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정복자 칭기즈칸의 진면목

입력 2024.08.27. 14:47 최민석 기자
왕역평 저술 '장춘진인서유기' 출간
구처기 조사 칭기즈칸과 대화 내용 기록
전쟁과 살생 멈추고 자비 베풀라고 간언
도교 방식 구술 전승 내용 저술 후대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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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저명한 도사들은 매우 많지만, 공적과 헌신의 면에서 볼 때 구처기 조사는 분명히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로 꼽힌다. 그는 천하의 창생을 구하기 위해 74세의 고령을 무릅쓰고 3만 5천 리 길을 가서 칭기즈칸을 만났고, 무고한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이러한 기백과 지혜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최근 나온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더봄刊·왕역평 지음·이화영 옮김)는 도교 전진교의 큰 스승인 '장춘진인' 구처기가 몽골제국의 초대 황제 칭기즈칸의 초청에 응해 서역을 여행해 칭기즈칸과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장춘진인 구처기는 도교 종파인 전진교의 도사이다. 그는 전진교를 연 왕중양의 제자 북칠진(北七眞) 중 한 명이며, 왕중양, 마옥, 담처단, 유처현에 이어 전진교의 5대 장문이었다. 전진교 용문파(龍門派)의 개조이기도 하다. 원나라 때 전진교를 융성시킨 것은 구처기의 공적이 크다.

구처기 조사는 왕중양 조사에게 의발을 이어받았고 용문파를 창시했다. 이후 조도견 조사는 구처기 조사의 의발을 이어 용문파의 첫 번째 전승자가 됐다. 이 책의 필자 왕역평 역시 전진교 용문파의 18대 전승자다.

800년 전 이지상 조사는 '장춘진인서유기'를 저술했고, 이 대작은 도교 경전인 '도장'(道藏)에 수록됐다. 이지상 조사는 구처기 조사의 서행에 동행한 21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지만 송도안 조사와 함께 진해성에 남았다. 그렇다면 이지상 조사는 그 이후 구처기 조사의 행적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까? 그런 내용은 도교의 방식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다.

이지상 조사의 저술 '장춘진인서유기'는 매우 모호한 부분이 많고, 그러므로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매우 적다. 애초에 구처기는 칭기즈칸을 죽이려고 했고, 칭기즈칸도 구처기 조사를 죽이려고 했으나 후에 이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따라서 어떤 내용은 명확하게 글로 쓸 수 없었고, 구처기 조사도 이에 대한 언급을 꺼렸다. 따라서 이지상 조사의 기록만 가지고는 일대천교(一代天驕) 칭기즈칸이 구처기 조사의 간언에 따라 살생을 멈추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칭기즈칸이 확실히 구처기 조사의 간언에 따라 살생을 멈추고 자비를 베푼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칭기즈칸이 비길 데 없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을 두고 사람들은 그를 살육의 대명사로 여겼으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이 책을 읽고 칭기즈칸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준다는 측면에서 출간 의미가 크다.

구처기 조사가 풍찬노숙을 하면서 불원만리 아프가니스탄 히말라야에 도착해 칭기즈칸에게 살육을 중단할 것을 설득한 사건은 수천만 명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유럽의 르네상스를 구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말로 옮긴 이화영씨는 왕역평 계승자의 지도로 도가 수련에 입문했고 현재 숙명여대 초빙교수로 활동 중이다.

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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