 짙은 어둠을 밝게 비췄다.

민족 시인 김남주(1946~1994)는 1980년대 우유갑 안쪽에 몰래 시를 눌러쓰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수호하던 인물이다. 해남 삼산면 봉학리에서 출생한 김 시인은 24살의 늦은 나이로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1972년 해남 집에서 라디오를 통해 10월 유신 선포를 들은 그는 즉시 광주로 올라와 친구 이강과 함께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행동에 나서자고 결의했다. 이후 1979년 10월 남민전 총책인 이재문 등과 잠실의 아파트에서 체포돼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서 긴 투옥 생활을 보냈다.

김준태 시인
땅끝순례문학관 전경경

'아 다산이여 다산이여/그대 어둔 밤 조국의 별로 빛나지 않는다면/내 심사 이 밤에 얼마나 황량하리오/어느 세월 밝은 세상 있어 그대 전론(田論)을 펴고/주린 백성 토지 위에 살찌게 하리요'(김남주 시인의 옥중시 '전론(田論)을 읽으며' 중)

김 시인이 옥중에서 교도관 몰래 써 극비리에 유출된 옥중시는 1980년대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에 일대 도화선이 됐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서 통째로 내용을 외우고 있다가 면회를 온 외부인에게 구술해 전해주거나, 우유갑을 해체했을 때 나오는 은박지를 얇게 떼어내 못으로 긁어 쓰고 그마저 들키지 않으려 변기 안에 감추기도 했다. 그가 감옥에서 쓴 시들은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화 교재가 됐으며,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 지난해는 김 시인의 타계 30주기를 맞아 그의 고향 해남에서 아카이브전, 전국 문학인의 밤, 청년 문학제 등 다양한 추모행사가 펼쳐졌다.

금쇄동 고산 윤선도 묘지

◆한국 시문학 이끈 해남의 '문풍'

해남의 시문학은 혼란스러운 사회와 정세를 헤쳐 나가며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억압의 시대에도 꺼지지 않는 민주주의의 불씨를 지켜왔다.

해남에 최초로 시학(詩學)의 씨앗을 뿌린 금남 최부(1454~1504)는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어초은 윤효정, 임우리, 유계린 등의 제자를 길러내며 해남에 문풍(文風)을 몰고 왔다.

17세기에 이르러 해남은 고산 윤선도(1587~1671)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시문학의 성지가 된다. 그는 유배지 완도 보길도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을 남겼다. 윤선도의 문예 정신은 증손인 공재 윤두서에게 이어졌는데, 시서화에 능했던 윤두서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조선시대 풍속화의 길을 열었다.

윤금초 시인

조선 후기 성리학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사회 전체가 사상적 혼란을 겪으며 한시의 전통이 힘을 잃어가던 분위기 속 실사구시의 학풍과 문학에 새 바람이 불어 산문이나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가 대중의 이목을 끌게 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혼란을 거쳐 이동주, 박성룡, 김남주, 고정희 등 현대 시인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이동주 시인

'강강술래', '새댁', '혼야' 등을 남긴 이동주(1920~1979) 시인은 한국전쟁기 광주에서 순문예지를 표방한 '신문학'을 창간했다. 이 시인은 오직 '순수 전통 서정시'를 지향해온 시인으로 해방기의 혼란과 전쟁의 체험을 거치면서 서정적 전통을 유지했던 청록파의 시적 전통을 이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은 '한'을 문학의 한 방법으로 여기며, 사실 그대로의 자연적 묘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자극한다.

박성룡 시인

박성룡(1930~2002) 시인은 자연과 삶의 근원을 통찰한 서정 시인이다. 해남 화원면 마산리에서 출생해 광주서중 문예부원으로 활동하며 교지 '무등'에 자신의 시를 발표했고, 1950년대 동인지 '영도'를 창간했다. 박 시인은 활동 초기 주로 자연을 소재로 깊이 있는 통찰의 시를 추구했으며 정치한 이미지의 단단한 구조력이 돋보이는 시를 펴냈다. 그의 작품 중 동시 '풀잎'은 풋풋함과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또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심상, 인정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시집 '동백꽃', 산문집 '시로 쓰고 남은 생각들' 등을 출간했다.

시인이자 한국 여성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고정희(1948~1991) 시인은 한신대에 입학,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부활 그 이후', '연가'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그는 사회적·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새로운 시 형식의 가능성을 부단히 탐구했으며 부정의 현실 속 정치적으로나 성적으로 금기시됐던 시적 언술들을 해방시켰다. 특히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여성해방출사표' 등의 시집에서는 페미니즘에 입각한 여성 문제에 대해 폭넓게 탐색하며 여성해방의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모색했다.

고산 윤선도 박물관 전경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해남 녹우당.

◆시대 아픔 껴안은 문인들의 사랑

현재는 황지우, 김준태, 윤금초, 이지엽 등의 시인이 그 명맥을 이으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황지우 시인
이지엽 시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너를 기다리는 동안' 등을 쓴 황지우 시인은 형태를 파괴한 해체시로 일상적 의식에 충격을 줬다. 콜라주와 패러디, 시각적 활자 구성, 몽타주 등의 실험적 양식을 통해 시를 '시대와 역사에 대응'하는 무기로 사용했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광주'는 그의 작품 속에서 빈번하게 상흔의 흔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오월 광주의 시인'으로 불리는 김준태 시인도 해남 출신이다. 김 시인의 작품은 시대에 대한 울분과 불안정한 삶 속에서 자신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을 껴안는 것이 특징이다. 광주, 현대사 등을 첨예하게 다룬 그의 시들은 생명 존중과 사랑의 정신이 담겨있다. 그가 1980년 옛 전남매일신문 1면에 실은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당시 계엄군 검열관에 의해 105행의 시가 33행으로 축약됐으며 제목 역시 '아아, 광주여!'로 수정됐다.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에 있는 김남주 시비
백련재 문학의 집 전경

고산 윤선도의 12세 후손인 윤금초 시조시인은 다양성과 개방성이 엿보이는 작품을 통해 '옴니버스 시조'를 내세우며 시조 양식의 확장을 꾀했다. 틀에 갇힌 시조를 현대적 장르로 재해석하기 위해 '백악기 여행', '인터넷 유머', '엘니뇨, 엘니뇨' 등의 작품으로 새로운 시도를 행했다. 1986년 정운시조문학상을 시작으로 2002년 고산문학대상, 2006년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시조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해남 땅끝순례문학관 상설전시실

이지엽 시인은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일어서는 바다'로 당선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작품은 유년 시절의 가난과 오늘의 일상을 통해 삶의 온기와 활력을 충전한다. 시조시인으로서 시조의 현대성을 확장하며 자유시 정신에 기대어 다양한 변화를 꾀함으로써 현대시적인 형식미를 발휘한다.

해남 땅끝순례문학관 상설전시실

◆문학의 숨결 보존 위한 노력 이어져

지난 2017년 개관해 해남 연동리에 자리잡은 땅끝순례문학관은 금남 최부부터 현대의 이지엽 시인까지 이어진 '시문학의 성지' 해남 문학의 산실을 보존하고 있다.

김남주 시인이 우유갑 은박지에 새긴 시

지하 1층, 지하 2층 규모로 건립된 문학관은 상설·기획 전시를 마련해 해남 출신 문인들의 작품과 삶을 보다 가까이서 생생하게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김남주 시인 타계 30주기를 맞아 기획전시실에서 아카이브전 '은박지에 새긴 사랑'을 진행했다. 행사는 시인의 육필 원고와 옥중에서 작성한 시 등 미공개 됐던 자료들을 통해 시인의 뜨거운 창작열과 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으로 꾸며졌다.

지난해 땅끝순례문학관에서 진행한 김남주 시인 30주기 추모 아카이브전 '은박지에 새긴 사랑'.
고정희 시인

땅끝순례문학관은 상반기 1월까지 운영을 끝으로 리모델링 공사에 착수해 하반기 재개관할 예정이다. 이동주부터 고정희 시인에 이르는 네 작가의 독립적인 전시 공간들을 더욱 세밀하게 조성하고 '문학테라피' 등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시·청각 복합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김남주 시인 생가

문학관 옆에 위치한 백련재 문학의 집은 문인의 창작 활동 지원을 통해 지역 문학 향유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내 고즈넉한 한옥형 건물로 건립돼 모집된 입주작가들이 상주한다. 문학창작공간, 다목적실, 토론방 등으로 구성됐다.

고정희 시인 생가

건너편에는 고산 윤선도 박물관이 조성됐다. 시조시인 윤선도 선생의 사당을 비롯해 특별전시실, 제 1·2전시실에서 해남 윤씨가가 보존해온 유물들을 한눈에 만나볼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고가로 알려진 녹우당,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숲, 공재 윤두서 고택 등을 거닐며 해남의 정취에 빠질 수 있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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